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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권지호가 자기 아이 아닐 거라고 우기진 않겠지? 김근화 귀국 독창회 이후 권지호를 못 만난 지 열흘 넘었다. 일단 그를 만나 차분하게 임신 사실을 알려야 했다. 희숙은 착상일 즈음에 먹은 약이 있는지 곰곰이 따져 봤다. 만성 두통에 늘 지니고 다니는 아스피린을 복용한 적 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아스피린 개수는 그대로였다. 희숙은 앞으로 어떤 약이든 복용하지 않을 거며 야근 신청도 하지 않기로 했다. 공장에서 태교는 사치라 해도 아기를 위해 몸조심은 해야 했다.
다음 날 희숙은 권지호 사무실에 들렀다. 따로 식사하자고 청할 생각이었다. 권지호 방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권지호 목소리가 났다. “들어와요.” 희숙이 방문을 여니 반백 정 이사랑 자재과 김 부장이 소파에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희숙은 멈칫했다. 희숙은 그 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나중에 올까요?” 권지호는 미팅이 끝났다며 들어오라 손짓했다. “전무님, 미국 수주 건은 전무님 출장 다녀오신 후 다시 검토하는 걸로 하시죠. 그 사이 저흰 자료 조사해 놓겠습니다. 그럼, 출장 후 뵙겠습니다.” 반백 정 이사가 방문 앞에서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말했다. 정 이사가 나가자 권지호는 희숙을 향해 좀 전의 두 남자에게 보였던 사무적인 표정을 풀고 부드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출장 가세요?” “응. 일본 출장하고 사흘 후에 올 거야, 왜?”
희숙은 망설였다. 출장 앞둔 사람한테 임신 소식을 알려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았다. 둘러댔다. 아, 그게… 제가 몸이 좀 아파서 휴가를 길게 쓰려는데… 권지호는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희숙을 바라봤다. 몸이 아파? 어디가? 에구 감기 걸린 거 아니니? 요즘 독감 유행한다던데. 이런 건 굳이 나한테 말하지 않아도 돼. 인사과에 얘기해서 쉴 만큼 쉬고 나와. 알았지? 권지호는 사무실을 나가면서 희숙의 이마를 쓱 만졌다. 아이고 열이 있네. 얼른 병원 가 봐. 나 차 대기 중이라 빨리 나가야 해. 갔다 와서 보자, 알았지? 권지호는 서둘러 나갔다.
권지호가 희숙의 이마에 손을 대고 열이 난다고 말할 때, 희숙은 울컥했다. 이런 자상함이라니, 임신 소식 알리면 어떻게 반응할까. 물론 당황할 거고, 부담스럽겠지. 직원 임신시켰다고 소문나면 이미지 나빠지고 또 권지호 집에선 뭐라 할지. 그럼에도 권지호는 책임지려 할 거야. 지금보다 더 날 아낄 거야. 회사 그만두게 하고 미국으로 보낼지 몰라. 거기서 아기 낳으라고. 내 아이도 미국 시민으로 태어나겠지. 어쩌면 희숙은 그간의 고단했던 삶이 권지호의 아이로 인해 끝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영어를 좋아해서 다행이다, 다시 공부할 거야. 권지호가 그랬잖아, 유럽보다 미국 유학이 낫겠다고. 다 묻어 버리고 미국으로 가서 아이도 키우고 나도 공부해야지.
아들일까, 딸일까. 첫애는 아들이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딸을 낳을 거야. 이 모든 상상만으로도 희숙의 눈에선 회한의 눈물이,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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