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열의 스파이 세계] <2> 美와 지성으로 미국 농락한 러시아 스파이 ‘애나 채프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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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1-16 06:31:20

2010년 6월27일 미 연방수사국(FBI)은 러시아 해외정보부(SVR) 소속으로 미국에 침투하여 스파이 활동을 해 온 10명을 검거했다. 이 중 한 부부 스파이는 1985년에 미국에 이주하여 기자·칼럼니스트·대학교수로 활동해왔다. 이들은 온라인 부동산회사 최고경영자(CEO)나 MBA 출신의 회계법인 간부 및 대학교수 등 정치·경제계에서 다양한 전문직으로 위장하며 안정적 기반을 구축했다. 이 중 8명은 4쌍의 부부이다. 이들은 대부분 가명을 사용하였고 사망자 신원을 도용하거나 제3국 국적 취득 후 미국으로 귀화하는 방법으로 자신들의 신분을 철저히 세탁했다.

이들은 대통령 주변의 유력 인사나 정책결정그룹 소속 인사, 혹은 이 그룹에 침투할 수 있는 자원을 포섭하는 데 주력했다. 러시아가 이들에게 하달한 임무는 CIA·백악관 등 미 행정부 동향 파악에서부터 미국의 중앙아시아 정책·미국의 군사정책 문제점 등 정책 분야까지 다양했다. 2008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선 동향을 보고했고,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전에는 전략무기감축협정·이란 핵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수집 활동을 했다.

2000년 초부터 FBI는 미국에서 장기간 암약 중인 러시아 스파이를 검거하려는 이른바 ‘유령 색출작전’(Operation Ghost stories)을 비밀리에 전개했다. 이 작전은 미국에 포섭된 러시아 해외정보부 북미담당 부국장(알렉산더 포테예프 대령)이 미국에서 활동 중인 러시아 스파이 10여 명의 명단을 제보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제보를 받고 장기 수사하여 이들 스파이를 미국 전역에서 검거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러시아 스파이들의 신분 세탁·비밀 연락 기법 특히 평범한 시민인 것처럼 치밀하게 연출된 삶이 밝혀졌다. 스파이들은 사진이나 그림 파일에 문자 등 암호화된 내용을 은닉하는 스테가노그라피 기술을 이용해 교신한 것으로 드러났다.

▲ 2010년 12월22일 푸틴 근위대 총화에 참석한 러시아 미녀 스파이 애나 패프먼. 애나는 미국에서 추방돼 귀국 후 러시아 정부에서 주는 국가최고훈장을 받았다. AP=연합뉴스

이 중 가장 크게 서방 언론의 관심을 받은 이가 ‘21세기의 마타하리’로 불린 당시 28세의 애나 채프먼(Anna Chapman)이다. 서방 언론에서는 “애나의 비밀병기는 섹스였다”(Russian spy Anna Chapman's secret weapon was sex)고 칭할 정도였다.

애나 채프먼은 1982년 러시아 볼고그라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 소련의 정보기구인 국가보안위원회(KGB) 간부로 대외적으로 러시아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애나는 러시아 인민우호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할 당시 러시아 대외정보국(SVR)에 차출되어 스파이 교육을 받았다. 대학 재학 중 신분 세탁을 위해 모스크바와 영국을 오가며 2002년 댄스클럽에서 만난 영국인 앨릭스 채프먼(Alex Chapman)과 결혼하고 영국 국적을 취득했다. 2006년에 이혼했지만 그녀는 성을 바꾸지 않았다.

2009년 애나 채프먼은 미국으로 진출한다. 자산 규모 200만 달러 상당의 온라인 부동산 중개업체 ‘프로퍼티파인더’의 CEO로 신분을 위장했다. 애나는 뉴욕 파이낸셜 디스트릭트의 고급 아파트에 살며 뉴욕 맨해튼 근교에 온라인 부동산 회사와 벤처기업을 설립하며 활동했다. 고급 레스토랑·고급 사교 클럽·파티 등에서 정·재계의 유력인사들과 인맥을 쌓아 나갔다. 영어·독일어·불어·중국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하며 미모와 지성을 내세워 뉴욕 사교계를 공략해 나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계 고위층이나 기업가에게서 입수한 정보를 러시아에 넘기며 스파이 활동을 해 오다가 다른 스파이들과 함께 검거됐다.

같은 해 7월8일 뉴욕 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10명의 피고인은 자신들이 러시아 연방요원이라는 사실과 관련 혐의를 대부분 인정했다. 사건 발생 10여 일 만에 애나 채프먼을 포함한 이들은 미·러 스파이 맞교환 합의에 따라 석방되어 러시아로 보내졌다.

러시아는 이들에게 2010년 10월18일 국가 최고훈장을 수여했다. 특히 애나 채프먼은 뛰어난 미모를 앞세워 TV쇼도 진행하고 맥심 표지 모델도 하는 등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녀는 2010년 12월31일 러시아 국영TV 채널원에서 ‘2010년 올해의 여성’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냉전체제가 해체되었으나 여전히 러시아와 미국은 치열한 첩보전을 전개하고 있다. 신 냉전체제의 스파이 세계가 열린 것이다. 애나 채프먼 의 사례에서 보듯이 ‘미인계’라는 수단은 스파이 전선에 시대와 영역이 없음을 재삼 확인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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