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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참이 지나도 혐의를 인정하지 않자 개로왕은 둘을 다시 옥에 가두었다.
심문은 며칠간 계속됐다.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재증명협과 고이명치는 죄를 자복하지 않았다.
닷새가 지나도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하자 개로왕은 그들이 모반을 꾀하다가 발각됐다고 공표하고 바로 참형에 처했다.
이렇게 되자 두 사람의 후원자였던 상좌평 해수는 난처한 지경에 처했다. 자칫하면 이번 역모에 연루됐다는 의심을 받을 수 있었다. 해수는 개로왕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개로왕은 상좌평을 보며 차갑게 말한다.
“이는 역모요. 조금이라도 그들과 연관이 있는 사람은 책임을 면할 수 없소. 다만, 전날의 공을 생각해서 파직하는 선에서 마무리하겠소.”
해수는 울분을 삭이며 대전을 물러 나왔다.
이 일로 해씨 일파는 하나둘씩 관직에서 밀려났다. 개로왕은 태자 문주(文周)를 상좌평에 앉히고 왕실의 종친들로 공석이 된 자리를 메웠다.
한편 재증명협과 고이명치가 처형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재증걸루는 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한 다짐을 저버리고 고이명치의 아들 고이만년(古爾萬年)과 함께 무진주 호족을 규합해 군사를 일으켰다.
개로왕은 왕자 여곤(餘昆)에게 1만의 군사를 주어 무진주의 난을 토벌하게 했다. 재증걸루는 성벽에 의지하여 토벌군에 맞섰지만 겨우 3천여 명의 군사로 다수의 왕군을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사세가 기울자 재증걸루는 고이만년과 함께 밤을 틈타 성을 빠져나가 고구려로 달아났다. 장수왕은 이들을 받아들여 사자의 품계를 주고 장수로 삼았다.
무진주의 반란이 평정되자 개로왕은 이를 빌미로 왕권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되니 당연히 귀족들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백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을 품고 있는 꼴이었다.
개로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나아가 신라와의 동맹 관계를 견고히 하는 한편 고구려에 대한 대비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서력 472년, 개로왕은 여례(餘禮)와 장무(張茂)를 북위에 사신으로 보내 함께 고구려를 치자고 설득했다.
여례가 북위왕 탁발홍(拓跋弘)에게 전한 국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었다.
“우리는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 뿌리를 두고 있소. 그런 까닭에 선세(先世)에는 그들과 두터운 우의를 나누기도 했소. 그런데 고구려 사유가 왕으로 등극하자마자 우호를 저버리고 우리의 영토를 침범했소. 조왕(祖王)께서는 의로운 군대를 일으켜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사유의 목을 벴소. 그 후로 고구려는 감히 우리 땅을 노리지 못했소. 하지만 연이 멸망하고 난민을 받아들여 세력을 키운 고구려는 다시 우리나라로 쳐들어왔소. 지난 30여 년의 세월 동안 우리는 그들과 싸우느라 많은 국력을 허비했소. 고구려의 현왕인 거련은 성정이 포악하여 자국의 백성은 물론 대신과 귀족들까지 두려워하고 있소. 내부에 균열이 생긴 이 틈을 노려 고구려를 친다면 그 죄를 물을 수 있을 것이오.”
동진(東晋)과의 비수지전에서 대패한 전진이 붕괴한 후에 선비족 탁발규에 의해 세워진 북위는 세력을 만방에 떨치더니 화북을 통일하기에 이르렀다. 개로왕은 이들과 힘을 합쳐 고구려에 항거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강남에서 새롭게 일어난 송(宋)과 대치하고 있어 당장 군사를 일으키기는 어려웠다.
북위 왕이 선뜻 승낙하지 않자 여례가 장무에게 눈짓을 했다. 그는 짐 속에서 안장을 꺼내 왔다.
여례가 헛기침을 한 후 말한다.
“지난 경진년(庚辰年)에 우리나라 서쪽 해안에서 시체 십여 구가 발견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의복과 기물·안장·굴레 등도 습득됐습니다. 살펴보니 모두가 북위의 것이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북위의 사신이 우리나라로 오다가 고구려 수군을 만나 봉변을 당한 것이라 하더이다.”
북위 왕은 장무가 바친 안장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먼 길을 무릅쓰고 찾아와 준 것은 고맙게 생각하오. 하지만 우리는 양국의 분쟁에 끼어들고 싶지 않소. 백제가 고구려와 화목하지 못하고 여러 차례 싸웠다 해서 그들에게 이를 갈며 복수한다면 어찌 의(義)에 순응하고 인(仁)을 지킨다고 할 수 있겠소. 그리고 우리가 보낸 사신단이 종적이 묘연한 것은 맞지만 그것이 고구려의 소행이라는 어떤 증거도 없소. 이 안장 역시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소. 고구려가 종종 백제를 침범하는 데는 백제군에게 비명횡사한 선대왕의 원수를 갚겠다는 의도도 있소. 이 모두 지난 일이니 앞으로는 두 나라가 구원(舊怨)을 떨쳐 버리고 화합의 길을 모색해 보는 게 어떻소? 짐이 사신을 보내 고구려 왕을 설득할 테니 백제도 이에 호응해 주길 바라오.”
여례는 북위가 고구려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확인한 채 빈손으로 돌아왔다.
기대했던 북위마저 외면하자 개로왕은 고구려 공격을 기약 없이 미룰 수밖에 없었다.
백제가 신라와 동맹을 맺고 북위에 국서를 보내는 등 고구려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장수왕은 노발대발하여 백제를 응징할 마음을 먹었다.
장수왕은 신하들과 백제를 공략할 일을 의논했다.
백제 사정에 밝은 재증걸루가 의견을 말한다.
“백제 왕은 독선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자만심을 이용한다면 백제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연후에 공격한다면 힘들이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 간자를 보내 그를 충동질하십시오.”
대로 제우(齊于)가 국왕에게 아뢴다.
“물고기를 낚으려면 좋아하는 미끼를 써야 합니다. 소신이 들으니 개로왕이 바둑을 아주 좋아한다고 합니다. 바둑 잘 두는 자를 간자로 활용하십시오.”
장수왕은 제우의 말에 따라 나라 안에서 바둑 잘 두는 사람을 찾았다.
이 소식을 들은 승려 도림(道琳)이 궁으로 찾아와 자청한다.
“소승이 어리석어 도를 깨우치지는 못했지만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은 태산과 같습니다. 행자 시절부터 큰스님께 바둑을 배워 그 묘리를 조금이나마 터득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내치지 않으신다면 진력을 다해 나라에 보탬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장수왕은 도림의 말을 듣고 기뻐했다.
도림은 그길로 한성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무턱대고 개로왕을 만나자고 할 수는 없었다. 그는 궐문으로 나아가 수문장에게 고했다.
“소승은 어려서부터 바둑을 두어 이젠 묘경(妙境)에 이르렀습니다. 폐하를 뵙고 바둑의 도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개로왕은 수문장에게서 이 말을 전해 듣고 호기심이 동하여 도림을 불러들였다.
“어디서 온 누구인고?”
“고구려에서 온 도림이라 합니다.”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온 것이냐?”
개로왕은 도림이 고구려에서 왔다는 말에 의심이 들었다.
도림은 자신의 처지를 토로했다.
“고구려의 거련왕은 전통 있는 명문 귀족은 멀리하고 새로이 도읍으로 삼은 평양 출신 귀족만 총애하고 있습니다. 소승이 보다 못해 그를 찾아가 나라의 화합을 위해서는 인재를 두루 등용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간신의 충동질만 믿고 저를 끌어다 죽이라 명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저의 심장을 꺼내오게 했습니다. 잔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다행히 처형을 맡은 시위가 불심(佛心)이 깊은 자라 차마 소승을 죽이지 못하고 풀어 주었습니다. 대신 멧돼지의 심장을 제 것이라 속여 바치는 바람에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대왕께서는 덕이 넘치실 뿐 아니라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으시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한 몸 의탁해 볼까 하고 찾아왔습니다.”
도림의 얘기를 듣고 개로왕은 의심을 풀었다.
“그대가 바둑을 잘 둔다 하던데 정말인가?”
“경지에 이르렀다 자부합니다.”
개로왕은 궁녀에게 바둑판을 가져오게 했다.
“짐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도림과 바둑을 두어 보니 과연 국수(國手)의 솜씨였다. 개로왕은 도림을 철석같이 믿어 상객으로 대접하고 자주 불러 바둑을 두며 환담을 했다.
시일이 지나면서 개로왕은 도림의 인품과 학식에 반했다. 그를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할 정도였다.
하루는 도림이 국왕과 바둑을 두다가 조용히 아뢴다.
“소승이 타국 사람임에도 폐하께서는 꺼리지 않고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에 대한 보답을 털끝만큼도 하지 못한 것이 송구할 뿐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주제넘기는 하지만 나랏일에 대해서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라. 나라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누구의 말이든 못 듣겠는가.”
“백제는 사방이 산악(山岳)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는 천혜의 지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위의 어떤 나라든 감히 침범할 엄두를 못 내고 엎드려 섬기기를 원할 겁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그 위세를 천하에 펼쳐 보이셔야 합니다. 하지만 한성의 성곽과 궁실은 수수하다 못해 낡고 수리조차 되어 있지 않습니다. 선왕의 유골은 임시 매장된 것처럼 엉성하게 묻혀 있고, 백성의 가옥은 홍수라도 나면 금방 휩쓸려 갈 만큼 초라합니다. 이 어찌 사해(四海)에 그 명성을 떨치고 있는 대국의 모습이라 하겠습니까.”
개로왕은 도림을 말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대의 말이 옳다. 짐은 사해를 평정하고 천하에 이름을 드날렸는데 지금의 궁성은 이에 걸맞지 않다. 역사를 일으켜 대국에 어울리는 성곽과 궁실을 지어야겠다.”
백제왕은 백성을 징발하여 성을 쌓고 궁실과 누각을 화려하게 지었다. 그리고 한수(漢水)에서 캐낸 바위로 거대한 곽(槨)을 만들어 부왕의 유골을 이장했다. 더불어 한수 변에 둑을 쌓았는데, 사성(蛇城) 동쪽에서 시작해서 숭산(崇山) 북쪽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무리한 토목 공사가 이어지자 나라의 창고가 바닥났고 백성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아도취에서 헤어나지 못한 개로왕은 도림과 함께 날마다 화려한 누각 위에서 주연을 즐겼다.
태자를 비롯한 충신들이 여러 차례 간했으나 말귀에 염불이요, 쇠코에 경 읽기였다. 뜻있는 신하들은 조정을 떠났고 오로지 간신들만이 남아 왕의 비위를 맞췄다. 사정이 이러하니 나라는 온통 백성의 원성으로 가득 찼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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