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흙 속에 뿌려진 씨앗’이란?

진흙은 어려움을 뜻하고 이러한 어려움을 씨앗이 헤쳐 나가고 결국엔 기적같이 싹을 틔운 씨앗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려움 속에서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이겨내서 희망 즉 기적을 만든다는 뜻이다.

# 어두운 총성이 울려 퍼지다

1939년 7월 매미들이 시끄럽게 울어 재끼던 어느 여름날, 나는 치렁산 너머에서 10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하지만 산골 마을에서 ‘행복’이란 단어를 한낱 산골 소년이 누리기엔 그저 사치였던 것일까. 1950년 6월 25일, 내가 8살이 되던 해 친구들과 흙 놀이를 하고 있던 때 흙에 비치던 나의 그림자는 어느샌 가 사라지고 오직 어둠만이 근엄히 땅 위에 내려 앉아있었으며, 내 머리 위엔 굉음과 함께 커다란 비행기가 몸에 불붙은 것처럼 급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몇 분 아니 몇 초가 지났을까 산 건넛마을에선 엄청난 굉음이 나를 뚫고 지나갔다. 그 엄청난 힘에 다리의 힘은 풀려 그저 멍하니 산 너머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불길이 나를 보며 괴롭게 절규하고 있었고, 넘어진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쾅쾅거리는 소리를 내며 더욱더 괴롭게 절규하였다. 나는 그 뜨거운 열기에 덜덜거리는 손으로 내 손을 감싼 흙을 엄마 손 잡듯 꽉 잡아 쥐었다. 그것이 흙과 나와의 인연을 예고해 준 것이었을까. 아직도 항상 내 곁에는 흙이라는 고마운 그림자가 내 옆에 존재한다. 어린 나의 조그마한 손은 흙 한 줌의 보드라운 결을 손안에 꼭 쥐고 덜덜거렸고, 또 내 가족들은 짧은 추억들 모두 집안에 담아둔 채 나의 장난감 깡통도 챙길 새도 없이 한 치의 예고도 없는 총성, 비행기의 굉음에 쫓겨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나는 머리 위에 무거운 짐을 인 어머니의 다급한 손에 이끌려 험한 산을 넘고 또 넘었다. 그렇게 나는 평생을 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두 번째 고향 남대리 마을에 오게 되었다. 남대리의 여름에는 집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곳에서 새우잠을 청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구걸하고 도토리를 삶아 먹었다. 심지어 겨울엔 남대리를 벗어나 산속에서 나무껍질로 죽을 끓여 먹었다. 심심하던 내 어린 시절 훤히 튀어나온 갈비뼈를 보고 “하나..둘..” 개수를 세며 숫자 공부를 하였고 갈비뼈가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보고 돼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때는 재미있게 느껴지던 것이 왜 이제 와서 생각하면 눈앞이 자꾸 흐려지는 것일까. 그리고 가끔 폭죽 소리를 들을 때면 꿈쩍꿈쩍 놀라기도 한다. 옛날의 남대리는 어른들이 ‘폭격지대’라고 얘기하는 것을 많이 들어왔다. 그래서였을까. 항상 나의 주위에는 비행기의 굉음이 나와 함께 하였고 얼마 안 있으면 곧 ‘쾅’하고 온 마을이 흔들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커다란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의 손은 나도 모르게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또한, 어린 나의 기억 속에는 비명, 그리고 총소리 밖에 내 머릿속을 채우지 않는다. 내 가족들과 집이라고도 할 수 없는 좁은 공간에서 쪼그린 자세로 잠이 들 때면 항상 오른쪽 어깨너머 공터에서는 고요한 침묵 속 여러 발의 절규와 같은 총성 소리가 조용히.. 그리고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내가 잠이 들 때면 총성은 자꾸 나를 향해 비명을 질러댔다.

그 소리는 끔찍할 수밖에 없었고 나의 귀는 찢어져 피에 절인 듯하였다. 어머니는 조용히 따듯한 두 손으로 소리를 막아주셨다. 하지만 그 끔찍한 것들은 어머니의 손을 찢고 들어와 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겨댔다. 그렇게 나의 몸은 멀쩡한 부분 없이 다 헐어버려 너덜너덜해졌고, 과거 폭음의 엄청난 소리에 떨리던 손은 아직도 그와 비슷한 굉음이 들리면 미친 듯이 떨린다는 것이다. 언제나 어두운 비명이 들리던 그때에도 나의 손은 항상 떨리고 있었고, 이 밤이 지나가길 바라며 잠이 들기 위해 억지로 부들부들 사시나무 떨리듯 떠는 두 손으로 눈을 꼭 누르며 오직 잠이 들기를 바랄 뿐...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때의 군인들에게 제일하기 쉬운 일이 뭐냐고 물으면 대부분 사람이 대답하기를 사람 죽이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군인들은 사람 죽이는 일을 일상처럼 아무렇지 않게 행하였다. 군인들은 겉모습만 사람 모습을 한 본능을 사냥으로 바꾼 짐승과도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선량한 젊은 사람들이었지만 행동은 정말 짐승과도 같았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공터로 끌고 가는 것이 일이었다. 그들의 사냥 장소가 바로 공터였던 것이었다. 그들의 불쌍한 사냥감이 된 사람들은 군인들의 눈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일을 하면 공터로 끌려가 총성과 함께 다시 마을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아직도 발악하며 공터로 끌려가는 어른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어릴 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죽음이라는 그 공포를 조금이나마 더 알 것 같다. 담벼락 뒤에서 지켜보던 소년이 그 어른의 심정을 알기는 했을까. 총성과 함께 사라진 마을의 어른들을 지금이나마 기려본다. 나의 유년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총성과 폭음은 어느새 나에게로 다가와 내 얼굴로 뜨겁게 흘러내린다.

# 불행 속에서 싹을 틔운 새싹

8살 때 남대리로 피난을 온 뒤 우리 가족은 참 힘들고 어려웠다. 정말 지금도 그때만 떠올리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아버지, 어머니는 우리 10남매를 위해 일생을 농사와 함께하셨다. 나도 집안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어릴 때부터 곁눈질로 아버지, 어머니를 보며 농사일을 돕고 또 스스로 농사도 배웠다. 농사일 돕기를 1년, 2년 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전문 농부라고 칭할 수 있을 만큼 농사에 능숙해져 있었다. 이렇듯 자연스럽게 농사는 내 삶의 전부가 되었다. 아침에 해 뜨면 밭에 나가서 일하고, 일하다 보면 어느새 해가 져 있었다. 이러한 생활을 반복하면서 열심히 일하다 보니 내 밭도 자리를 잡아갔고 내 소유의 집도 한 채 지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벅차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내가 키운 콩, 고추를 팔아 돈도 조금씩 모았고, 나와 우리 가족을 굶주림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준 농사가 너무 고맙다.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것도 농사이고 지금도 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너무나도 고맙던 농사가 힘들었던 그 시절에는 미웠다. 난 어릴 때부터 가난했던 가정형편과 농사일 돕느라 공부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남들 학교 다닐 때 난 땀 흘리며 농사를 지었다. 주변에 가방 들고 학교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정말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도 다른 애들처럼 학교도 다니고 글도 배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글을 쓰고 읽는 사람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부러운 마음은 이루 말할 수도 없이 컸다. 그 당시 내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농사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난 농사를 지어 돈을 벌고 생계를 이어 나가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요즈음 아이들을 보면 공부 열심히 하라는 이야기가 나도 모르게 나온다. 내 마음 한구석에 농사를 짓느라 어쩔 수 없이 포기했고, 그 시기를 놓치니까 그 뒤로는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바빠 시간이 없어 내 이름 석 자 쓰지 못하는 것이 한이 되어 맺혀 있는 듯하다. 하지만 올해 내 나이 79세로 농사와 함께 한 시간이 70년이 되었다. 내가 농사지은 콩으로 두부도 만들어 먹고 그 콩으로 메주도 빚어 된장찌개도 끓여 먹고 팔기도 하고 이웃과 나누어 먹으며 하루하루 농사짓는 것이 즐겁다.

아마 내가 다시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난 농사를 선택할 것이다. 물론 농사로 인해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난 농사 덕분에 나무껍질을 씹어 먹고 산에서 알밤 주워 먹었던 힘든 시절을 극복해 낼 수 있었다. 농사는 나에게 있어 동반자이자 원망의 대상, 희망의 대상이다. 내 인생 전체 중 부모님, 형제, 아내보다도 더 오랜 시간 함께해온 농사는 진짜 내 삶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내일도 모래도 아니 내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난 농사와 함께할 것이다.

# 나에게 찾아온 새로운 만남

남대리로 피난을 온 뒤 난 늘 농사일 때문에 바쁘게 살아갔다. 내 삶은 늘 똑같았다. 아침에 눈 뜨면 밭에 가서 일하다가 해지면 집에 돌아오고 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런 삶에 지치고 질려 갈 때 즈음 난 중매쟁이를 통해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얼마 동안 아내 집에 데릴사위로 가서 있다가 내 집으로 돌아와 결혼식을 올렸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그 당시의 설렘과 기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내 집 마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지금처럼 웅장한 예식장에서 예쁜 웨딩드레스, 멋진 턱시도를 입고 올리지는 못했지만, 나의 기억 속에는 그에 못지않은 멋지고 행복한 결혼식이다. 그렇게 지치고 힘들었던 나의 삶 속에 지금의 아내는 나를 찾아온 첫 번째 선물이었다.

그 뒤 시간이 흐른 후 나에게 두 번째 선물이 찾아왔다. 예쁘고 잘생긴 나의 아들, 딸이 태어났다.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나와 부인을 똑 닮은 자식들을 보니 더 열심히 일해서 우리 자식들은 절대 굶기지 않고 행복하고 여유롭게 키우고 싶었다. 그래서 발바닥에 불나고 땀을 비 오듯이 흘려가며 농사를 지었다. 물론 힘은 들었지만,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내 새끼들 생각에 더 힘을 내고 열심히 일했다. 정신없이 일하다 정신 차려 보니 아이들은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있었다. 내가 운전하지 못해서 여행도 한번 못 데려가고 많이 놀아주지도 못했다. 또 같이 공유한 추억 그 흔한 사진 한 장 없는 것이 정말 미안하다.

그렇게 훌쩍 자라버린 그 아이들이 새로운 가정을 꾸려 자기와 똑 닮은 아이를 낳았다. 나에게 손주가 생긴 것이다. 그 아이들이 나에게 찾아온 세 번째 선물이다. 내 눈에는 여전히 어리게만 보이는 내 자식들이 아기를 낳았다는 것이 신기하고 믿기지 않아 괜스레 볼을 한번 꼬집어보기도 했다. 우리 집엔 가족사진도 없어 우리 자식들 사진도 없는데 우리 손주들 사진은 조그마하게 수납장 위에 올려두었다. 너무 작고 귀여운 우리 손주들은 그냥 보기만 해도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1년에 몇 번 보지 못해 더 빨리 커버리고 멀어져가는 듯 한 느낌이 들어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지금은 어른이 되어 버린 손주들, 하나는 군대에 가 있고 하나는 공무원 준비를 하고 있다. 농사로 가득 차 버린 나의 삶 속에 지치고 포기하고 싶어질 즈음에 항상 나를 찾아오던 새로운 만남 덕에 난 지금껏 버텨왔고 살아올 수 있었다. 나를 찾아 왔던 선물을풀어보던 그 날의 설렘과 기쁨, 벅찬 마음을 죽는 그 날까지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