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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

전기 신라는 고구리의 제후국이었다

국호조차 정리 못했던 전기 신라, 고구리 도움 받은 기록만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1-02-21 11:02:08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호태왕 9년 비문에는 왜가 침공해오자 신라왕이 호태왕에게 원병을 청하는 문구가 새겨져있다. “노객(신라왕)은 백성을 위해 왕께 귀의해 구원의 조치(命)를 청하오니 태왕께서는 은혜로써 그 충성을 다시 헤아려 신라사신에게 돌아가 병력출동을 윤허했음을 고하라고 하셨다.(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恩復稱其忠誠特遣使還告以兵許)”
 
신라왕이 노객(종)이라는 표현을 썼고 호태왕이 그의 충성을 헤아렸다는 문구로 볼 때 당시 신라는 고구리의 제후국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속국이 침략을 당했으니 상국에서 원병을 보내주는 거야 인지상정이겠지만 과연 신라가 당시 고구리의 속국이었을까.
 
속민(屬民)이었다는 기록은 호태왕비문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신묘년 임나일본부 기사로 잘못 알려졌던 호태왕비문 5년 기사에 있는 “백잔과 신라는 예전부터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다.(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는 문구로 볼 때 그러한 사실이 확실해진다.
 
게다가 <삼국사기> 지증마립간 4년(503)조에도 언급돼 있다. “시조께서 창업하신 이래 국호도 정하지 못하고 사라·사로·신라라고 했는데 이제 신라를 국호로 정하옵고 또 예로부터 나라의 임금은 다 제왕(帝王)이라 칭했음에도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22대에 이르도록 존호(尊號)조차 바로잡지 못하였기에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 존호를 올리옵나이다.”
 
즉 신라는 창업 500년이 넘도록 국호와 존호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고 통치자를 왕이라 부르지 못하고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의 칭호를 썼다. 게다가 신라는 그때까지 고구리를 상대로 전쟁한 적이 없고 도움만 받았다는 기록뿐이다. 즉 신라는 고구리의 속국(제후)이었던 것이다.
 
<고구리사초략>에는 고구리에서 신라왕을 황제로 봉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 이래 12대까지 박씨와 석씨가 번갈아가며 다스렸다. 11대 석조분(昔助賁)이 죽었을 때 아들 석유례(儒禮)의 나이가 어렸던 관계로 동복아우 석첨해(沾解)가 보위에 오른다. 조분과 첨해의 모친은 김옥모(金玉帽) 부인이었다. 옥모의 동생 김미추는 조분이사금의 사위가 된다.
 
▲ 초기 신라의 왕위계승도. [사진=필자 제공]
  
15년 후 첨해 이사금이 후사 없이 죽었다. 전왕 조분의 적장자인 석유례가 성인이 돼 멀쩡하게 살아있었음에도 느닷없이 김알지의 7세손인 미추(味鄒)가 보위에 오른다. 김씨가 신라에서 최초로 임금이 된 것인데 그 이유는 당시 미추의 누이 김옥모가 고구리 중천태왕의 황후였기 때문이다.
 
첨해가 어머니 김옥모와 함께 고구리를 방문했을 때 중천태왕이 옥모에게 첫 눈에 반해 태후의 예로 받들면서도 후궁으로 거두려고 했다. 중천태왕은 신라에게 죽령 땅을 되돌려주는 등 여러 차례 진귀한 선물을 보내니 옥모태후는 그 성의에 감동하게 된다.
 
백제가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해오자 김옥모가 중천태왕에게 구원을 요청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나 뜨거운 사랑을 나누게 됐고 이듬해 아들 달가(達賈)가 태어났다. 그러자 중천태왕은 첨해를 황자로 옥모를 황후로 봉했고 12년(259, 기묘) 정월에 첨해를 신라국황제(新羅國皇帝)·동해대왕(東海大王)·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 봉했고 금·은 인장 두 개를 하사했다.
 
그리고 2년 후 연말에 신라에서 석첨해가 갑자기 죽자 감국(監國) 직책에 있던 미추는 고구리에 가있던 누이 옥모에게 서신을 보내 “조카 첨해가 죽었으니 누님(옥모)과 형황(중천태왕)께서 될 만한 사람을 정해주셨으면 합니다”고 청했다.
 
급보를 접한 중천태왕이 옥모에게 “당신 동생 미추가 조신하고 후덕하여 가장 나으니 시켜봄이 어떻겠소”라고 물었더니 옥모는 눈물을 흘리며 “신첩은 이미 나라를 짊어지고 와서 지아비를 따르고 있습니다. 황상의 뜻이 바로 소첩의 뜻이옵니다”고 응답했다.
 
<고구리사초략>에 “14년 신사(261) 12월 28일에 첨해가 갑자기 죽고 조분(助賁)의 사위 미추(味鄒)가 황위에 올랐다. 미추를 신라국황제·동해대왕·우위대장군으로 봉하고 금·은 인장들과 황제의 의복과 면류관을 하사했으니 이 날이 바로 임오(262) 정월 25일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시조 김알지 이후 약 200년 만에 김씨가 신라에서 처음으로 왕이 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고구리 중천태왕의 황후가 된 김옥모의 영향력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당시 신라는 고구리의 속국이었음이 확실하다 하겠다.
 
참고로 김미추는 23년을 재위했고 이어 조분이사금의 아들인 석유례가 즉위해 석씨로 3대를 이어가다 17대 내물(奈勿) 이사금부터 김씨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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