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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의 용(龍)’으로 부상한 한국
“요즘 대학 패션학과 학생들의 꿈이 뭔지 압니까? 명품을 수입해다 파는 머천다이저(MD)가 되고 싶어해요. 디자이너가 되어 국내 브랜드를 키워보겠다는 학생을 찾기가 힘들어요. 애들 탓이 아닙니다, 국내 현실을 보세요. 대기업이 뭐하고 다니는지”
최근 만난 한 중견 디자이너의 푸념이다. 그는 “돈 있는 재벌이 왜 글로벌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안 하고 외국 명품의 수입경쟁을 벌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지난달 7일 프랑스 르 피가로 신문은 ‘명품의 용으로 대두한 한국’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이 세계 명품의 새로운 시장으로 부상하면서 유명브랜드들이 몰려들고 있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서울이 상하이와 홍콩을 앞지르면서 도쿄에 이어 아시아의 두 번째 명품도시가 되었다”면서 “한국의 명품시장 규모는 45억달러로 세계 시장의 4%를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 방한한 이브 카셀 루이비통 회장도 “한국은 루이비통의 매출규모로 보면 세계 4위에 해당하는 매우 중요한 시장”이라고 했다.
재벌닷컴이 국내에 들어온 외국 명품업체중 매출액 상위 15곳의 재무제표를 분석한 결과, 이들 기업의 작년 매출은 3조8727억원으로 2005년과 비교해 평균 2.7배 늘었다. 같은 기간 평균 순이익은 662억원에서 2364억원으로 3.6배 증가했다.
그런데도 외국 명품업체들은 국내 대형 유통업체를 휘젓고 다니면서 ‘수퍼 갑(甲)’의 행세를 하고 있다.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명품시장의 용이 아니라 ‘봉’이다”라고 했다.
실제로 외국 명품업체는 국내에서 벌어들인 돈의 대부분을 해외 모회사로 송금한 반면, 지난 6년간 국내에 쓴 기부금은 23억7000만원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명품시장의 빅 바이어(Big Buyer)로 떠오른 우리나라의 유통업체들은 왜 외국 명품업체로부터 대접도 받지 못하고 질질 끌려만 다닐까?
업계에선 그 배경 중의 하나로 지나친 수입경쟁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명품의 수입경쟁은 재벌가 딸들이 주도하고 있다.
▲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신세계그룹 이명희 회장의 딸 정유경 부사장,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장녀 신영자 사장 등이 바로 그들이다.
글로벌 승부로 번진 면세점, ‘딸들의 전쟁’
국내 면세점 시장은 점유율 55.7%로 절대 강자인 롯데면세점을 신라면세점이 바짝 추격하며 양강 구도로 변모 중이다.
신라와 롯데의 불꽃 튀는 면세점 라이벌전은 글로벌 승부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나란히 홍콩국제공항 면세점 입찰에 참여할 방침이어서 2년간 벌여온 면세점 경쟁이 정점을 찍을 것으로 보인다.
그간의 전적은 ‘1승 1패 1무’로 판가름됐다.
▲ 신세계그룹 이명희 회장의 딸 정유경 부사장
갈등의 시발점은 2009년 롯데의 AK면세점 인수였다.
롯데의 통합 운영에 대해 인천국제공항의 면세점 영업을 막아 달라고 신라가 법원에 가처분신청을 제출해 제동을 걸었다.
동일인 중복 낙찰 및 복수사업권 취득을 허락해선 안 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2010년 8월, 신라의 가처분신청은 기각됐다.
이로써 롯데는 인천공항에서 주류와 담배를 포함한 전 품목을 유일하게 판매하는 업체로 컸다.
하지만 싸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엔 롯데가 반기를 들었다.
▲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장녀 신영자 사장
인천공항공사를 상대로 지난 1월, 호텔신라와 루이비통의 매장 임대계약을 체결하지 못하도록 가처분신청을 제기한 것이다.
수의계약에 의한 입찰인데다 공사가 루이비통에 특혜를 부여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이번엔 롯데의 패배였다.
‘재벌가 딸들의 전쟁’으로 불렸던 루이비통 유치전에서 부동의 1위 면세점인 롯데는 법원의 기각 결정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지난 3월에도 두 면세점은 김포공항 사업권을 놓고 승부를 벌였다. 결과는 무승부로 끝났다.
신라가 A 사업권(화장품·향수)을 롯데는 B 사업권(주류·담배)을 나눠 가졌다.
정확히는 수익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A 사업권의 미세한 우위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다가올 홍콩공항 입점 대결은 신라면세점의 연승이냐, 롯데면세점의 설욕이냐에 관심이 모아진다.
세계 5위권인 홍콩공항 면세점은 작년 매출이 5500억원에 달해 외형을 부쩍 키울 수 있는 먹잇감이다.
롯데는 홍콩에 입성하면 현재 6위권인 글로벌 순위가 2018년 3위권까지 오를 것으로 기대한다. 신라 입장에선 첫 해외진출로 롯데를 끌어내릴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된다.
현재 이부진 사장은 호텔신라와 신라면세점 사업을 지휘하면서 희귀한 명품브랜드를 대거 유치하는 등 명품사업에 힘을 쏟고 있다.
이탈리아 여성 의류 브랜드 ‘피아자 셈피오네’, 이탈리아 최고급 가죽 브랜드 ‘발렉스트라’, 이세이미야케의 최고급 브랜드 ‘하트(HAAT)’ 등을 신라호텔 아케이드에 들여왔다. 이 사장은 매장 배치부터 입점시킬 브랜드까지 꼼꼼히 챙긴다고 한다.
정유경 부사장 또한 신세계의 자회사 신세계인터내셔날을 통해 아르마니, 돌체&가바나, 코치, 센존 등의 해외명품을 들여왔다.
롯데쇼핑 신영자 사장은 AK면세점을 인수하는 등 해외명품 브랜드 유치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강남구 청담동 일대 ‘명품 개장 경쟁’ 혼탁
이뿐이 아니다. 이들 기업들은 서울 강남구 청담동 일대 부동산을 집중적으로 사들여 명품점 개장 경쟁까지 벌이고 있다.
신세계는 정유경 부사장 주도로 청담동 노른자위에 10여개의 건물을 확보해 엠포리오 아르마니 등 명품숍을 잇따라 열었다.
신세계는 1999년 다양한 브랜드를 개별 구입해 점포를 꾸며놓은 편집매장인 ‘분더샵’을 열어 청담동으로 여성들을 끌어들였다.
후발주자인 제일모직은 2008년 편집매장 ‘텐코르소코모’를 오픈해 ‘청담동 명품 전쟁’을 촉발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청담동 텐코르소코모는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본점보다 더 화려하게 꾸며졌다고 패션 관계자들은 전했다.
이처럼 대기업이 나서서 ‘수입 잡화점’ 경쟁을 벌이는 일은 외국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이다. 삼성과 롯데측도 청담동 일대 건물을 차례차례 매입해 명품 매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덕분에 청담동 일대 땅값은 최근 1년 사이 두 배가 되었고, 덩달아 임대료까지 오르면서 주변 식당과 술집 등 상인들이 경제적 피해를 보고 있다. 명품 전쟁의 유탄(流彈)을 토종 상인들이 맞고 있는 셈이다.
재벌가 자녀의 명품수입과 유통사업을 바라보는 전문가들의 시선은 어떨까? 결코 곱지 않다.
김진방 인하대 경제학부 교수는 “관심과 재능이 있어 개인자금으로 사업한다면 모를까, 재벌 자녀들은 계열사의 풍부한 자금과 인력을 동원해 손쉬운 이윤추구에 나서고 있다”며 “수입·유통보다는 자체브랜드 확보 등 도전적이고 보다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사업으로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도 “재벌 2·3세는 어릴 때부터 좋은 것 쓰고 꾸미는 쪽으로 사회화가 되어 제조업보다는 사치산업 분야에 더 익숙한 게 사실”이라면서 “그럴수록 국내 화장품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른 것처럼 사치품 수입보다는 국내브랜드의 명품화에 더 많은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물론 재벌가 자녀 중에도 패션 분야에서 자기 브랜드를 명품으로 키우려 하는 딸들도 있다. 고 김수근 대성그룹 회장의 막내딸인 김성주(55) 성주그룹 회장은 2005년 독일 명품 브랜드 MCM을 인수해 현재 중국 등 해외공략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은 명품 수입을 주도한 측면도 있지만, 요즘에는 빈폴과 갤럭시 등 토종브랜드로 무장한 제일모직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려는 노력이 평가를 받고 있다.
인천공항 루이뷔통 매장, 국정감사 도마 위에
지난 9월 10일, 전 세계 공항중 최초로 인천국제공항에 명품이라고 불리는 ‘루이뷔통’ 브랜드가 호텔신라면세점 내에 개점했다.
▲ 왼쪽부터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브 까셀 루이뷔통 회장, 이채욱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 장 밥티스트 드뱅 루이뷔통 아시아태평양 사장
호텔 신라(사장 이부진)가 ‘재벌가 딸들의 전쟁’으로 불릴 정도로 치열한 유치전을 벌인 끝에 롯데면세점을 제치고 운영권을 따내면서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말도 많았던 인천공항의 루이뷔통 매장이 29일 국토해양위 국정감사의 도마 위에 올랐다.
▲ 민주당 백재현 의원
민주당 백재현 의원(경기 광명갑)은 “이번 루이뷔통 매장 입점 과정에서 공항공사의 호텔 신라와 루이뷔통 봐주기가 도를 넘어섰다”고 일갈했다.
이어 백 의원은 “공항공사가 여객편의 저하와 공항운영 지장을 이유로 공기를 줄여줄 것을 요구했지만 호텔신라의 답변은 ‘루이뷔통과 협의했지만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면서 “결국 공항공사의 소극적 대응으로 공기는 6개월 가까이 소요되었고, 승객들은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고 꼬집었다.
그는 또 “루이뷔통 매장이 들어서면서 원래 근처에 위치했던 기존 면세품 인도장과 서점, 식음료 매장도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며 “이는 공사의 호텔신라(루이뷔통) 봐주기” 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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