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과 품질 향상에는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명예회장이 2002년 1월 현대차 울산공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한 말이다. ‘품질 경영’으로 대표되는 정 명예회장의 경영 철학이 현장에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정 명예회장은 1999년까지만 해도 세계 자동차 시장 판매량에서 10위권 밖이었던 현대차그룹을 2000년 처음으로 세계 10위권에 진입시켰다. 2010년에는 포드를 제치고 글로벌 판매량 5위 기업으로 발돋움시켰다.
현대차그룹이 단 10년 만에 글로벌 5위에 오르게 된 것은 세계 자동차 산업 역사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일이다. 비결을 꼽자면 정 명예회장이 늘 강조하던 품질 경영에 있다고 하겠다.
이렇듯 품질을 앞세워 현대차그룹의 오늘을 일궈낸 정 명예회장이 그룹 경영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21일 재계에 따르면 정 명예회장은 다음달 24일 예정된 현대모비스 주주총회에서 등기이사직을 내려놓을 예정이다.
정 명예회장의 현대모비스 사내이사 임기 만료는 내년 3월이다. 그러나 이미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에게 그룹 전반의 지휘봉을 넘겨준 상황인 만큼 임기 종료까지 등기이사직을 유지하지 않고 물러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물러나게 된 정 명예회장을 대신해 현대모비스는 고영석 연구개발(R&D) 기획운영실장 상무를 새 사내이사로 추천했다. 상무급 임원을 사내이사로 추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현대모비스 주총을 끝으로 마지막 남은 등기이사직까지 내려놓은 정 명예회장은 그룹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됐다.
앞서 지난해 2월 현대차 이사회는 정 명예회장을 사내이사로 재선임하는 안건을 상정하지 않았다. 정 명예회장은 지난해 3월 현대차 주총 직후 열린 이사회에서 21년 만에 이사회 의장직을 정의선 당시 그룹 수석부회장에게 넘겨줬다.
이후 정 명예회장은 현대차 미등기임원과 현대모비스 등기이사직만 유지했다. 지난해 10월엔 그룹 회장직도 정 회장에게 물려주고 명예회장으로 추대됐다. 그러면서 현대모비스 대표이사직도 함께 내려놨다.
재계는 정 명예회장이 이번에 등기이사직을 내려놓더라도 현대차 미등기임원과 현대모비스 미등기임원직은 유지할 수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다만 이미 정 회장을 중심으로 현대차그룹 전체가 미래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의 전환을 가속하고 있는 만큼 별다른 영향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2018년 9월 그룹 수석부회장을 맡은 정 회장이 정 명예회장을 대신해 그룹 전반을 진두지휘해왔기 때문이다.
현재 현대차는 내연기관 자동차에서 전기·수소차로의 전환과 △ 도심 항공 모빌리티(UAM) △ 목적 기반 모빌리티(PBV) △ 모빌리티 환승 거점(HUB) 등으로 대표되는 미래 모빌리티로의 전환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현대차그룹 싱가포르 글로벌 혁신센터(HMGICS)’ 건립 계획도 마련했다.
미래 모빌리티 대응을 위해선 부품이나 소프트웨어 등 개발에 특화된 그룹 계열사의 역량도 살펴야 한다. 실제 HMGICS의 경우 현대차와 기아는 물론 현대모비스, 현대글로비스, 현대오토에버, 현대위아, 현대로템, 현대트랜시스 등 계열사들이 대거 참여한다. 이들의 역량을 결집시키려면 정 회장의 리더십이 필수적이다.
정 명예회장은 최근 몇 년 간 자신을 대신해 현대차그룹을 이끌어 온 정 회장에게 그룹의 미래를 일궈 나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기 위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는 용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속담이 있다. 막상 떠나고 난 뒤 그 빈자리가 크게 다가오는 경우를 뜻한다. 20여년 간 그룹 총수로서 현대차그룹을 삼성에 이은 국내 재계 2위에 올려 놓고 전 세계 자동차 시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정 명예회장의 아름다운 용퇴에 경의를 표한다.
[오창영 기자 / 판단이 깊은 신문 ⓒ스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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