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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땅 간도대륙

서안(西安)의 비림박물관과 섬서성박물관 및 반파유적지를 답사하다

장생불로를 꿈꾸었던 진시황의 산물, 진시황릉을 가다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0-07-26 17:18:02

▲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아침에 일어나니 날씨가 흐리다. 도로에는 차도 많아졌지만 오토바이를 탄 부부들도 많아 보인다. 우리 일행은 아침 식사 후 출발하여 9시 경에 비림(碑林)박물관에 도착하였다. 비림박물관은 두 번째 방문이다. 비림박물관은 섬서성(陜西省)박물관의 일부분이다. 본래는 송(宋)대의 문묘 건물을 이용하여 1948년 섬서성박물관으로 시작하였으며, 1952년에 서북역사박물관으로 개칭되었다가 1955년에 현재의 명칭이 되었다. 구조는 서안비림, 역사진열관, 조소역사관의 3부문으로 구분되어 있다.
 
비림박물관은 역대 유명 서예가들의 비문이 보관된 곳으로 천여 개의 비문이 진열되어 있다. 휴대용 마이크로 비림박물관의 소개를 간단히 하였다. 25년 전에 보았던 고조선 글자가 새겨진 ‘창힐(蒼頡)문자비’와 연남생(淵男生)의 묘지를 두루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 한민족과 관련된 유물은 다른 저장고로 옮긴 모양이었다.
 
송대 이후 계속 석비를 수집하였으며 당(唐)비가 많다. 왕휘지의 행서를 집자한 ‘집왕성교서’와 ‘흥복사단비’, 구양순의 ‘황포연비’, 안진경의 ‘다보탑비’와 ‘안씨가묘비’, 유공권의 ‘현비탑비’, 황정견이 쓴 시 등이 보관되어 있다. 우리 일행은 비림박물관을 둘러본 후 역사진열관이 있는 섬서성박물관을 관람하였다. 고대의 토기 및 청동기들이 많이 전시되어 사진을 많이 찍었다. 특히 나의 관심사인 세 발 달린 토기나 청동솥과 네모난 제기(祭器)인 청동기 방정(方鼎)에 대하여 사진을 찍었다. 화하(華夏), 동이(東夷), 묘만(苗蠻) 등 삼족의 소재를 설명한 지리위치 시의도는 당시 삼족의 거주지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점심식사 후 반파유적지로 향했다. 정식 명칭은 ‘서안반파박물관’이다. 반파유적지는 신석기시대인 5천년 전의 앙소(仰韶)문화의 대표적 유적지로 1953년에 발굴을 시작하였으며 1957년에 만평 정도의 유적지의 발굴을 완료하였다. 1994년에는 ‘반파모계 씨족촌’을 조성하였다. 대부분 황토유적지에 형성된 토굴, 여러 구의 시신이 묻힌 무덤군과 도자기 가마 등을 둥근 유리관 돔으로 보호하고 있었으며, 신석기인들의 주거환경을 그대로 전시하여 당시의 생활상을 느끼도록 하였다.
 
신석기인들은 도랑을 파서 마을의 경계로 삼았으며, 동쪽에는 도기를 만드는 요지(窯址)를 조성했고, 서쪽에는 강과 접하도록 해서 식수를 긷는 한편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했다. 마을 북쪽 모퉁이에는 공동묘지가 있었고, 주거지 남쪽에는 농토로 이용할 수 있는 들판이 위치하였다.
 
이들은 집을 지상, 반지하, 지하 등 다양한 형태로 구성하였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제2·3박물관 전시실에서 볼 수 있었다. 유물들은 돌칼, 뼈바늘, 뼈로 만든 칼 등의 생활도구들이었다. 이와 같이 반파유적지는 평범한 신석기 유적지였지만 중국 정부의 배려와 투자로 인해 세계적 관광지가 된지 오래 되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춘천 의암호의 중도유적지는 청동기 및 철기시기의 유적지로 고인돌 등 매우 다양한 적석총 유적이 존재하고 있는 세계적인 유적지이지만 개발 논쟁으로 뜨겁다. 더구나 건설회사 측이 이 유적지를 파괴하면서 공사를 진행했다는 소식도 있다. 이 중도유적지의 가치는 반파유적지 보다 더 크면 컸지 적지는 않다는 점이 나의 평가이다. 중도유적지의 이와 같은 무지한 개발 논쟁은 부끄럽게도 부동산 개발업자와 정치인이 개입한 합작품이었다.
 
우리 일행은 반파유적지를 관람한 후 진(秦)시황 병마용갱(兵馬俑坑)으로 향했다. 주차장은 많은 버스와 승용차로 붐볐으며 수많은 관람객이 병마용갱을 보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모여들고 있었다. 통로 벽에는 병마용갱을 관람했던 각국의 대통령, 수상의 얼굴 사진을 전시하고 있었다.
 
진시황릉은 서안에서 30km 거리에 있으며 서기전 246년에서 208년까지 39년 동안 조성된 황릉으로 70여만명의 인력이 동원되었다. 76m의 낮은 야산을 이루고 있으며, 지하갱 형태였던 병마용갱이 1974년 우물을 파던 농부에 의해 발견됨으로 인해 사마천의 사기에 전해지고 있는 진시황릉 지하궁전의 실존이 확인되었다.
 
병마용갱은 진시황의 친위군단인 병마용을 수장하고 있는 3개의 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갱의 위를 유리돔으로 덮어 보호하고 있었다. 1호갱의 규모는 길이 210m, 너비 60m, 깊이 4.5~6.5m, 면적 1만2000평방미터이다. 병마용갱의 전체 도용은 약 6천개이며 도용의 크기는 1.75~1.86m이다. 도마용은 높이 1.5m, 길이 2m의 실물대이며 무장한 무사들의 모습은 살아 있는 듯하고 똑같은 얼굴은 없었다.
 
2호와 3호갱은 발굴과정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규모도 1호갱보다는 작았다. 2호갱은 부분적으로 발굴되었는데 목제 전차와 이를 끄는 마용 356건, 기병용 116건, 안마 116건, 보병용 562건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3호갱은 지휘부로 장군용으로 보이는 채색된 전차 1량과 갑옷 입은 보병용 64건, 마용 4건이 출토되었다. 또한 진시황릉 서북쪽에서는 동용과 동마용이 딸린 대형 동전차 1대가 발견되었다. 이 동전차 역시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예술작품이었다.
 
각 병마용갱의 뒷부분에는 발굴 시에 깨어진 도용의 많은 조각들이 보였다. 도용을 수리하기 위한 도구들과 이미 수리를 마친 도용들이 서 있었다. 이들 병마용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예술품으로 평가되었으며 당시의 군사 편제와 무기 및 갑옷 등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진시황릉에 대한 발굴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으며, 장생불로를 꿈꾸었던 진시황이 내세(來世) 영생을 믿은 결과의 산물인 진시황릉은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시간30분 동안 병마용갱을 관람한 일행들도 무더운 날씨에 지친 표정이다. 잠시 동안 나무 그늘에 쉬었다가 버스를 타고 장안성곽으로 이동하였다. 북문으로 보이는데 제법 웅장해보였다. 사각형의 성곽으로 명(明) 시기에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장안과 낙양에 왕도(王都)를 정한 중원의 왕조들은 바뀔 때마다 왕도를 불태우곤 하고 다시 왕성을 축조하였다. 북문 옆의 계단을 통해 성곽 위로 올라가니 주변 서안 시내가 모두 보이기 시작하였다.
 
성곽 밖의 도로는 자전거를 타고 돌 수 있도록 하였다. 성곽 위를 100m 정도 걸어보고 천천히 내려왔다. 성곽의 높이는 20m 정도이고 폭은 5m 이상 정도로 넓었다. 우리 일행은 오후 6시에 다시 승차하여 화인시로 출발하였다. 내일은 1997m의 화산(華山)을 등산하는 일정이 예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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