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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풀거리는 난초 꽃잎을 엮어 만든 화관, 넝쿨 패턴의 우아한 가운, 가녀린 손에 꼭 쥐고 있는 종려나무 가지. 알폰스 무하를 스타로 만들어준 연극 포스터 ‘지스몽다’의 이미지다.
무하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매혹적인 여성의 이미지와 꽃과 식물의 패턴을 활용한 아르누보 스타일로 유럽과 미국에서 최고의 명성을 누렸다.
서울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는 ‘알폰스 무하 이모션 인 서울’을 두고 말이 많다. 일각에서는 ‘무하의 포스터 작품을 실제 볼 수 있는 기회’라고 홍보해놓고 무하가 직접 그린 원화는 단 한 점도 걸지 않았다는 데 불쾌감을 토로했다. 일부 매체는 돈벌이에 급급한 기획사가 원화 인쇄물과 영상로 대충 때운 행태를 비난하기도 했다. 실제로 전체 423점 중 31점은 인쇄물이고 나머지는 영상 작품이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원화란 작가가 직접 붓으로 캔버스에 칠한 작품을 뜻한다. 하지만 무하에게 있어 원화란 아무 의미 없다. 처음부터 그의 작품은 복제를 전제로 한 포스터 작업이기 때문이다. 포스터는 수십, 수백 장을 찍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제작된다. 포스터 제작에 있어 원화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의뢰인이 요구하는 것은 원화가 아닌 포스터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무하의 유화 작품을 우연히 마주친 공연자가 그것을 연극 포스터로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다고 하자. 이 경우 포스터 제작자는 최대한 원화의 색감과 느낌을 살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때라면 원화는 매우 중요한 지위를 갖는다.
하지만 처음부터 포스터를 목적으로 제작하는 작품은 설령 원화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가령 색감을 뚜렷하게 만드는 등 인쇄 과정에서 보정을 통과하여 완전해지기 때문에 가장 인쇄가 잘된 포스터가 정품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무하는 자신의 예술이 대중에게 가닿길 바랐다. 그는 광고 작업을 경멸하지 않았다. 매장 인테리어는 물론 메뉴판·담배갑·과자 포장지 의뢰가 들어와도 다 응했다. 개인적으로 원화에 애착이 갈 수는 있겠지만 상업예술가인 그에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잘 나온’ 인쇄물이었다.
새해를 코앞에 둔 1894년 겨울, 한 공연기획자는 프랑스 배우 ‘사라 베르나르’ 주연의 연극 ‘지스몽다’ 포스터를 그려 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연말인지라 사람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던 그의 눈앞에 알폰스 무하가 나타났다.
공연기획자는 무하 덕에 유명 배우의 공연 소식을 파리 시민에게 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지스몽다의 포스터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파리 시민들이 거리에 붙은 포스터를 죄 뜯어 가버린 것이다. 그때 뜯어간 포스터를 누군가 지금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다면 그것이 과연 무하의 작업실에 잘 보관된 원화보다 가치가 낮다고 할 수 있을까.
20세기 초 독일 사상가 발터 벤야민은 원본이 갖는 고유의 느낌을 ‘아우라’라고 명명했다. 아우라는 복제품이 흉내 낼 수 없는 원본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뜻한다. 그에 의하면 아우라는 예술작품이 지니는 품격의 원천이다. 벤야민은 대량복제시대를 맞아 예술의 품격이 사라지는 것을 우려했다.
여전히 벤야민은 옳다. 대량으로 복제되고 디지털화된 작품에서 원화의 아우라를 찾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최근 유행처럼 번지는 미디어아트는 아우라를 넘어선 어떤 새로운 지점에 도달해 있다.
원본의 아우라를 경험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문화적 식견을 쌓아야 하고, 비싼 돈을 들여 원본이 있는 장소로 여행을 떠나거나 원본이 국내에 들어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첨단의 미디어아트는 아우라를 상실했을망정 인간의 기술력이 생성한 ‘환상’을 경험하게 해준다. 느닷없이 하늘이 열리고, 그곳에서 꽃잎이 흩날리고, 그림 속 미녀가 윙크를 하고, 밤하늘 별이 내게로 쏟아진다면 비록 그것이 싸구려 감상이라고 해도 인간에게 미적 쾌감을 선사한다는 예술 본연의 의무를 다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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