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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116] 오랜 인연의 실타래
눈이 내리면 바다는 더 깊어진다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6-24 06:30:10
 
 
내가 잠든 뒤 하운이 얼마나 오래 곁에 앉아 있었는지,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혼란스러웠으면서도 내내 잊지 말아야지 했는데 막상 눈을 뜨는 순간 신기루처럼 어떤 장면들은 사라져 버렸다.
 
욕심 같아선 어디까지 사실인지 일일이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어렴풋한 이미지들, 그녀가 결혼과 이혼을 겪으면서 감당해야 했을 상처들은 하운에 대한 내 관심이 만들어 낸 상상일지도 몰랐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정하운이라는 여자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 또한 마음 안에 오래 가두어 놓았던 이야기를 털어 내 홀가분한 듯 보였다. 서로의 알몸을 오래도록 쓰다듬으며 함께 생을 나눠 온 사람들처럼 나와 그녀 사이의 틈도 사라진 것 같았다.
 
트러스트 미로 오기 전 일하던 출판사에서 편집장으로 승진하고 처음 맡은 작품이 겨울의 무덤이었어요.”
 
하운이 빙긋 나를 보고 웃었다. , 나는 하운의 허리를 풀어 줘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출판 과정에서 담당 편집자와 몇 차례 연락을 주고받긴 했지만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하물며 큰 출판사의 편집장과 선이 닿을 일이 초년 작가에게 있을 리 없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책의 판권에는 하운의 이름이 인쇄되어 있을 터였다. 그러나 나는 그 책을 단 한 권도 갖고 있지 않았다.
 
마리아에게 들킨 노트를 움켜쥐고 소각장 앞에 섰지만 나는 차마 소설을 던져 버릴 수 없었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군대에 다녀온 다음 해 등단을 거쳐 첫 작품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버지를 떠나 자립해야 했던 나는 돈이 필요했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소설을 불사르고 지하철 기관사가 되었다. 절대로 궤도를 잃어버리지 않는 레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거대한 것을 움직이는 힘. 깊은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한 눈부신 질주. 그러나 한 번도 닿을 수 없었던 끝없는 갈증의 순환.
 
두 번째 소설은 언제 나올까 기다렸어요.”
 
하운이 말했다.
 
그럼 트러스트 미에서도?”
 
변명 대신 머뭇머뭇 그녀를 놓아 주고 내가 화제를 돌렸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단의 출판 부서를 맡고 있어요. 악마의 발톱을 담당하는 건 예외적인 경우죠.”
 
인연이란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돌아 원점으로 오기도 한다. 밀물과 썰물처럼 만남과 이별을 되풀이하기도 하지만 눈처럼 밤새 퍼붓고도 자취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오래전 신혼여행을 갈 때 비행기 안에서 아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스친 줄 모르고 만났던 것처럼, 지금은 함께 있지만 내일 또 어떤 모습으로 헤어지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바다에는 왜 눈이 쌓이지 않을까요?”
 
바다를 향해 돌아선 내가 물었다.
 
그만큼 더 깊어졌겠지요.”
 
하운은 태양을 똑바로 마주 보고 섰다. 손차양을 만들어 이마에 얹었다.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가 내 혓바닥 위에서 맴돌았다.
 
태풍이 불던 그날 말이에요.”
 
내가 말했다.
 
아내를 처음 만났어요.”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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