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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고구려 해군 대장선에서 세 발의 불화살이 어둠을 뚫고 날아올랐다. 이를 신호로 당나라 선단에 가까이 접근했던 고구려 전선들은 일제히 불화살을 날렸다.
당나라 배들이 불타오르더니 화염에 휩싸였다. 술에 취해 있던 군사들이 놀라서 갑판 위로 튀어나오다가 날아든 불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어떤 군사는 비명을 지르며 바다에 떨어졌다.
부둣가에서 화광(火光)이 충천하자 비사성 망루의 파수병이 이를 보고 급히 지휘부로 달려가 고했다. 얼큰하게 취해 있던 장문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성벽으로 달려갔다. 망루에 올라 항구 쪽을 바라보니 화염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풍류객이 본다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고 탄식할 만한 광경이었다.
장문간은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몸을 가까스로 진정시킨 후 뒤따라온 종제를 돌아보며 지시했다.
“당장 군사를 이끌고 항구로 가거라!”
장문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자신의 책임인 식량 수송선을 모두 잃는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장문호는 비사성의 장수들과 함께 부리나케 항구로 내달렸다. 부둣가에 도착해 보니 벌써 300척의 수송선 중 절반 이상이 전소된 상태였다. 그들로서는 발을 동동 구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장문호는 수송선을 구하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당장은 고구려군의 상륙을 막아 내는 게 더 중요했다. 그는 부둣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진을 쳤다. 하지만 고구려 해군은 상륙하지 않고 남은 당선을 불태우는 데 열중했다. 그들의 화공(火攻)은 다음 날 새벽까지 계속됐다.
날이 밝자 온사문은 화공을 멈추게 한 후 상태가 양호한 양곡선은 석성도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이에 고구려 해군들은 배의 파편들을 헤집고 다니면서 그나마 상태가 좋은 배를 찾아 끌고 나왔다.
완벽한 승전에 고양된 장수들은 이구동성으로 비사성 공격을 주장했다. 온사문도 내심 그러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다른 임무가 있었다.
“당군의 배를 모두 불태웠으니 저들은 당분간 바다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이제 항구에 상륙해 잔당을 소탕하고, 필요한 물품을 챙겨 등주로 간다. 그곳에 가서 당나라 병참 기지를 박살 낼 것이다.”
고구려군의 전선들이 항구로 들어서자 해안가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있던 장문호는 군사들에게 명했다.
“언덕 아래 수풀로 내려가 매복하라. 저들이 상륙하여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일제히 화살을 날려라.”
고구려군이 배에서 내려 상륙했다. 수풀 속에 숨어 있던 당군은 바짝 긴장한 채 활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이제 몇 걸음만 더 오면 사정거리 안에 들어설 것이었다. 시위를 잡은 당나라 군사의 손에 땀이 흥건히 뱄다.
긴장감으로 숨이 막힐 것 같은 순간 수풀 뒤편에서 수백의 장정들이 내달려 오더니 매복 중인 당군을 창칼로 무섭게 공격했다. 기습을 받은 당나라 군사들은 이렇다 할 저항도 못하고 황천길로 가야 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은 수풀에서 뛰쳐나와 무작정 해안으로 달렸다.
주위를 살피며 전진하던 고구려 군사들이 이들을 놓칠 리가 없었다. 그들은 겁에 질려 뛰어온 당군을 힘들이지 않고 도륙했다.
석조는 당군을 소탕하면서 나아가다가 이들을 추격해 오던 일대의 군사와 마주쳤다. 차림을 보니 고구려 군사들이었다.
석조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너희는 어디서 온 군사들이냐?”
선두에 선 젊은 장수가 대답했다.
“우리는 득리사산성(得利寺山城)의 군사입니다. 저는 이들을 이끌고 있는 걸회수라 합니다.”
걸회수라면 비사성주 걸사비의 아들로, 지난날 장량의 계책에 속아 성을 뺏기게 한 장본인이었다.
석조는 그의 신분을 알고 분통을 터뜨렸다.
“너의 무모한 행동으로 이 나라가 얼마나 큰 화를 입었는지 아느냐? 그런데 무슨 낯으로 이곳에 나타났느냐!”
걸회수가 비장하게 말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끊어 용서를 빌까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죽어도 치욕은 씻고 죽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이제껏 구차한 목숨을 연명해 왔습니다. 저에게 우선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주십시오.”
석조는 그의 비장한 각오를 듣고서 마음이 누그러졌다.
“너에게 기회를 줄지는 우리 장군께서 결정할 문제다. 나와 함께 가자.”
이렇게 해서 비사성 항구를 점령한 석조는 걸회수를 데리고 대장선으로 돌아갔다.
온사문 앞에 나아간 석조는 먼저 성과를 아뢰었다.
“항구를 장악했습니다. 아군의 피해는 미미한 수준입니다.”
온사문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당군의 저항이 심하지 않았나 보구나.”
석조가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군의 매복이 있는 줄 모르고 해안으로 상륙하다가 기습을 당할 뻔했습니다. 다행히 우군이 도와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우군이라니? 그렇다면 인근에 아군이 있었다는 말이냐?”
온사문이 의아하여 묻자 석조가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득리사산성의 군대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우두머리가 바로 비사성주의 아들인 걸회수였습니다.”
“그가 아직 살아 있었단 말이냐?”
온사문은 걸사비와 절친한 사이였기에 그의 아들인 걸회수가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기뻤다.
“지금 어디에 있느냐? 이리 데리고 오너라!”
석조가 선실 밖에 대고 걸회수를 들이라 명했다.
잠시 후, 걸회수가 긴장한 얼굴로 들어왔다.
“장군, 그동안 무고하셨습니까? 불초 소생 걸회수, 낯 두껍게 이리 살아 있었습니다.”
모진 시련과 번민을 겪어서 그런지 걸회수는 몰라보게 의젓해져 있었다.
“그래, 그동안 어찌 지냈느냐?”
온사문은 걸회수를 보니 돌아간 벗이 생각나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당군에게 기습을 당한 후 비사성을 떠나 득리사산성으로 도망쳤습니다. 그곳의 성주께서 거둬 주셔서 이때까지 몸을 의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나 깨나 비사성을 탈환할 생각뿐이었으나 성을 나서지 말라는 대막리지의 엄명이 있었기에 그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장량이 선단을 이끌고 비사성을 떠났다는 첩보를 접하고 성을 되찾을 호기라 여겨 이처럼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달려온 겁니다.”
온사문이 다정하게 위로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네가 젊은 혈기로 방자하게 행동한 탓에 큰 화가 닥치긴 했지만 앞으로 나라에 공을 세운다면 죄를 씻을 수 있을 것이다. 내 휘하에 있도록 해라.”
이리하여 걸회수는 온사문의 군대에 합류했다.
온사문은 수하들에게 출항을 명령했다. 고구려 해군은 비사성 앞바다를 떠나 등주로 항해를 거듭했다. 그래서 이틀째 되는 날 밤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날따라 연안에는 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다.
석조가 이끄는 선봉 함대는 등주만으로 접근해 갔다. 당나라 초계병이 간간이 해안을 돌아다녔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들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들은 무사히 해안에 접안할 수 있었다.
석조는 상륙하자마자 군사들을 이끌고 양곡창으로 내달렸다. 이곳이 오늘 밤 그가 불태워야 할 목표였다. 주변은 동굴처럼 어둡고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길 안내를 맡은 당군 포로가 양곡창의 위치를 가리켰다. 약 300여 평쯤 되는 규모의 창고 10여 채가 모여 있었다. 창고 주변에는 경비병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고구려군이 바다 건너 이곳으로 쳐들어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석조는 자신의 뒤를 따르던 걸회수에게 지시했다.
“내가 여기를 맡을 테니 자네는 곧장 병기창으로 가게. 이곳에서 불길이 치솟으면 그쪽 창고에도 불을 놓게나.”
걸회수는 군사 1000명을 이끌고 병기창으로 달려갔다.
석조는 양곡창으로 다가가 염초 뭉치를 쌓고 불을 놓았다. 불길은 목조로 된 창고의 벽에 옮겨붙더니 삽시간에 건물 전체로 번져 갔다. 순찰하던 당나라 군사들이 화광이 번뜩이는 것을 보고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막사에서 곤히 자고 있던 당군들이 깜짝 놀라 뛰어나왔다. 그러자 밖에서 지키고 있던 고구려군이 각궁을 쏘아댔다. 당나라 군사들은 막사에서 나오자마자 화살을 맞고 고꾸라졌다.
이때, 걸회수는 양곡창 쪽에서 불길이 오르는 것을 보고 병기창에 불을 놓았다. 그러고는 도끼를 빼 들고 당나라 군사를 찾아 뛰어다녔다.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망가뜨린 당군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걸회수는 눈에 보이는 족족 당군을 도끼로 내려쳐 죽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섬뜩한지 보는 이의 오금을 저리게 했다.
한편, 등주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온사문은 뭍에서 불길을 이는 것을 보고 명을 내렸다.
“당선을 격침시켜라.”
고구려 전함들은 일제히 나아가 부두에 정박하고 있던 당나라 선박에 화공을 퍼부었다. 당선은 고구려군의 불화살 세례를 받고 하나둘씩 불에 타서 침몰했다. 등주 앞바다에서 때아닌 불꽃놀이가 벌어졌다.
출항 준비를 마치고 배에서 잠들어 있던 당나라 군사들은 불길을 피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들 중 수영에 능한 자는 해안가로 헤엄쳐 올 수 있었지만 그들 역시 죽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들은 뭍에 올라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고구려군이 쏜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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