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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시인 정재학의 호남 문제 해법을 위한 제언(2)
[호남문제 어떻게 풀 것인가]⑨ 설치는 종북좌파… 호남 피해의식·적개심 파고들었다
이적단체들, 민주노총 간부. 5·18가짜유공자에 전라도 출신 다
반골지향은 망국의 길… 네편내편 진영논리에 허우
문재인이 발라준 꿀맛의 향수… 호남은 정권탈환에 불타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1-17 18:24:18
 
 
▲ 정재학 시인·칼럼니스트는 출생·성장·교육·취업 지역 모두 호남인 호남 토박이이다. 지난 20여 년 대한민국 통합성을 위해 전교조반대운동 등 보수논객으로 활동하면서 큰 고초를 겪었다. 그는 호남의 천년 한(恨)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호소하며 호남인들에게 보편적인 차별의 기억으로 호남선 복선화 문제를 들었다. 절실한 숙원이었으나 역대 정권에서 외면되다 김대중정부 들어 1년 만에 실현됐다.
 
정재학 시인·칼럼니스트의 호남 문제 해법을 위한 제언을 이어서 들어 보자. 그는 호남을 구출해 대한민국 구성원이 되게 하려면 먼저 호남의 한(恨)을 알아야 한다고 호소한다.
 
정 시인에 따르면 호남을 향한 불합리·부당한 평가와 멸시의 역사가 1000년 이어진 결과 호남은 반(反)대한민국의 중
심이 되고 말았다. 
 
호남은 반역향(反逆鄕)이 아니다
 
반역의 땅, 호남이란 훈요십조에 나온다는 차령 이남 배역지(背逆地)’를 구체화한 말이다. 여기에 당쟁이 개입되며 조작이 또다른 조작을 낳기 시작했다. 선조 때의 정여립 사건은 현대 사가(史家)들도 반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당파싸움에서 밀려난 전주 태생의 정여립(1546~1589)이 사람을 모아 대동계를 만드는데 당시 황해도 감사가 이를 모반으로 고변한 것이다임꺽정 토벌 후 민심이 흉흉하던 시절이라 이를 속히 받아들인 선조는 정철을 비롯한 서인들을 동원해 기축옥사를 일으켰다. 임진왜란 3년 전의 일이다
 
이 일로 얼마나 많은 호남의 인재가 죽어 나갔는지 모른다. 이들이 살았다면 임진왜란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선비와 김덕령 장군 이하 남명 조식 선생의 수제자마저 죽임을 당했다. 광산 이씨 문중의 원한은 하늘을 찌른다. 이씨 문중 이발(李潑)의 노모와 어린 아들에게까지 모진 고문을 가해 죽인 일은 정철이 어떤 인물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호남을 반역향으로 규정한 선조는 작은 벼슬에서마저 전라도 출신을 제외시켰다. 조정이 이러하니 일반 백성도 분위기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 통탄할 일이 300년을 간다그러나 임진왜란을 기록한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엔 호남인의 처절하고 헌신적인 호국 투쟁의 모습이 기록돼 있다. 전라좌수사로서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명량대첩의 신화적인 승리에 이르기까지 호남인들은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임진왜란 당시 이시다 미츠나리라는 왜장(倭將)이 있었다.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배함으로써 히데요시 가문의 멸족을 앞당긴 인물이다. 그가 전라도 관찰사 권율 장군을 상대로 행주산성을 두 번 공격해 두 번 다 패퇴했을 때 곁에서 위로한답시고 나온 말이 있다. “장군, 저들은 전라도 병력입니다.” 그들이 패인을 자인하게 만든 것은 호남 장졸들의 힘이었다
 
선조는 종전 후 축하연에 의병들을 부르지 않았다. 의주로 피신할 때 말고삐를 잡았던 노복들까지 치하를 받았으나 왜란 극복이 명나라의 도움을 얻어 낸 자신의 공임을 강조하자면 의병의 존재가 불편했을 것이다. 왕의 그릇이기엔 비겁·무능하며 도량조차 협소했던 인물이 호남에 반역향이라는 낙인을 찍어 크나큰 역사적 상처를 남겼다. 이 또한 훈요십조의 영향이라고 생각된다.
 
임진왜란 당시 부산포 해전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159210월 이순신은 일본군 본진이 있는 부산포로 배를 몰고 나아갔다. 무려 100여 척을 태우고 있을 때 쇠뇌(사정거리와 관통력이 뛰어난 화살)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왜군에게는 없던 무기였다. 쇠뇌를 쏜 사람들이 누구였겠나. 결국 이 전투에서 정운 장군 등 다수의 장수가 전사한다. 이순신의 한탄이 난중일기에 남아 있다
 
부산포는 이순신이 진격을 꺼려한 유일한 곳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다시 부산포 진격을 명한다. 왜군의 본진을 치라는 것이었지만 너무나 위험한 곳, 본진을 방어하기 위한 대책이 철저하게 준비된 곳이었다. 명령을 받들지 않자 선조는 이순신을 잡아들여 모진 형벌을 가한다. 의주에서 하늘만 바라보던 무능한 인간이 저지른 참사였다
 
그리고 원균을 시켜 부산포로 진격시키다가 조선 해군이 전멸당하는 치욕을 겪는다. 다시 이순신을 내려보낸 선조. 자존심은 있었는지 이순신에게 곧바로 벼슬을 주지 않고 백의종군 시킨다. 그 먼 남도길을 걸었을 이순신의 뒷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임진왜란 의병 활동엔 율곡 이이의 제자들을 비롯해 남명 조식의 문하생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선비가 참여했다. 그러나 퇴계 이황의 제자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관념적인 성리학의 세계에 빠져든 결과이다. 이것이 영남학파의 실제였으며 국난을 당할 때마다 나타나는 비겁한 자들의 본모습일 것이다
 
조선조엔 반란이 잦았다. 태조를 따르던 조사의 난부터 진주민란까지 20여 차례에 이른다. 선조가 호남을 반역의 땅으로 몰아간 것은 부당하다. 모반의 역적으로 찍힌 정여립은 군사를 일으킨 적도, 관아를 습격한 적도 없다. 당시 당쟁을 주도한 실권자들이 정략적으로 정여립을 이용한 것이다. 날조된 측면이 크다. 
 
귀양지로서의 호남에 대한 조롱도 있다. 호남은 반역향이라는 분위기가 경기·영남을 중심으로 확산되면서 조선 후기 들어 귀양객들이 호남에 집중된다. 조정에서 정적들을 귀양 보낸 곳이 주로 호남 지방이다. 이들 다수의 귀양객을 근거로 호남을 반역향 취급한다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 시절 귀양객을 받아들일 여력이 없다며 상소를 올려 반대한 고을도 있었다. 서포만필의 저자 김만중이 거제도로 귀양갔을 때 거제 군수가 그렇게 장계를 적어올렸다. 고을이 가난해서 귀양객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귀양객의 처소를 지키는 군졸을 세워야 하고 식량과 땔감을 대 줘야 하는 등 챙길 게 많다. 아프면 죽도록 놔둘 수도 없는 일이다물산이 넉넉하고 인정 많은 호남은 이들을 차별없이 받아들였으며 귀양 문화를 꽃피웠다. 다산 정약용이 그러했고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이 그러했다. 그 무렵 우리의 다도가 초의선사의 손에서 완성된다.
 
호남을 향해 간사·경박하다는 평가는 왕따를 당하는 친구에게 우르르 모여들어 폭행을 가하는 학교 폭력과 다름없다. 이런 대접에 대한 호남인들의 쓴웃음 내지 조소가 1000년을 이어 갔다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훈요십조와 풍전세류 해석의 악의적인 행태가 일반화 과정을 겪으며 호남인들의 한은 더욱 깊어진다.
 
호남의 한을 파고든 좌익
 
조선조 사람들은 호남을 거론할 때 반드시 영남을 대비시켰다. 호남인은 사박(詐薄)하지만 영남인은 언행이 무겁고 믿을 만하며 질각근중(質慤謹重), 즉 인간됨이 무겁고 믿을 만하다는 식의 평가였다. 호남인들의 인간성 자체를 땅바닥에 내팽개친 표현이다
 
실제 역사는 어떠했나.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역사의 격동기 때마다 영남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간난을 이기고 차려 놓은 밥상을 독차지한 일은 있었다. 고난을 온몸으로 부딪히고 해결해 나간 것은 호남인들 아니었던가. 
 
고려 현종 때 최제안 이후 신라계가 고려 조정을 독점하자 경주 출신들이 정·관계에 대거 진출한다. 김부식도 경주 출신이었고 그의 아들 김돈중도 이때 벼슬에 오른다. 이들이 무신들에게 말로 다 못 할 횡포를 저질러 정중부의 난을 시작으로 무신정변이 일어나게 된다. 차려 놓은 밥상마저 엎어버린 일이었다.
 
조선조 영남인들이 역사를 반복시킨다. 퇴계 이황의 제자들은 스승의 학맥을 이은 영남학파임을 자랑스러워하면서 변란 때는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런 그들이 호남인들을 내려다보며 간사·경박하다는 식의 평가를 한 셈이다. 언행이 무겁고 믿음직한 사람들이면 숨고 도망쳤을까. 훗날 이들이 바로 안동 김씨 60년 세도정치를 하며 조선을 멸망으로 이끌지 않았나.
 
안동 김씨 60년 세도정치가 나라를 어떻게 망쳤는지는 대원군의 일화에서 알 수 있다. 대원군이 집권 후 안동 김씨 집안에 요구했던 금액이 상상을 초월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안동 김씨 문중에선 만 냥·십만 냥도 아닌 그 많은 돈을 불과 한 달이 못 되어 만들어 냈다. 얼마나 많이 긁어모아 뒀으면 그것이 가능했을까 싶다
 
그들이 모은 재산은 대부분 벼슬을 팔거나 승진시켜 준 대가였을 것이니 그들에게 돈을 갖다바친 자들이 부임지로 가서 또 얼마나 백성을 수탈하였을지 상상해 보라. 그리하여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일본군이 들어오면서 조선은 망했다. 이렇게 나라를 망친 자들의 후예가 근·현대 들어 지역감정의 골을 깊이 팠다고 본다
 
다시 조선 말기로 돌아가 보자. 당시 실학자인 성호 이익도 성호사설에서 호남에 대해 야박한 평가를 내렸다. 고리타분한 성리학의 폐해에서 깨어난 실학자마저 이 모양이었으니 일반 유학자들은 더했을 것이다. 이들이 실제 호남인을 겪어보고 한 주장이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저 풍문으로 들은 바를 적었을 수 있다. 짐작컨대 호남인에 대한 악의적인 평가가 널리 일반화되어 고정관념처럼 굳어진 상황이었으리라.
 
구한말을 거쳐 일제시대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호남인에 대한 왜곡된 평가는 더욱더 굳어져 정설처럼 널리 퍼져 갔다. 고정관념이 또다른 고정관념을 낳고 전파된 것이다오죽하면 대한민국을 위해 죽을 수 없다고 말하는 학생들이 나타났을까. 멸시와 조롱의 역사가 훈요십조 이후 무려 1000년이었다.
 
열차 호남선에 얽힌 일도 호남인들에겐 씁쓸한 기억으로 남았다. 호남선은 김영삼 대통령 시대까지 단선이었다. 기차가 많이 다닐 수 없고 맞은 편에서 급행이라도 오면 어디서든 멈춰 기다려야만 했다. 복선화를 간절히 요구했지만 소용 없었. ‘쓸 만한 기업도 없는데 무슨 복선이 필요한가’ 하면 기업은 답한다. ‘기차 복선화도 안 된 곳에 어떻게 기업이 들어서나.’ 
 
호남선 복선화를 둘러싼 이런 허무한 순환논리적 대화가 이어졌고 지역은 더욱 낙후되었다. 그러다가 김대중 대통령 시대를 맞아 1년도 안 되어 호남선이 복선화됐다. 호남에서 왜 지금까지 김대중을 떠받드는지 이해할 만하지 않은가
 
멸시와 조롱의 호남 혐오를 경험한 사람은 인생관마저 바뀐다고 한다. 그런 일들이 지속되면서 대한민국을 위해 죽을 수 없다는 호남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이 골수에 맺힌 것이다바로 그런 가운데 공산주의가 파고 들었다인구 대부분이 농민인 곳에서 농민 해방을 부르짖으며 지주를 없애 토지를 나눠 준다는 제안에 현혹된 것이다
 
호남 민중 60%가 인민공화국 편이었던 적이 있다. 평야지대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인민군이 물러갔으나 국군은 아직 진주하기 전, 전남 서해안 지역 인민공화국 동조자들과 빨치산들이 용추사와 불갑사 지역에 진을 쳤다. 오늘날 상사화 축제로 이름난 용추사에 당시 2만 명이 모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화폐가 통용되었을 정도였다 한다.
 
해묵은 의식이 깨어나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조작된 훈요십조와 악의적 해석의 풍전세류 폐해가 여전했다. 비호남인들 눈에 호남인들은 여전히 전라도놈이었고 천박한 개땅쇠였을 뿐이었던 듯하다천혜의 땅인 만큼 수탈의 대상이기도 했다. 고부 백산에서 동학의 깃발이 오르게 된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뇌물을 써서라도 전라도 부임을 소원한 관리가 많았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장부 내역에서도 드러난다.
 
의병들 또한 전라도로 몰려왔다. 농토가 많고 소작인이 많아 군량미 조달과 의병 인력 공급이 수월했기 때문이다. 동학을 일으킨 최제우를 비롯하여 단발령에 저항해 두가단발부단(頭可斷髮不斷)’을 외치며 조선 선비의 절개를 보여 준 면암 최익현이 전라도 곡성 땅에서 창의의 깃발을 올린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였다.
 
차별과 박대·멸시와 조롱 속에 쌓인 한은 대한민국을 위해 죽을 수 없다는 말로 압축된다. 호남인들은 은혜와 원수를 구별하여 가슴에 담을 줄 안다. 은혜도 잊지 않고 원수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구나 그것이 골수에 맺힌 한에 얽힌 문제라면 그로써 발생할 비극은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
 
한 많은 가슴에 공산주의가 내적으로 접목된 지금이야말로 염려스러운 그때일지 모른다. 이적단체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과 북에 협력해 온 민주노총 등 간첩들, 진짜·가짜가 뒤범벅된 5·18유공자의 탈을 쓰고 몰려든 친북 좌파들, 거기에 목숨줄 걸고 사는 사람들 대부분 전라도 출신이다. 광주 지하철엔 무임승차 혜택을 받는 승객이 전체 승객의 3분의 1이라는 이야기가 사실일 수 있다
 
대한민국은 지금 악몽을 꾸고 있다. 호남인들의 대한민국을 향한 완고한 저항은 망국의 모습이다. 논리가 사라지고 네편·내편을 가른 진영논리에 휩싸인 곳.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마저 흐려진 곳이 오늘날의 호남이다이곳에 문재인은 달콤한 꿀을 많이 발라 주었다
 
삼군 참모총장직과 정부 고위 요직은 물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 이른바 꿀보직을 비롯해 크고 작은 언론사에도 호남인들이 다수 진출해 있다. 풍족한 예산으로 중공군 정율성 기념비까지 세울 수 있었다이 달콤한 맛을 뗄 수 있을까. 지금 호남인들은 정권 탈환의 일념으로 뭉쳐 있지 않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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