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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 어디까지 하고 있나 90

대륙에 펼쳐진 삼국사 주인공에서도 왜곡 드러나

김유신(金庾信)·최치원·장보고는 반도사람 아니다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8-11-24 23:48:21

▲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우리나라 반도식민사관자들은 한반도에 있지도 않은 김유신
·장보고·최치원 등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모두 다 한반도에서 활동한 것 같이 일본이 왜곡한 역사를 그대로 가르친다.
 
이들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출생하였고 대륙에서 활동한 역사의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들을 추적해보면 모두가 대륙에서 나서 자랐고 대륙에서 성장하여 대륙에서 활동했으며 이들의 활동무대는 반도가 아닌 대륙이었다. 그럼에도 이를 밝히지 않는 식민사관자들은 한심하다.
 
백제와 고구려를 패망시킨 김유신(서기 595~673)에 대해 보더라도 사서(史書)에 기록된 김유신(金庾信)에 의해서 밝히지 않고 반도경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삼국유사삼국사기중국의 25사 동이등 어느 곳에서도 김유신이 반도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은 없다.
 
김유신이 반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그의 가계(家系;족보(族譜))의 기록상에도 반도인이 될 수 없고 또한 국가체계상으로도 반도인(半島人)이 될 수 없다. 김유신(金庾信)은 백제와 당()과의 전쟁터가 반도에 없고 전쟁을 한 곳의 지명이 모두 대륙이기 때문이다.
 
또한 김유신(金庾信)은 우리 민족의 문명사(文明史)에 의해서도 반도인(半島人)이 될 수 없다. 문명의 흐름만큼은 시작과 이동경로(移動經路)가 뚜렷한 것이기에 조작(造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까지 일본의 왜곡한 역사를 말하려는지! 이제는 왜곡된 역사를 접어야 한다.
 
중국과 일본이 묘()도 가묘(家廟)를 만들고 유물과 지명을 조작하고 이동하며 사서(史書)까지 조작, 변조(變造), 개서(改書)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정사(正史)를 부정하며 거짓 위서(僞書)로 전거(典據)하게 하여 역사를 왜곡하면 가능하리라 보나 역사의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다.
 
필자도 최태영 선생의 말한 것을 그대로 칼럼에 옮겨 주원장이 간도가 자기 땅이라 주장했다고 했는데 주원장이 세종대왕 연대가 아니고 세종 이전의 태종시대로 보고 있다. 사실 관계조차 확인을 안 한데서 오류가 나왔음에 이를 지적한데 시정을 한다.
 
하지만 전공을 들먹거리며 역사연구에 대한 자세부터 우선적으로 고민하셔야할 것 같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지금은 19세기와 달라 전공이 문제되는 시대가 아님을 알아줬으면 한다. 20세기 초 1905년에는 대학을 나오면 35년 그 지식이 유지되었다.
 
그런 말은 고대 지식이 150배 이상 팽배되기 이전시대는 타당하나 지금은 78일 만에 지식이 배가되는 세상인 것을 모르고하는 말이기에 전공이 문제가 되는 세상이 아님을 알았으면 한다.
왕 이름 하나 틀린 것에 독재정권시절 법을 이용해 곡학아세하며 많은 시민들을 괴롭힌 혹리와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하시는데 지금 곡학아세(曲學阿世)는 허구의 역사를 우리역사라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해주시기 바란다. 반도식민사관자들은 거의가 우리역사를 왜곡하고 변조한 거짓역사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학자라면 할 수 없는 작태이다.
 
오늘은 우리나라 삼국유사와 중국의 25사를 비롯하여 김유신(金庾信)의 계보(系譜)가 반도인이 아니고 대륙인이며 그 활동한 곳이 모두 대륙이며 사서(史書)의 기록으로도 반도인(半島人)이 아니고 대륙을 무대로 활동한 사실을 근거로 이를 밝히고자 한다.
 
사서(史書)는 말한다. 김유신은 대륙인이라고
 
사서에 김유신은 반도인이었다는 기록이 없다. 이로서 대륙에 뿌리를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서(史書)로 보는 김유신에 대한 것을 보면 삼국유사삼국사기, 중국25사 동이기록에 보면, 삼국유사(三國遺事)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동이(東夷)기록을 필두로 중국25사를 인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중국25사 동이기록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동이(東夷)기록에서 치우(蚩尤)의 배달국시대나 단군시대도 동이기록이고 삼국시대의 고구려·백제·신라·가야와 왜(();())도 동이의 기록으로 하고 있고 그 영역도 모두 서화(西華)의 동쪽에 우리 동이(東夷)가 같이 공통부분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서 동이(東夷)라 하면 상고시대나 고대에도 동이(東夷)가 다르지 않고 다 같다.
 
여기서 김유신(金庾信)에 관하여 살펴보면, 한반도인이 아니고 대륙의 서화(西華항성(項城덕안(德安무주(武州) 동쪽, 강회신라(江淮新羅)사람임이 사서(史書)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김유신전(金庾信傳)에는 그의 부()가 서현(舒玄인데 비()에는 도연(道衍)이고, 조부(祖父)는 무력(武力)이다. 그리고 증조부(曾祖父)는 구해(仇亥)이고, 12대 조부(祖父)가 수로왕(首露王)이며 헌원(軒轅)의 후예(後裔)이고 소호(小昊)씨의 자손이라 하였다.
 
헌원(軒轅)은 곡부수구(曲阜壽丘)에서 제후(諸侯) 소전의 아들로 태어나서 배달국 제14대자오지천황(慈烏支天黃)에게 반기를 들어 73회의 전투를 벌였으나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하북성(河北省) 탁록(涿鹿)을 거쳐서 지금은 장안중심의 시조로 모시고 있다. 그 능()이 섬서성에 있다.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는 헌원(軒轅)25() 중 하나이며 현효(玄囂)이 청양(靑陽)이고 청양(靑陽)이 소호(小昊)이다. 소호(小昊)는 강수(江水;양자강)에 살았다. 강수(江水)는 촉()지역에 있었다. 결국 김유신(金庾信)의 조상은 양자강 유역에 살았음이 분명하다. 반도가 아니다.
 
헌원(軒轅)과 소호씨(小昊氏)의 기록에서 헌원(軒轅)의 출생지가 산동성수구(山東省壽丘)라 분명히 하고 있다. 헌데 경주에 있는 묘()를 실묘(實墓)라고 주장하면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유신의 선조(先祖)중에서 양자강 지역에서 반도에 옮긴 기록이 있든지 아니면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묘를 반도에서 찾아내야 할 것이 아겠는가! 중국에서는 사서(史書)에 의해서 김유신선조의 묘들이 있고 반도에는 없음에서 김유신 가계가 반도로 옮길 수도 없는 것이다.
김유신이 반도에 있었다는 것은 허구이며 가상(假想)일 뿐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중국25사 동이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공통으로 김유신(金庾信)은 기자(箕子)가 살던 대륙 조선(朝鮮)이 망하고 그 후예국가(後裔國家)중 신라(新羅)에서 활약하던 사람이라고 분명히 하였다.
 
기자(箕子)에 대한 기록은 사기(史記)에서 대청일통지 (大淸一統志)까지 밝히고 있다. 김유신이 살던 곳은 하남성(河南省) 서화(西華)이고, 묘는 안휘성(安徽省) 몽성(蒙城)에 있는데 김유신은 서화(西華) 몽성(蒙城)지역에 있던 신라의 장군이지 반도의 김유신(金庾信)이 아니다.
 
중국의 사서(史書)들도 삼국지(三國志), 북사(北史), 양서(梁書), 신구당서(新舊唐書)에서 회계남월(會稽南越);담이(儋耳)에 있던 왜()와 강회지역(江淮地域)에 신라(新羅)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고, 북사(北史)는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서 광복하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김유신은 광복신라(강회신라(江淮新羅)의 장군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김유신의 백제와 전쟁터인 항성(項城독산(獨山동성(桐城잠산(岑山서화(西華)의 몽성(蒙城)이 남쪽에 있고, 백마하·황산·제성(諸城)이 북쪽에 있으며 당과의 전쟁터인 덕안(德安)이 서화 남쪽에 있다.
 
그리고 석성(石城석문(石門대방(帶方)도 서화(西華)의 북쪽에 있으며 김유신시대(金庾信時代)의 지명인 평원(平原대산(大山박성(薄城주류성(周留城)이 서화(西華)의 동쪽에 있으나 반도에는 내지성(奈祗城)이라는 기록이 있고 주위에 황산(黃山)이 있을 뿐이다.
 
사서(史書)에 의한 지명이 서화(西華), 몽성(蒙城)의 남북에 있다면, 사서(史書)에서의 김유신(金庾信)은 서화(西華), 항성(項城)동 쪽의 강회지역 신라인으로 김유신(金庾信)도 서화(西華)동쪽의 대륙의 장수(將帥)이지 반도 김유신이 아니다. 그는 반도가 아닌 대륙에 활동한 장수이다.
 
김유신 시대 지명(地名)과 문명(文明)이 말해줘
 
대륙의 서화, 항성의 동쪽에는 우리나라의 역사인물들과 그 지명들은 우리가 대륙의 역사사실을 말해준다. 우리나라 역사는 지금 상고시대는 아예 외면한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말이 아니다. 필자는 독립기념관을 식민지기념관이라 하였는데 지난 1028일 중앙박물관에 가서 역사진열을 보고 이 박물관도 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문턱을 못 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어찌 그리도 반도 안에 역사를 가두려고 하는 반도식민사관의 악령(惡靈)이 온 박물관을 뒤엎고 있어서 말이 아니었다. 그 어느 것도 대륙의 찬란한 우리역사를 모두 지우고 있었기에 서다.
 
상고시대부터 고대, 우리가 지배한 대륙(大陸)역사는 어디에도 찾지 못하게 숨겨있었는데, 과연 우리가 반도의 역사인가. 그러면 우리선조들의 저 광활한 대륙을 지배한 역사는 어디 갔다는 것인가! 오늘 까지도 역사를 왜곡하는 학노(學奴)들을 보노라면 너무나 기가 찰뿐이다.
 
우리 선조들이 묻혀 있는 저 대륙은 문자가 나오기 이전부터 전해오는 상고시대의 역사를 말해주는 세년가(世年歌)와 치우(蚩尤)며 헌원(軒轅)이며 고대와 삼국시대가 과연 반도에 있었는가! 있지도 않은 역사만을 추구하는 이들의 현실에 안주하는 그 들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힘들다.
 
역사시대 치우(蚩尤), 헌원(軒轅) 우리선조들의 활동무대가 펼쳐진 곳이 대륙이 아니던가! 치우, 헌원의 출생이 대륙이고 그 무덤이 대륙에 있는 것은 무엇이며 지금 신라를 논하며 김유신(金庾信) 이후 장보고 정년(鄭年)의 사지연수(泗之漣水), 청해(淸海), 진해(鎭海)가 여기 있다.
 
강서성, 덕안(德安)의 서쪽에 장보고(張保皐)시대의 무녕(武寧), 남쪽에 무주(撫州;武州;임천(臨川) 있다. 서화(西華)가 주()와 조선의 경계였다면, 남쪽의 항성(項城)은 당()과 강회신라(江淮新羅;西新羅)의 교역항(交易港)이었는데 이곳을 주관하는 장수가 장보고(張保皐)였다.
 
그리고 당시 문명(文明)도 우리가 앞서 있었다. 한 예로 신라 범민왕(法敏王)이 서기 665, ()의 사신(使臣)에게 금()과 비단()을 주었고, 669년 당승(唐僧) 법안이 당제(唐帝)의 명을 받아 자석(磁石)을 구하니 신라(新羅)에서 두 상자(箱子)를 주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당()은 신라 활이 좋음을 알고 신라 활(쇠뇌) 기술자를 보내달라고 하여 기술자 구진천(仇珍川)이 당에 갔지만 신라의 활(쇠뇌) 비밀을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그들에게 전수하지 않았다. 우리 산업의 첨단기술을 돈에 팔려 중국에 파는 우리 기술자와는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우리는 비단은 중국의 것이 좋다고 하고, 나침반(羅針盤)은 송()제품이라고 하였으며 목화는 1367년 문익점(文益漸)이 들여왔다고 하고 있는데 우리는 삼국시대 이미 갖고 있었다. 우리 역사교제는 말도 안 되게 잘못 알고 있다.
 
삼국지에서 예(), ()에서 양잠과 목화를 사용하였고 후한에서 예()에서 기자 때부터 양잠(養蠶)을 마한(馬韓)에서, 목화를 사용하였다고 기록 하고 있다. 삼국사기중국25동이(東夷)기록에서 목화사용은 마한(馬韓)시대와 신라(新羅)시대부터이고 비단은 기자부터라 했다.
 
이 당시 당()은 우리보다 문명이 뒤져 있었다. 672년에는 침()도 당()에 보내주었다. 이 같이 신라는 비단과 자석과 활(쇠뇌), ()까지도 우리가 당에 앞섰음을 기록 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진실 왜곡 말라!
 
필자가 어렸을 때 비단이 왕서방(王書房)’ 노래를 들으며 비단은 중국이 좋은 줄 알았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중국 최고의 비단은 저(), 양읍(襄邑)에서 생산된 비단이 최고품이라고 했는데, ()는 서화(西華)의 동쪽에 있다. 이곳은 당시 신라(新羅)가 있었다. 그래서 신라금(Silla-Keum; Silla-Silk)라 한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자석(磁石)과 침()이 만들어 당()에도 보내 줬는데 이것이 신라침반(新羅針盤) , 나침반(羅針盤)이다. 중국은 송()때 서화(西華) 동쪽의 자()에서 생산 되었다고 말하나 자()는 항성(項城)과 석성(石城), 석문(石門), 동명(東明), 진평이군(晉平二群)사이에 있다.
 
석성(石城), 석문(石門), 항성(項城)은 신라 땅이고, 동명(東明)과 진평이군(晉平二群)은 백제 땅이니 나침반(羅針盤)을 생산한 강회신라(江淮新羅;西新羅)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활(쇠뇌)는 대륙 남부에서 생산 한 것이라 하였는데 남월(南越 ; 담이(儋耳)이 진번군(眞番郡)이었으니 서화(西華) 동쪽의 강회신라(江淮新羅)에서 생산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 여러 가지를 부정한다면 김유신(金庾信)도 부정해야 되는 것이다. 김유신(金庾信), 장보고(張保皐)도 서화(西華) 동쪽에서 활동하던 우리민족 서신라(江淮新羅)의 인물인 것이지 반도에 묘()를 만들었다하여 민족전체를 부정 할 수도 숨겨서도 아니 되는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사서(史書)에 의해서 김유신을 밝힌다면, 족보상, 동이민족체계상, 전쟁터 지명상, 특산물생산지에 의해서 서화동쪽의 강회(江淮)에 신라가 있고, 그 신라에서 활동한 김유신을 부인 할 수없는 것이다. 그런데 반도식민사관자들은 대륙의 우리역사 부인하려한다.
 
한편 반도의 공주(公州)를 웅진(熊津)이라 하고, 부여를 사비성(泗泌城)이라 하고 있지만 사서에서 밝혀진 것이 아니다. 또한 유적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첫째, 부여(夫餘)에 있는 부소산성(扶蘇山城)이라는 곳에서 내지성(奈祗城)이라는 유적이 발굴되어 있는데 이 것은 이지역이 사비성(泗泌城)도 부소산성(扶蘇山城)도 아닌 내지성(奈祗城)이기 때문이 아닌가!
 
둘째, 익산미륵사를 창건(創建)한 사람이 백제(百濟) 무강왕(武康王)이라 하고 있는데 삼국유사에서는 과부(寡婦)의 아들이라고 하고, 삼국지(三國志)에서는 스스로 왕이라 하였다. 유의 할 점은 정통의 계승한 왕은 과부의 아들이라는 말도 스스로 왕이라는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시조(始祖)나 총독(總督)?일 때만 가능하다. 만약 시조(始祖)라면 반도에는 두 개의 백제가 존재해야 하며 총독일 때는 공주(公州)와 익산(益山)에 본 백제와 총독부가 존재해야 하니 이 또한 타당성이 없다. 따라서 반도에 백제가 있다는 것 보다 총독부(總督府)로 볼 수밖에 없다.
 
셋째, 공주(公州)가 웅진(熊津)이 되려면 주위에 삼국유사, 삼국사기, 중국25사에 의한 지명이 있어야 한다. 의자왕시대 지명인 평원(平原), 항성, 황산, 무산(茂山), 동성(桐城), 잠산(岑山), 독산, 동명, 덕안, 백마하(白馬河), 박성(薄城), 제성(諸城), 대산(大山)이 있어야 하는데, 공주주위에 황산밖에 없다. 그러나 대산(大山)웅진동쪽 대산 즉 산동성태산(太山)주위에는 다 있다.
 
대산의 서쪽에 계백장군이 전사한 황산이 있고 그 주위를 보면, 북쪽에는 평원(平原), 청하(淸河)가 있고, 동쪽에는 대산(大山), 박성(薄城), 제성, 역성(力城), (), (), ()가 있다.
 
남쪽에는 백마하(白馬河), 사비하(泗泌河), 항성(項城), 동성(桐城), 잠산(岑山), 독산(獨山), 덕안(德安)이 있으며, 서쪽에는 동명(東明), 진평이군(晉平二群)이 있다. 따라서 사서(史書)에 의한 웅진(熊津)은 결코 반도의 공주(公州)로 옮길 수 없는 것이다. (이상은 吳在成,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124~130 九犂系, ‘新羅史’,‘百濟本紀.’ ‘百濟中國에 있었다.’參照 引用).
 
글을 맺으며
 
지금까지 신라와 백제가 건국한 곳이 한반도가 아니며 대륙에서 건국하여 발전시킨 것과 신라(新羅)의 역사인물들과 비단과 목화도, 고려시대가 아니고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이미 우리가 만들었고, ()과 나침반(羅針盤)도 대륙에 전하였으며 당()에게도 준 사실들을 살펴봤다.
 
그리고 백제의 공주(公州)와 웅진(熊津)도 대륙에 있는 것으로 반도의 공주(公州), 웅진(熊津)이 백제의 수도가 될 수 없음도 지적 하였다. 신라도 서라벌(徐羅伐)의 신라보다 먼저 대륙에 강회신라(江淮新羅;西新羅)가 있음도 밝혔다. 그리고 삼국시대의 역사가 왜곡됨을 지적하였다.
 
문제는 역사위조는 유적과 유물, 족보는 후예들의 손으로 위조 할 수 있어도, 문화사(文化史)만큼은 위조가 거의 불가능 하다고 볼 수 있다. (;비단), (綿;목화), 자석(磁石)과 침(;나침반(羅針盤), (;쇠뇌)도 앞서서 이를 당()에서도 배우려 하였고 신라도 서화(西華)동쪽의 서신라(西新羅)와 고구려에서 독립한 반도의 동신라가 서라벌(徐羅伐)에 있음도 살펴봤다.
 
중국의 절강통지(浙江通志) ()9 산천초에는 신라초 건너편 저장성 연안에 신라지명(新羅地名)이 줄줄이 분포했다. 지난주에 신라수도 대륙에 있었음을 밝혔다. 신라는 하나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사서(史書)삼국사기(三國史記)에만이 신라(新羅)2개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東夷歷史 ’. (右犂)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九犂系, 新羅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日本史’.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김동락, ‘천부경과 문디, 거시기’. 황순종,‘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이강민,‘대한국고대사’.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李進熙’ ‘好太王碑’. ‘石井進外3,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 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歷史’. 石井進外3, ‘詳說日本史,. 文定昌, ’韓國史延長-, ‘古代日本史’. 秋山謙藏, ‘日本歷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べる日本史’. 杉山徹宗, ‘眞實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歷史.,. 李民樹,'朝鮮傳‘.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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