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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의 군대는 두 대로 나뉘어 수륙 양면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노들나루를 출발한 수군은 강을 따라 올라가다가 광나루로 상륙해 아차성을 쳤다. 태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한성의 남쪽으로 나아갔다.
광개토태왕의 전술은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았다. 고구려군은 성과 성을 잇는 길을 차단하고 한성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공격을 개시한 지 사흘이 지났다. 고타하가 이끄는 선봉대가 성에서 날아오는 시석을 피하면서 해자를 건넌 후 외성의 성벽을 타고 올랐다. 한성의 백제군은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고구려군의 공격은 집요했다.
외성이 무너지자 아신왕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외성이 함락되었으니 내성 또한 오래 버티기 어려웠다.
외성을 지난 고구려군이 내성을 물샐틈없이 포위했다. 내성에 남은 한성 수비군은 5천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광개토태왕의 군대는 성을 포위만 했을 뿐 공격하지 않았다. 마치 폭풍 전의 고요함과 같은 상태로 시간이 흘러갔다. 그들은 백제군에게 투항하라는 권고조차 하지 않았다.
죽을 각오로 싸우려 했던 내성의 수비군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항전의 의지는 엷어졌고 군사들의 기율이 문란해졌다.
오직 아신왕만이 끝까지 항전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이에 사등을 주축으로 한 대신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가병을 동원해 아신왕을 감금했다. 대부분의 수비군도 이에 동조했다.
사등은 성문을 활짝 열고 고구려군을 맞이했다. 백제 군사들이 아신왕을 광개토태왕 앞에 끌고 왔다. 아신왕은 모든 걸 체념한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배신자들에 대한 분노조차 느끼지 않는 듯했다.
광개토태왕이 매섭게 물었다.
“너는 어찌 신의를 저버리고 우리의 영토를 넘보았느냐?”
“지난날의 패배에 승복할 수 없었소. 무릇 왕이란 한 나라의 전통과 명예의 수호자요. 누대에 걸쳐 대국으로 천하를 호령하던 백제가 내 대에 와서 무너져 내린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소. 나는 싸우든 죽든, 하나를 선택해야 했소.”
아신왕의 말에서 비장감이 느껴졌다.
태왕은 호탕하게 웃었다.
“너희 형제는 모두 담대하고 고집스럽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아우보다 네가 어리석다는 것이다.”
광개토태왕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는 아신왕의 기상을 높이 평가했다.
“짐은 그대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 언제든지 힘을 키우면 다시 일어나도록 해라. 그때까지는 백제를 고구려의 속국으로 놓아 두겠다.”
태왕은 간특하고 음흉한 사람이 백제의 왕위에 오를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솔직담백한 아신왕을 그대로 두는 편을 택했다.
아신왕은 젊은 태왕의 관대함에 고마움을 표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상대에 대한 존경심과 두려움이 자리 잡았다.
광개토태왕이 아신왕의 목을 치기는커녕 백제의 왕으로 인정하자, 배신했던 사등을 비롯한 대신과 군사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언제 아신왕이 복수의 칼을 꺼내 들지 모르는 일이었다.
광개토태왕은 승자로서 백제를 견제할 수 있는 강화 조건을 내세웠다. 사직을 무너뜨린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처지인 백제 왕으로서는 무조건 받아들여야 했다.
강화 조약의 결과 백제는 고구려의 속국임을 인정하고 대수가 아닌 한수(漢水)를 두 나라의 경계로 삼았다.
또한, 관미성뿐 아니라 경기만 일대의 모든 섬이 고구려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됐다. 그리고 조공이라는 명목으로 백제의 남녀 1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고구려에게 바치게 했다.
끝으로 사등 등 아신왕을 몰아내는 데 앞장선 대신 십여 명을 볼모로 요구했다. 아신왕이 건재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기에 이를 두려워해서 그들이 선수를 칠 수도 있었다. 그러면 백제의 정국이 혼란스러워질 테고, 그 여파로 백성도 피해를 볼 것이었다. 이제 백제인도 태왕의 백성이니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돌봐야 했다.
아신왕은 사등을 비롯한 배신자들을 자신의 손으로 처단하고 싶었다. 그래야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떠한 선택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신왕은 다시 한 번 고구려왕에게 무릎을 꿇는 처지에 놓였다. 이번에는 도성을 빼앗기고, 신하들에게 배신당해 광개토태왕 앞에 끌려가는 수모까지 겪었다. 댓돌에 머리를 박고 죽어도 시원치 않을 일이었다. 그래도 살아남아야 했다. 언젠가는 스스로 오명을 씻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신왕은 광개토태왕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고, 협정을 지킬 것을 맹세했다. 이때부터 백제의 군신은 고구려왕을 태왕(太王_태왕은 왕 중의 왕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서방의 천자 혹은 황제와 같은 개념이다. 태왕이라 불린 이후, 고구려는 만주 벌판뿐 아니라 화북을 아우르는 천하의 패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이라 높여 불렀다.
백제를 완전히 제압한 광개토태왕은 동북의 산림 지대에 있는 숙신(肅愼)으로 눈을 돌렸다. 숙신은 물길, 말갈, 읍루 등 고구려 동북부의 여러 부족을 통칭하는 말로, 각각의 부락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지난 서천왕(西川王) 시절, 안국공 달가에 의해 복속된 이래 이들은 해마다 고구려에 세공을 바쳤다. 그런데 이즈음에는 반고구려를 표방하는 세력이 득세하면서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광개토태왕은 복속한 부족들이 의무를 행하지 않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다. 이를 묵과한다면 다른 지역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었다. 태왕은 종주국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동북 원정길에 나섰다.
숙신족은 주로 삼림과 드넓은 초원에 살았기에 전사들은 초원에서의 기동전뿐 아니라 울창한 수풀에서 치고 빠지는 전술에도 능했다. 그들은 단궁(短弓)을 주로 사용하는데, 휴대가 편하고 신속하게 활을 쏠 수 있었다.
고구려군은 처음에는 숙신 전사들의 기습 공격에 고전했다. 그러나 그들의 전술을 파악하면서 강력한 기병 전술로 격파할 수 있었다. 고구려 군사들은 흑수(黑水) 일대까지 추격해서 숙신의 근거지를 깨끗이 소탕했다.
광개토태왕은 저항한 부족들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그들은 고구려에 복속한 대가로 안전과 번영을 약속받았다.
서력 399년, 매섭던 겨울바람이 잦아들었다. 산야를 지배하던 동장군(冬將軍)이 봄기운에 밀려 서서히 물러났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새싹이 수줍게 얼굴을 내밀었다.
잔뜩 웅크리고 있던 궁인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지면서 궁궐도 활기를 되찾았다. 편전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낭랑하고 힘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투구 대신 백라관을 쓰고, 갑옷 대신 금포를 차려입은 광개토태왕이 신하들과 정사를 의논하고 있었다. 오랜 원정으로 쌓였던 피로가 말끔히 풀렸는지 태왕의 얼굴에는 활기가 넘쳐흘렀다.
숙신을 정벌하고 돌아온 광개토태왕은 내정에 힘을 기울였다. 도성을 비운 사이 대대로(大對盧) 고숭(高崇)이 훌륭히 내정을 이끌었지만, 태왕이 친히 처리해야 할 문제가 곳곳에 산적해 있었다.
광개토태왕은 아침 묘시(卯時)에 일어나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장계를 살피고, 신하들이 입조하면 그때부터 나라의 중대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는 대소사를 결정할 때면 신하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정책을 논하는 자리에서는 어떤 의견을 내놓아도 질책하는 법이 없었다. 고구려 조정에선 늘 풍성하고 알찬 정론(政論)이 오갔다.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 안에는 여러 부족이 살고 있었기에 이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는 다양한 문화에 대한 포용력이 필요했다.
복속은 시키되, 자치권을 인정하는 광개토태왕의 정책은 고구려가 조성한 거대한 교역망과 더불어 만백성을 매료시켰다. 그들은 자신이 고구려의 백성임을 자부할 정도로 자랑스럽게 여겼다.
광개토태왕은 왕위에 등극할 당시부터 드넓은 영토와 수많은 부족을 하나로 묶을 이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목한 것이 바로 소수림왕 때 공인된 불교였다. 그는 불교 정신이 다양한 부족과 계층을 하나로 묶을 힘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위에 등극한 지 2년이 지난 후, 도성에 9개의 사원(寺院)을 세우고 불교 신앙과 문화의 확산에 힘을 쏟았다. 소수림왕에 이어 고구려에 불교가 널리 정착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고구려 백성은 광개토태왕의 치세에 만족스러운 생활을 영위했다. 태왕이 대외 원정으로 구축한 교역망을 통해 각지의 산물이 고구려로 모여들었고, 풍년이 거듭되면서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시절을 영락(永樂) 시대라 칭송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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