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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

연개소문에 올린 당태종 항복은 역사적 사실

항복 내용 담은 이야기가 1300년 이상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어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8-04-30 20:55:44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당 태종은 요동정벌을 하겠다고 겁 없이 쳐들어왔다가 안시성에서 눈에 화살을 맞고 도망치다가 결국은 자승자박이 되어 200리 늪지대인 요택에 빠졌다. 이 때문에 뒤에게 급하게 추격하던 연개소문에게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태백일사’에는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항복을 구걸했다고 기록돼 있다. 다만 춘추필법의 중국사서에는 그렇게 적혀있을 리가 없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추워진 날씨와 식량 때문에 안시성에서 회군을 명한 당 태종 이세민은 요수를 건너 200리나 되는 요택을 풀을 베어다가 메워 발착수를 건넜다. 이후 영주(營州)에 도착해 요동에서 사망한 사졸들을 위한 제사를 지냈다. 또 영접 나온 태자를 만나 새 전투복으로 갈아있었다고 한다.
 
요좌(遼左)에 있으면서 한창 무더워서 땀을 흘렸으나 바꿔 입지 않았다. 가을이 되어 구멍이 뚫리고 헤지니 좌우에서 바꿔 입도록 청했다. 하지만 이세민은 “군사들의 옷이 대부분 헤졌는데 나 혼자 어찌 새 옷을 입을 수 있단 말인가”고 말했다. 이에 이르러 태자가 새 옷을 올리니 마침내 바꿔 입었다고 기록돼 있다.
 
당 태종 이세민이 안시성에 도착한 때가 한창 여름의 절정기인 음력 6월 20일이다. 그런 무더위 속에서 3개월 동안 전투를 치루면서 옷도 제대로 갈아입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는 무척 고전을 했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다. 실상은 고전이 아니라 아마 생사의 갈림길을 여러 번 오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더욱 가관인 것은 이어지는 기록이다.
 
포로로 잡은 고구려 백성 1만4000명을 군사들에게 노예로 주려했다가 그들의 부자와 부부가 헤어짐을 불쌍히 여긴 당 태종이 그들의 값을 매기게 하고는 대신 군사들에게 돈을 주어 풀려나게 하고는 백성으로 삼았다. 이에 환호하는 소리가 사흘 동안이나 쉬지 않았다.
 
어가가 유주(幽州)에 이르자 고구려 백성들이 영접하며 절하고 환호하는데 땅에서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여 먼지가 일어났다고 기록돼 있다. 이는 한마디로 지나가는 소가 웃을 기록이다.
 
당 태종 이세민이 요동정벌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오갔다는 중국사서의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전설이나 이야기로 많이 전해지고 있다. 몇 가지만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 산동성 칭다오시 즉묵시에 있는 마산 [사진=필자 제공]
 
지난 2003년 3월 16일자 칭다오신문에 나온 기사인 ‘마산전기(马山传奇)’에는 흥미로운 기록이 담겨있다. 기사에 따르면 청나라 만들어진 책인 마산지‘馬山志’와 즉묵‘卽墨’시의 향토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서기 643년인 정관 17년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군주를 살해하고 스스로 최고지위에 올라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산동성 즉묵 지방을 침범했다. 이에 당 태종이 친히 부대를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거쳐 래주(萊州)를 향해 오는 적을 격퇴하기 위해 나섰다.
 
당 태종은 마산의 서남쪽의 고개에 주둔했다. 10여기의 기병을 거느리고 달빛 아래 산에 올라 적 진영을 정탐했다. 그러다가 발각되어 연개소문이 직접 병사를 이끌고 단산(團山)에서 당 태종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당 태종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접한 용양장군 김걸(金杰)은 칼과 말을 준비해 단산(團山)에 올랐다.
 
빠른 말을 탄 김걸이 마산 앞 골짜기에 이르러 연개소문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다. 김걸이 화를 내며 산골짜기를 향해 크게 소리치니 마치 큰 우레가 터진 듯 했다. 연개소문이 골짜기에 구원병이 많을 것으로 보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여하튼 말고삐를 돌리게 되어 당 태종은 가까스로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어 근심어린 모습으로 도망가서 숨을 수가 있었다.
 
다음날 김걸의 작전이 뛰어나 손수 여러 번 적진을 베고나갔으며 40여리 이상 적을 추격했다. 몸에 여러 군데 상처를 입었음에도 나라를 위해 싸우다 마산 아래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후세 사람들은 김걸의 영웅적인 사적을 보고는 감회에 젖었으며 단산을 장군봉이라 불렀으며, 원대에 이르러 김걸은 충용왕(忠勇王)으로 책봉되었으며 사람들이 그를 기리게 됐다.
 
또한 당시 연개소문이 머물렀던 산골짜기를 대왕구(大王溝)라 불렀으며, 명․청대에 산위에 사당을 만들어 ‘대왕묘(大王廟)’라고 했다. 묘비에는 “김걸이 연개소문을 꾸짖은 곳”이라고 돼 있다. 당태종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정벌한 것은 ‘구당서’에도 나와 있다.
 
▲ 몽롱탑의 전설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강소성 염성시 주민[사진=필자 제공]
 
강소성 염성시 건호현 소재 몽롱탑(朦朧塔)은 16.7미터 높이에 8각형 누각형식으로 된 3층탑이다. 전설에 따르면 당 태종 이세민이 군대를 거느리고 염성 일대에 병사를 주둔시켰다. 달빛이 몽롱한 어느 늦은 밤 이세민이 단기필마로 적진을 정탐하기 위해 다가갔다가 조심하지 않아 늪에 이르게 됐다.
 
마침 순찰 중이던 적군에게 발각돼 연개소문이 말을 달려 칼을 휘두르며 쫓아오니 이세민은 황급히 말을 재촉하여 달아나다가 말이 길을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그만 늪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자 말에서 뛰어 내린 이세민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치다가 문득 마른 우물을 발견하고는 재빠르게 우물 속으로 뛰어들어 몸을 숨겼다.
 
추격하던 연개소문이 우물에 도착했을 때는 사람은 커녕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안에는 거미줄이 가지런하게 걸려있어 사람이 그 안에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어버린 연개소문은 말을 돌려 자기 군영으로 돌아갔다.
 
훗날 이세민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거미줄의 은공을 잊지 못해 우물이 있는 자리에 탑을 세웠다. 어둡고 어려움(蒙)에 처했을 때 우물 속의 거미줄이 자신을 보호해줘 목숨을 건진데서 ‘몽롱(朦朧)’이라는 단어가 생겨났으며 이 탑을 ‘몽롱보탑(朦朧寶塔)’이라 불렀다. 아울러 ‘정혜사’라는 큰 절도 세웠다. 현재 탑의 동북방에 세니하(洗泥河)가 있는데 당 태종이 말과 함께 늪에 빠졌다가 위험에서 벗어난 후 말을 씻었던 곳이라고 한다.
 
▲ 의용군연의와 거의 같은 내용의 경극 살사문 [사진=필자 제공]
 
요동성 해성역사소설 ‘의용군연의’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당 태종이 해성의 서남쪽에 이르렀을 때 연개소문은 10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당 태종을 잡으러 오고 있었다.
 
이세민이 당황해 말고삐를 당겨 달아나자 연개소문이 긴 창을 곧추 세우고 뒤에서 추격했다. 갑자기 말이 멈춰 서서 보니 앞에는 넓고 깊은 진흙강인 어니하(淤泥河)가 있었다.
 
당 태종은 이를 가볍게 여기며 “설마 당나라가 운세를 다해 나라를 바치고 고구려의 신하가 되겠는가”고 안이하게 생각했다. 연개소문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이세민이 말고삐를 당겨 달아나려는데 “저기 이세민이 있다.”라는 함성이 들리면서 말이 석자도 넘는 늪으로 빠져 발버둥을 칠수록 더욱 깊게 수렁 속으로 빠지게 되어 결국은 연개소문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연개소문이 “당왕 이세민아! 네가 항복한다면 내가 큰 상을 내리겠노라.”라고 하자 당 태종은 “당나라 땅은 넓고 물자가 풍부해 진귀한 보물이 황실에 가득가득한데 무슨 상을 준단 말이냐? 내 오늘 비록 지형을 몰라 추격당하다가 이곳까지 와서 진흙구덩이에 빠졌지만 백만의 당병을 거느리고 남김없이 쓸어버릴 것이다”고 말했다.
 
연개소문은 활과 화살을 잡고 당 태종을 정조준하고는 수하에게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고 명한 뒤 당 태종에게 “만약 항복문서를 쓰지 않는다면 넌 내 화살 한 방에 죽을 것이다”고 위협하니 당 태종은 항복문서를 앞에 놓고 통곡했다.
 
이 때 갑자기 노도벽력과 같은 함성과 함께 “신 설인귀가 구하러 왔으니 왕께서는 안심하소서. 연개소문 어디 있냐”고 하면서 흰 망토와 갑옷을 입고 손에는 긴 창을 든 젊은 장수가 산 위에서 말을 달려 나는 듯이 내려와 공격해서 연개소문의 10만 대군을 물리치니 혼비백산하여 멀리 도망쳤다.
 
설인귀는 긴 창으로 말의 배 밑을 푹 찔러 양 어깨로 힘을 써서 당 태종과 말을 진흙밭인 강 위로 끌어 올렸다. 당 태종은 기뻐하며 설인귀를 유격장군으로 삼고 훗날 안동도호부에 봉하고 요동을 다스리도록 했다는 이 이야기는 ‘어니하(淤泥河)에서 왕을 구한 설인귀’라는 고사에서 유래된 것이다.
 
‘의용군연의‘의 위 이야기는 근대에 일본이 요동지방을 침략했을 때 의용군으로 참전한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경극에 나오는 내용을 각색해서 들려준 이야기로, 당 태종은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에서도 하늘이 돕는 위대한 황제라는 사실과 고구려를 망하게 한 설인귀를 띄우기 위한 연의소설이다. 즉 경극용 대본의 내용이다.
 
도대체 왜 이런 전설이나 이야기가 1300년 이상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걸까. 만약 당 태종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항복하지 않았었더라면 이런 전설이나 연의나 이야기도 아예 없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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