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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어스름 무렵, 연개소문은 아우 연정토와 함께 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건안성에 다다랐다. 성주는 성문을 열고 나와 반갑게 맞았다. 대막리지는 군사를 쉬게 한 후 서북쪽 성루에 올라 전방을 바라봤다. 저 멀리 장량의 부대가 요동만을 배후에 두고 진을 친 모습이 보였다. 모양새가 엉성하고 군기가 흐트러진 것으로 볼 때 이미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연개소문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저 도적들이 혼이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다. 그런데 어찌 나가서 치지 않고 보고만 있는가?”
어떤 일이 있어도 성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명을 내린 사람이 바로 연개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었다.
기동부는 심계가 깊은 사람이었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저들은 지금 잔뜩 독이 오른 상태입니다.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아군의 희생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때마침 대막리지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기다리는 게 상책이라 판단했습니다.”
연개소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현명한 생각이다. 장군이 공을 세울 욕심으로 나가 싸웠다면 적을 무찌를 수는 있었겠지만 군사의 아까운 희생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이는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다.”
대막리지는 장량의 진영을 노려보며 말을 계속했다.
“지금쯤이면 내가 건안성으로 향했다는 정보가 당주의 귀에 들어갔을 테니 곧 지원군을 보낼 것이다. 그러니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내일 아침 일찍 군사를 이끌고 나가 장량의 부대를 무찌를 테니 장군은 북쪽 길을 지키고 있다가 당의 지원군이 나타나면 막아라.”
이튿날 아침 대막리지는 군사를 이끌고 장량의 진영으로 쳐들어갔다.
장량은 연개소문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냉수 한 사발로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 부하 장수들과 함께 대오의 선두로 나아갔다.
장량이 앞을 바라보니 형형색색의 깃발을 앞세운 고구려 기병이 맨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高句麗 大莫離支 淵蓋蘇文)’이라는 글자가 수 놓인 깃발이 힘차게 나부끼고 있었다. 그 아래 한 장군이 늠름하게 말 위에 앉아 있었다. 바로 연개소문이었다. 그는 백색 준마를 타고 황금색 투구에 붉은 갑옷을 입었다. 허리에는 패검을 다섯 자루나 찼고, 손에는 묵직해 보이는 장창이 들려 있었다.
연개소문은 당나라 진영을 향해 벼락같이 외쳤다.
“나는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다. 장량은 당장 나와 무릎을 꿇어라. 그러지 않으면 오늘 이 자리에서 모두 죽는다!”
장량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명색이 대총관으로서 체면을 지켜야 했다.
그가 머뭇거리자 방효태가 상기된 얼굴로 나섰다.
“내가 나갈 테니 한 판 붙어 보자!”
수하 장수가 달려나오자 고구려 진영에서는 연정토가 쌍칼을 휘두르며 말을 몰아갔다.
두 장수는 수십 합이나 겨루었지만 결판을 내지 못했다.
연개소문이 이를 지켜보다 군사들을 돌아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무엇들 하고 있느냐! 당장 저것들을 쓸어 버려라!”
명령이 떨어지자 3만의 고구려군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당군을 향해 돌진했다. 시퍼런 창칼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모습은 며칠 굶은 백두산 호랑이처럼 사나워 보였다. 애당초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던 당군은 고구려군의 위세에 크게 겁을 먹고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당나라 장수들이 악을 쓰며 막으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해안가로 도망친 당군은 정박하고 있던 선박에 먼저 오르려고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웠다.
이때 장량은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간신히 몸을 피해 배에 올랐다. 그는 급히 출항을 명령했다. 고구려군의 추격에 초조해진 선원들은 조금이라도 해안에서 멀리 떨어지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를 저었다.
도망치는 당군을 사냥하며 해안가에 다다른 고구려군은 미처 배에 올라타지 못한 당군을 향해 활을 쐈다. 당군은 너나 할 것 없이 차가운 바닷물로 뛰어들어 배에 올라타려고 했다. 수많은 군사가 다투어 매달리다 보니 배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기우뚱거렸다. 이에 배에 먼저 올라탄 자들이 난간을 잡고 올라오려는 동료의 손을 도끼로 찍었다. 주인을 잃은 손가락들이 배 안에 우수수 떨어졌다. 손가락이 잘린 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차가운 바닷물로 떨어져 내렸다.
당나라 전선은 아우성치는 군사를 버리고 해안에서 멀어져 갔다. 해안에 당도한 연개소문은 달아나는 배들을 향해 불화살을 쏘라 명했다. 미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배들이 불화살을 맞고 화염에 휩싸였다. 목숨을 건졌다고 안심하던 당나라 군사들도 별 수 없이 황천길로 갔다.
장량이 배 위에서 멀어져 가는 육지를 바라보며 방효태에게 침통한 어조로 물었다.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비사성은 어떨까?”
방효태가 울분을 참으며 대답했다.
“이 지경이 된 마당에 비사성이라고 무사하겠습니까.”
“그럼 어쩐단 말인가? 안시성으로 가는 길은 막혔고, 그렇다고 등주로 돌아갈 수도 없지 않나.”
“지금으로서는 요하 서안에 상륙한 후에 기회를 보아 안시성 인근에 주둔한 본대와 합류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장량은 그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장량이 착잡한 심정으로 육지 쪽을 바라봤다. 어느덧 불타는 배들이 작은 불꽃처럼 보였다. 이미 해안에서 상당히 멀어진 듯했다. 하늘에는 별들이 촘촘히 빛나고 있었다.
당 태종은 연개소문이 건안성으로 갔다는 첩보를 들은 지 이틀도 되지 않아 장량의 부대가 대패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거듭된 패전 소식에 망연자실(茫然自失)했다.
당 태종은 장손무기와 이세적 등 장군들을 소집했다.
“연개소문의 용병술은 어찌 이리도 신속한가. 단 일격에 장량을 패퇴시켰구나. 앞으로 어찌해야겠는가?”
누구도 감히 입을 떼지 못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는데도 아무도 나서지 않자 태종은 장손무기를 보며 성질을 부렸다.
“내가 그대의 말에 따라 건안성을 놔두고 안시성을 치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됐다. 차라리 전군을 동원해서 건안성을 점령하고, 그 기세를 몰아 천산산맥을 넘어 오골성을 쳤다면 평양은 벌써 우리 수중에 들어와 있을 것이 아닌가.”
장손무기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봉하고 있자 태종은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
한참 눈치를 살피던 장손무기는 호통을 듣고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전장에서 패배는 늘 있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고구려군보다 많은 군사가 있습니다. 심기일전하여 맞선다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당 태종은 태평한 소리를 늘어놓는 장손무기를 보며 화가 치밀었지만 애써 참았다.
태종은 도종을 가까이 불렀다.
“토산 쌓는 작업은 진척이 있느냐?”
도종이 재빨리 대답했다.
“이제 절반 정도 쌓았습니다. 한 달 안에는 완성될 겁니다.”
“찬바람이 부는 걸 보니 얼마 안 있으면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하기야 오늘이 8월하고도 여드레이니 이미 가을이구나. 요동의 혹독한 추위가 닥쳐오기 전에 결판을 내야 한다.”
태종은 다시 장손무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등주를 떠난 식량 수송선들이 비사성 앞바다에서 고구려 해군에게 당했다더군. 지금 남아 있는 양곡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겠소?”
장손무기는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식량 사정이 매우 안 좋습니다. 육상 보급로가 고구려 유격대에 의해 차단된 상태에서 해로까지 막히게 되니 달리 식량을 구할 방법이 없습니다. 현재 우리가 확보한 것은 요동성에 비축한 양곡 30만 석 정도입니다.”
예상보다 더 심각한 상태였다.
태종은 자신의 경솔함을 탓했다. 고구려와 같은 강국에 원정 오면서 보급로를 확실히 확보하지 못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특히 고구려 해군의 역량을 과소평가하여 해로를 통한 보급의 차질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었다.
초기에 개모성을 점령하고 요동성을 함락시켰을 때는 일이 계획대로 순조롭게 돌아가는 듯했다. 그다음 백암성까지 얻고 나니 고구려 전체가 손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착각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이미 연개소문의 전략에 말려든 것이었다. 고구려의 대막리지는 처음부터 임유관에서 요동에 이르는 육상 보급로를 차단하고, 해상 보급선까지 봉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당 태종은 자신도 모르게 연개소문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당 태종은 좌중을 둘러봤다. 고구려 원정 전만 해도 그토록 믿음직스럽고 늠름해 보이던 장군들이 지금은 너무도 한심하고 초라해 보였다.
태종은 신하들을 물리친 후에 막사 안에 놓인 침상에 누웠다. 그는 잠을 청하려 애썼지만 걱정이 되어 잘 수가 없었다. 연개소문이 두려웠지만 지금 와서 말머리를 돌려 돌아갈 수는 없었다.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요동까지 왔고, 그 후로 수많은 군사를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패전을 인정하고 장안으로 돌아간다면 백성의 손가락질을 받을 게 분명했다. 그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당 태종은 누구에게도 속내를 드러내고 상의할 수 없었기에 홀로 괴로워했다. 그러다가 독한 술을 들이켠 후에야 잠을 이룰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태종은 이세적에게 진영을 안시성 쪽으로 가깝게 옮기라고 명했다. 본격적으로 연개소문과 싸울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종을 불러 토산 축조를 서두르라고 지시했다. 드디어 전쟁의 승패를 가를 양편의 대전이 눈앞에 닥쳐왔다.
영채로 돌아온 연개소문은 수하 장수들을 전부 모아 놓고 작전 회의를 했다.
“여러분의 노고 덕분에 당주(唐主) 이세민의 군대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소. 이제부터는 이세민의 목을 조여 갈 것이오.”
분위기를 띄운 대막리지는 고정의를 보며 물었다.
“지금 당주의 휘하 군사는 얼마나 되오?”
“아직도 30만은 훌쩍 넘습니다.”
연개소문이 보기에 당군의 수효는 여전히 많았다. 그렇다면 정면충돌은 되도록 피해야 했다.
[임동주 글 김종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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