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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문제 해법을 위한 제언... 정재학 전라도 시인·칼럼니스트
[호남 문제 어떻게 풀 것인가]⑧ 호남 恨의 뿌리는 훈요십조… 1000년 배척의 역사 키웠다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멸시·편견… 조선 500년 이어져
역사의 격동기마다 국난극복의 등불된 헌신 잊혀져
풍류 간사스럽고 경박하다는 조작된 편견 사라져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1-16 17:22:25
▲ '전라도 시인'이자 칼럼니스트 정재학은 전교조추방시민연대 공동대표 등 보수논객으로 활동하며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는 호남 차별의 역사적 연원을 고려 태조의 유훈 '훈요십조(訓要十條)'까지 소급하며 호남을 배역지(背逆地)로 평한 제8조의 조작성을 제기한다. 아울러 그 불합리한 편파적 호남 평가가 천년을 갔다고 본다.  
 
한국 문학사의 유명 시인들 가운데 전라도 출신이 많다. 서
정주(전북 고창)·고은(전북 옥구)·김지하(전남 목포)가 있고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는 김용택(전북 임실)·전위적 기법의 풍자시로 이름난 황지우(전남 해남)·‘노동의 새벽’ 박노해(전남 함평)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연장선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한 사람이 ‘전라도 시인 정재학’이다. 수식어에 출신지가 놓인 것은 어째서일까. 우연히 학계·문화계에 동명이인이 서너 명이라서 구분의 편의를 위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 수식어에 그가 걸어온 행보의 의외성과 고초가 함축돼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전북 고창 출신인 정 시인은 조선대학교 국문과 졸업 후 호남 지역에서 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그가 가졌던 주요 직함이 ‘전교조 추방 시민연합 공동대표’였다는 점에서 지난 시간의 고초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호남 태생으로 호남에 살면서 다른 호남인들에겐 불편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 온 것이다.
 
정 시인 본인이 과거 편지글 형식의 글에서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전교조의 해악을 알게 돼 2002년부터 이 길에 들어서서 싸워 왔고 만신창이의 몸으로 여생을 아내에게 부탁하고 있네. 고소만 무려 20여 차례. 매일 대문 앞 우체통에 검찰청과 법원에서 날아든 붉은 줄 쳐진 편지를 받아 본 사람들이라면 내 심정을 알 것이네.”
 
그가 그런 길을 감내해 온 것은 전라도를 넘어 대한민국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발소 아저씨도 국밥집 아주머니도 국밥집에서 만나는 지인들도 국회의원부터 자치단체 기초의원까지” 모조리 특정 정당 일색인 곳에서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게 얼마나 큰 용기와 사명감을 필요로 하는지 호남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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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시인 역시 호남 문제의 출발점으로 오랜 ‘멸시와 천대’에 대한 뿌리 깊은 원한과 분노를 들었다. 앞서 주동식 지역평등시민연대 대표가 스카이데일리 제1회 열린포럼에서 발표문 ‘호남과 대한민국’를 통해 같은 내용을 짚었으나 정 시인은 그 역사적 연원을 한층 더 소급해 이 문제의 근본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호남의 피해의식과 적개심을 파고든 것이 종북좌파 세력이라고 본다. 통일보다 더욱 간절하고 시급한 게 국민 통합이며 그러러면 먼저 ‘친북 세력을 호남민중과 분리시켜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제시한 호남 문제 해법의 골자는 ‘친북 세력으로부터 전라도 구출하기’이기도 하다. 그의 제언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수상한 ‘훈요십조(訓要十條)’… 호남 한(恨)의 역사적 근원
 
모름지기 한(恨)이란 이성으로 다스릴 수 없는 감정의 영역이다. 한이 깊다는 것은 마음 가장 깊숙이 박힌 슬픔이 크다는 것을 뜻한다. 고로 행복한 한은 없으며 슬픔의 한은 영혼마저 잠들지 못하게 한다. 한을 해결하지 못하면 이승을 떠나지 않고 인간 사이에서 헤맨다 했으니 한은 슬픔의 뿌리라 할 만하다.
 
한반도엔 8도가 있다. 도마다 각기 자연환경에 따라 풍속이 다르고 인심이 다르며 기질이 다르다. 그걸 지역 특색이라 하며 이 특색은 민족의 다양성에 이바지한다. 그러나 8도 중 유일하게 한을 간직한 곳이 호남이다. 차별과 멸시가 무려 1000년 이어져 무수한 분란과 저항과 배척의 원인이 되었다.
 
근·현대에 이르러 해결을 위한 수많은 노력이 있었으나 호남의 한은 풀리지 않았다. 섣부른 해결책은 오히려 분열을 향해 꼬여 갈 뿐이었다. 또한 이를 이용하기 위해 적대 국가와 적대 세력들은 더 많은 갈등을 조장했다. 한의 성격과 깊이를 외면한 채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메꾸고자 한 임시방편 정책이 문제였다. 우매한 정치인들은 오히려 호남 차별을 이용하고 있었다.
 
한의 시작은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부터다. 호남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이 근본 원인 해결이 우선되어야 한다. 훈요십조는 고려의 태조 왕건이 승하할 때 박술희 장군에게 전한 내용이라 전해진다. 상당히 많은 분량인데 제8조에 호남 차별의 시작이 된 ‘차령 이남은 배역지이니 그 지역 사람들을 등용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다.
 
배역지란 개성 도읍을 겨눈 활의 형세를 지닌 땅을 말한다. 강이 활처럼 구부러져 개성을 겨눈 곳, 바로 금강을 활로 하여 차령 이남 지역이 겨누고 있는 형세라는 것이다. 배역지 사람들은 반역을 할 사람들이니 조정에 쓸 인물로 등용하지 말라는 것이 훈요십조 제8조의 골자다.
 
하지만 그런 식의 배역지는 얼마든지 있다. 한반도는 대부분의 강이 동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북녘의 청천강·대동강부터 한강·금강·영산강도 활의 형세를 띠고 있다. 그중 낙동강은 남으로 흐르면서 엄청난 크기의 배역지를 만든다. 따라서 훈요십조 8조는 정통 풍수사상에 바탕을 둔 이론이라 할 수 없다. 
 
우리나라 풍수는 왕건의 정신적 스승 도선국사에 의해 비보풍수(裨補風水)로 발전한다. 그런데 전라도 영암 사람인 도선국사가 호남 차별을 위한 가르침을 폈을 까닭이 없다. 더구나 고려 창업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의 상당수가 호남에 모여 있다. 공산 전투에서 왕건을 피신시킨 뒤 왕건의 투구를 대신 쓰고 전사한 신숭겸 장군은 곡성 사람이다.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된 그는 목이 없는 시신으로 묻혔다. 머리를 황금으로 만들어 장례를 치렀기에 도굴을 피하고자 무덤을 세 개나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고려 창업은 나주인들의 헌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주 인근의 마한 세력이 재물과 곡식·인재들로 왕건을 보필하지 않았다면 고려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 나주의 호족 세력인 나주 오씨 가문은 그 중심 세력이었고 후일 고려 제1대 왕후인 장화왕후가 바로 나주 오씨 가문의 사람이었다. 그후 무려 7대 목종까지 그 집안 핏줄이 이어진다.
 
훈요십조가 실존 사실이었다면 그 내용이 후대에 전해질 까닭이 없다. 역대 왕들이 외가를 배척하는 내용의 훈요십조를 방치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창업의 기틀을 닦은 인물 중 한 사람인 천재 최지몽 역시 영암 출신이다. 최지몽이 훈요십조의 존재를 알고 그냥 뒀을까. 이런 점들로 미뤄 판단해 볼 때 훈요십조는 가짜일 가능성이 짙다. 
 
훈요십조는 8대 현종 때 등장한다. 현종 때 거란의 1차 침략, 그리고 강조의 목종 살해 사건을 핑계로 2차 침략이 있었으며 그때 현종이 피신한 곳이 나주였다. 개성은 불타 버렸고 고려사를 비롯한 기록들도 모두 소실되었다. 3차 침략 때 강감찬 장군에 의해 거란군이 전멸당하지만 고려가 입은 피해는 엄청났다. 
 
현종이 복원에 힘쓰는 과정에서 훈요십조가 등장했다. 그 존재를 알리며 고려사에 기록한 이가 최제안이다. 당시 훈요십조를 경주 출신 최제안이라는 사람이 같은 경주 출신 최항의 집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비밀리에 전해졌다는 이 훈요십조가 왕실과 전혀 무관한 일반 사가(私家)에서 발견된 것이다. 물론 박술희 장군과도 관계 없다. 최제안은 박술희 사후 100년되는 시대의 인물이다.
 
최제안은 최치원의 후손으로 신라계로 알려져 있다. 그는 나주 오씨 문중과 마한계 인물들을 몰아내고 고려 현종을 등에 업고 정권을 잡았다. 쉽게 말하면 정권이 나주 지역의 마한계에서 신라계로 옮겨 갔다는 뜻이다. 현종의 조모가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수 있다.
 
현종이 2차 거란침략 때 피난길에서 전북 삼례역에서 모반에 해당하는 수난을 당했던 것도 정권이 옮겨 간 이유 중 하나라고 역사가들은 본다. 따라서 훈요십조가 신라계 집권 명분에 이용됐음이 분명해 보인다. 훈요십조를 이용해 차령 이남 인재의 등용을 막고 신라계 집권의 정당성을 마련한 것이다. 그 영향은 이후 1000년 지속된다.
 
신라계가 백제계에 원한을 품은 것은 견훤에 의한 것이다. 경주를 침략해서 왕을 죽이고 왕비를 겁탈하며 경주를 초토화시킨 역사에 대해 가슴 깊이 복수심을 품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원한이라면 신라군이 백제 성왕의 목을 참수한 역사도 있지 않나. 전남 나주 지역은 고려 창업을 도운 마한계의 땅이다. 신라계가 원한을 품을 이유가 없는 곳이다. 설령 정권을 잡기 위해 훈요십조를 조작했다 해도 그것이 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훈요십조는 조작의 흔적이 곳곳에 있다. 왕건의 유언을 받아 적은 박술희는 무인 출신이라 그 많은 내용을 받아 적을 위인이 못 된다. 조선 시대로 따지면 비서실장 도승지도 있고 행적을 기록하는 사관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학문이 부족한 박술희가 받아 적었겠는가. 왕건으로선 박술희가 가장 신뢰할 만한 인물이었다 쳐도 그토록 비밀을 유지하라는 훈요십조가 최항이란 인물의 사가에서 발견됐다?
 
훈요십조의 어느 것 하나 지켜진 것이 없다. 지켜지지 않는 훈요십조는 사장된 사료다. 그럼에도 유독 8조만 진실처럼 전해 내려온 것은 무엇을 뜻할까. 훈요십조를 바탕으로 고려 조정에서 마한계는 물론 백제계도 모조리 도태됐다. 신라계의 정권 장악이 참으로 오래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차별이 조선으로 이어진다.
 
풍전세류(風前細柳)에 대한 악의적 해석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조선 8도의 특색을 평해 보라 한다. 이에 정도전은 전라도를 풍전세류(風前細柳·바람 앞에 흔들리는 버들)이라 했으며, 경기도·황해도·충청도·경상도를 각각 경중미인(鏡中美人)·춘파투석(春波投石)·청풍명월(淸風明月)·송죽대절(松竹大節)이라 평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자의적인 평가라는 점이 문제다. 태조가 자신의 고향 함경도를 평하라 명했을 때 정도전은 이전투구(泥田鬪狗) 즉 진흙밭에서 싸우는 개라고 답했다. 태조의 얼굴이 구겨지자 정도전은 얼른 “석전경우(石田耕牛)일 수 있다”고 고쳐 말한다. 돌밭을 가는 우직한 황소를 뜻함이다.
 
-그러나 호남은 풍류의 고장, 헌신의 땅 
 
풍전세류라는 평가 자체보다 그 해석이 매우 악의적이며 이 또한 훈요십조의 연장선상에 있다. 풍전세류를 줄이면 풍류, 버들 유(柳)를 물흐를 유(流)로 바꿔 이해할 수 있다. 풍류란 ‘멋스럽고 풍치가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호남만큼 흥이 많은 지역도 없다. 판소리의 본고장이다. 
 
놀이판이 벌어지면 너나없이 어깨춤을 추고, 술자리에 앉으면 시조 창 한 가락이라도 불러야 직성이 풀린다. 예인(藝人)을 사랑하고 키우고 존경할 줄 안다. 어디 소리뿐인가. 호남은 그림이며 글씨며 춤이며 노래며 부족한 게 없다. 이렇게 풍류 넘치는 사람들이 남도 예술을 견인하여 현대의 문화 창달에 이바지한 곳이 호남이다.
 
그럼에도 풍전세류에 대한 악의적인 해석을 살펴보면 기가 막힌다. 바람 앞에 흔들리는 버들처럼 줏대없고 간사하다는 것이다. ‘경박하다’에서 그치지 않고 간사와 경박을 합쳐 ‘사박(詐薄)하다’고까지 했다. 해석이 거의 쌍욕 수준이다. 
 
호남 선비가 도포 자락을 너울대며 춤추는 것이 허세와 형식에 찌든 타 지역 선비들의 눈에 경박하게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호남인들이 줏대없고 간사하다는 평가는 어디에 기인한 것일까. 조선 초기 개혁을 주도한 정도전이 호남과 호남인에 대한 악감정만으로 이런 평가를 내렸을 리 없다. 다시 말하지만 문제는 해석한 이의 의도와 그 정체에 있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 민중의 주목을 받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황산대첩이다. 아지발도를 우두머리 삼아 쳐들어온 왜구들로 백성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핏물이 시내를 붉게 물들였다. 이때 이성계는 왜구들을 전라남도 남원군 황산에서 토벌하여 대첩을 이룬다. 백성을 구하고 얻은 지지로 조선을 창업할 수 있었다.
 
1378년 황산대첩 당시를 상상해 보라. 호남 백성들이 손을 놓고 있었겠나. 누구는 식량을 대고 날랐을 것이며 누구는 창칼을 들고 함께 싸웠을 것이다. 또 누군가 정탐병이 되어 왜구의 움직임을 보고했을 것 아닌가. 이성계는 황산대첩 후 14년 만인 1392년 조선을 개국한다. 호남 백성을 간사하고 경박한 사람들로 조롱할 까닭이 없다. 줏대없는 사람들이 어찌 황산에서 왜구와 맞섰겠는가.
 
호남은 역사의 격동기마다 격동의 물결을 온몸으로 맞이하고 극복하여 민족의 영광을 수호한 곳이다. 간사하여 뒤통수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호남은 산천 어디든 발을 디디면 노래를 부르고 달빛 소소한 정자 위에서 학춤을 추는 선비들이 사는 곳이다. 국난에 이르면 안일과 무사를 버리고 총칼을 들었던 호남인들이 누구의 뒤통수를 쳤겠는가.
 
풍류를 경박하다고 조롱한 이들, 줏대없고 간사하다고 해석한 이들이 훈요십조를 조작한 자들의 후손 아니었겠는가. 조롱과 멸시가 깊어지면 한이 일어나는 법이다. 신라계의 권력욕에서 비롯된 호남 배척을 정당하다고 볼 국민은 없다. 그러나 호남에 대해 조롱과 멸시, 심지어 반역향(反逆鄕)의 낙인이 조선조 500년에 걸쳐 이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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