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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슬라로부터 간성의 고구려 성주를 죽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신라 조정에서는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암암리에 백제와 동맹을 맺기는 했지만 아직 송곳니를 드러낼 때는 아니었다. 지금 신라의 군사력으로 고구려에 대항하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눌지왕은 대신들을 돌아보며 언성을 높였다.
“하슬라 성주는 어찌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인가! 고구려에서 가만히 있겠소?”
이찬 후엽이 나섰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찌하겠습니까. 일단 고구려로 사신을 보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백배사죄를 하겠습니다.”
눌지왕을 다독이는 후엽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후엽은 하슬라 성주 삼직이 고구려의 성주를 해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둘은 같은 마을에서 자란 죽마고우였다.
삼직의 아버지는 고구려에 볼모로 가는 실성을 수행해 국내성으로 갔다. 그는 의지할 곳 없는 왕자를 정성으로 모셨다. 실성 역시 그를 믿고 아꼈다. 둘의 관계는 군신을 뛰어넘어 형제와 같이 끈끈했다.
실성이 신라로 돌아와 왕위에 오르자 삼직의 아버지는 장군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측근에서 왕을 보필하며 신뢰를 한 몸에 받았다. 늘 충심을 다해 임금을 모셨고, 그 모습은 아들 삼직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신 후에도 삼직은 그 유지를 이어받아 실성왕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눌지가 반란을 일으켜 실성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 당시 삼직은 왜구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해 풍도에 머물고 있었다.
도성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삼직은 분을 참을 수 없었다. 당장에라도 군사를 이끌고 도성으로 쳐들어갈 기세였다.
부장 제석이 그를 극구 말렸다.
“폐하께서는 이미 승하하셨습니다. 더구나 안타깝게도 서불한 미사품을 비롯한 대신들이 눌지를 왕으로 인정했습니다. 장군께서 홀로 싸운들 의미 없는 죽임을 당하게 될 뿐입니다. 제가 듣기로 장군의 죽마고우인 후엽 공이 이번 거사에 관여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저들도 장군을 함부로 해치지는 못할 겁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해 보니 제석의 말이 옳았다. 헛되이 죽는 것보다는 때를 기다려 원수를 갚는 것이 나았다.
과연 제석의 말대로였다. 눌지왕은 후엽의 청을 들어 삼직을 내치지는 않았다. 다만 도성에 두기는 꺼림칙했는지 변방으로 돌렸다. 삼직은 여러 변방의 성을 전전해야 했다. 그러다가 마침 하슬라성에 부임하게 된 것이었다.
후엽은 삼직이 고구려와 신라를 이간질해 눌지왕을 곤경에 몰아넣으려 한다는 것을 곧 알아챘다. 그가 순순히 눌지왕 밑에서 녹을 먹는 게 의아했는데 이번 일로 모든 게 분명해졌다. 삼직은 일부러 간성 성주를 해친 것이었다.
후엽은 마음속으로 갈등했다. 삼직은 어렵던 시절 자신을 알아준 유일한 벗이었다. 그래서 그를 지켜 주고 싶었다. 하지만 눌지왕이 위험에 처했는데 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양쪽 모두 다치지 않게 이번 일을 잘 처리해야 했다.
고구려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국경을 넘어 쳐들어왔다. 후엽은 자청해서 단신으로 고구려 진영에 찾아갔다.
원정군의 지휘를 맡은 고구려 장군 고명보(高明補)는 언짢은 얼굴로 후엽을 맞이했다.
“양국이 우호 관계를 맺어 온 세월이 수백 년이오. 그런데 어찌 대고구려의 성주를 참혹하게 죽일 수가 있소. 본관은 대왕 폐하의 명을 받들어 이런 흉악한 일을 저지른 자를 응징하러 왔소.”
후엽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소국(小國)은 대대로 상국(上國)을 모심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었습니다. 이번 간성 성주를 해친 일은 우발적인 사고였을 뿐입니다. 추호도 상국에 불경한 생각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 부디 저희의 애타는 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
후엽이 이토록 저자세로 나오니 고구려 장수도 무턱대고 징치할 수는 없었다.
고명보가 주춤하자 이찬 후엽은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이번 일에 대해 사죄하는 의미로 죄인 삼직은 국법에 따라 엄단할 것이며, 더불어 실직주의 땅을 고구려에 바치겠나이다. 부디 굽어살펴 주소서.”
장수왕이 군사를 일으킨 의도는 신라를 위협하여 딴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평양성에서 먼 남방까지 영향력을 미치기 어려운 마당에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까지 아우르기 위해서는 하는 수 없이 신라와의 선린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귀국의 충정이 이와 같은데 어찌 한 번의 실수로 벌할 수 있겠소. 폐하께 품하여 관용을 얻어 보도록 하겠소.”
그는 임금의 의중을 꿰뚫고 있었기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고명보의 보고를 받은 장수왕은 신라의 사죄를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실직 땅을 얻은 것은 기대하지 않은 성과였다.
간신히 고구려의 침입을 막은 후엽은 하슬라성으로 삼직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후엽이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서는데 삼직의 부장인 제석이 다가와 은밀히 편지 한 통을 전했다. 이를 펼치니 낯익은 필치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이번 일을 벌인 것은 고구려 태왕의 진노를 이끌어 내 눌지를 폐위시키고 실성왕의 핏줄로 왕위를 잇게 하려던 거였네. 그런데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그 대가로 실직주를 고구려에 넘겨주게 됐군. 의도했든 안 했든 나라에 큰 죄를 지었으니 마땅히 벌을 받아야겠지.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회개하며 살겠네.”
후엽은 글자마다에 벗의 고통이 담겨 있는 듯해서 가슴이 미어졌다. 하지만 이것이 운명이라면 피할 수 없었다.
이찬은 그 자리에서 편지를 불태웠다. 바람에 날아가는 재를 보며 삼직을 가슴에서 지웠다.
서력 455년, 백제에서는 비유왕이 승하하고 뒤를 이어 태자 경사(慶司)가 즉위했다. 이가 바로 제21대 임금인 개로왕(蓋鹵王)이다.
개로왕은 태자 시절부터 해씨(解氏)의 전횡에 많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해씨는 전지왕(腆支王) 이후 대대로 세도를 누렸다. 전지왕은 해씨의 도움으로 왕위를 되찾았기에 그들을 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뒤를 이은 구이신왕(久爾辛王)은 해씨가 제 외가이자 처가이기에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비유왕 대에 이르러서는 왕실의 버팀목인 여신(餘信)이 돌아가고 해씨의 가주인 해수(解須)가 상좌평에 올라 조정을 장악했다. 3대의 걸쳐 왕후를 배출하고 중요 관직을 독점한 해씨 세력의 힘은 왕권을 능가할 정도였다.
하루는 개로왕이 처소에서 해씨를 누를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도무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를 지켜보던 염한(廉汗)이라는 시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무슨 근심이 있으십니까?”
염한은 태자 시절부터 개로왕을 모셨던 자로 눈치가 빠르고 꾀가 많았다.
“해씨들 때문에 걱정이 크구나.”
국왕은 심복을 믿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이를 다 들은 시위는 빙긋이 웃었다.
“그까짓 일로 뭘 그리 염려하십니까?”
“너에게 묘안이라도 있단 말이냐?”
개로왕의 귀가 번쩍 뜨였다.
“제게 계책이 있는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염한이 개로왕에게 올린 계략은 이러했다.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해씨를 직접 공격할 수는 없다. 먼저 해씨의 중요한 가신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면 해씨 가문의 손발을 묶을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해씨를 하나씩 제거해 나가자는 것이었다.
개로왕은 염한의 제안을 받아들여 해씨 가주의 측근인 재증명협(再曾明協)과 고이명치(古爾明治)를 도성으로 불렀다. 이들은 해씨의 후광을 입고 성장한 무진주(武珍州)의 귀족이었다.
재증명협은 속히 들어오라는 왕명을 받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급히 도성의 해수에게 사람을 보내 연유를 물었다. 하지만 해수도 금시초문이었다.
재증명협은 가주도 모른다는 전갈을 받고 더욱 불안해졌다. 그렇다고 지엄한 왕명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아들 재증걸루(再曾桀婁)를 불렀다.
“아무래도 이번 길은 길(吉)보다 흉(凶)이 더 많을 것 같다. 만일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너는 즉시 고구려로 달아나거라.”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말린다.
“폐하께서는 해씨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계십니다. 그들과 밀접한 관계인 아버지를 궁으로 불러들인 데는 어떤 음모가 있을 겁니다. 절대 가지 마십시오.”
재증명협은 침울하게 말한다.
“신하 된 도리로 왕명을 어길 수는 없다. 내게 무슨 일이 생겨도 왕을 상대로 싸울 생각은 하지 마라. 네가 무사한 것이 아비의 유일한 바람이다.”
재증걸루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나서지 않겠다고 다짐까지 해야 했다.
고이명치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수레를 타고 도성으로 향했다.
재증명협과 고이명치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은 개로왕은 군사를 시켜 두 사람을 포박하게 했다. 둘은 영문도 모른 채 붙들려 감옥으로 끌려갔다.
이튿날부터 심문이 벌어졌다. 개로왕은 친히 국문장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결박을 당한 채 바닥에 꿇려졌다. 양옆에 형리가 몽둥이를 들고 서 있었다.
“너희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걸 안다.”
재증명협은 억울했다.
“어찌 그런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을 하십니까. 저희는 단 한 순간도 역심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
부인하면 할수록 날아오는 매의 강도는 세졌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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