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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수의 新삼국사 산책

김해 대성동고분 조성 집단 추적해 보니

대륙 서부여 출신의 부여백제 목씨 집단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2-03-02 09:30:31

 
▲ 정재수 역사 작가
 김해 대성동고분은 경상남도 김해시 중심부에 위치해 북에서 남으로 L자형으로 길게 휘어진 해발 22.6m의 낮은 구릉에 분포한 금관가야 지배층의 무덤 떼이다. 조성 시기는 대략 서기 2세기~6세기이다. 
 
무덤양식은 가장 이른 시기의 구릉 하단부에 조성된 널무덤(목관묘)을 시작으로 점차 구릉 위쪽으로 올라가며 덧널무덤(목곽묘)이 들어서 있고, 이어 구릉 정상부에는 가장 늦은 시기에 조성된 으뜸덧널(주곽)과 딸린덧널(부곽)의 주부곽식덧널무덤(목곽묘)가 분포해 있다.
 
김해 대성동과 북표 라마동 고분 조성세력의 동질성
 
특히 가장 늦은 시기의 주부곽식덧널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가히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동복(청동솥)을 비롯한 철제 무기류, 비늘갑옷(찰갑) 등의 갑옷류, 말띠드리개 등의 마구류가 출토됐다. 모두 북방계 유물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김해 대성동고분의 북방계 유물이 서북쪽으로 수천㎞ 떨어진 중국 요녕성 북표의 라마동고분에서도 확인됐다는 점이다. 마치 하나의 주물에서 뽑아 낸 것처럼 재질과 모양이 똑같다. 무덤양식 또한 대성동고분과 같은 주부곽식덧널무덤이다. 적어도 대성동고분과 라마동고분은 출토유물과 무덤양식에 있어 고고학적으로 동일하다.
 
2004년 중국이 발굴한 라마동고분은 발굴 전까지만 하더라도 북방민족 모용선비의 삼연(전연·후연·북연) 문화를 대표하는 고분군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막상 발굴해보니 삼연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부여 무덤으로 확인됐다.
 
 
▲ 김해 대성동고분 전경. [사진=필자 제공]
 
라마동고분 조성 집단은 서부여의 녹산(백랑산-하북성 건창)세력이다. 위구태를 시조로 하는 서부여는 대방세력과 녹산세력으로 분리되는데, 녹산세력이 바로 라마동고분의 주인공들이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서부여 녹산세력은 서기 346년 전연 모용황의 공격을 받아 여현(餘玄)왕과 5만 부여인이 전연으로 끌려가며 멸망했다. 이들 서부여 망명객은 전연의 업성(북표 인근) 주변에 정착하며 이후 자연스레 라마동고분을 조성한다.
  
그렇다면 라마동고분의 서부여 녹산세력은 어떻게 해서 한반도의 가장 끝자락인 김해까지 내려오게 됐을까?
 
김해 대성동고분 조성세력은 목라근자 집단
 
실마리는 『일본서기』 369년의 ‘목라근자(신공왕후)의 삼한정벌’에서 찾을 수 있다. 목라근자는 가라7국의 동한(경남 남해안), 신미마한의 침미다례(전남), 마한비리의 현남(전북)을 전광석화로 평정·도륙해 항복을 받고 이 지역 전체를 부여백제에 편입했다. 당시 목라근자 군대는 가장 첨단화된 철갑기마병이었다.
 
『일본서기』<신공왕후기>에 삼한정벌 이후 목라근자의 행적이 나온다. ‘62년(382년) 신라가 조공하지 않았다. 이 해에 습진언(襲津彦·소츠히코)을 보내 신라를 쳤다.(「百濟記」에 이르길, 임오년에 신라가 귀국을 받들지 않아 사지비궤(沙至比跪·소츠히코)를 보내 토벌케 했는데 신라인은 미녀 두 사람을 단장시켜 나루에서 맞아 유혹하게 했다. 사지비궤는 그 미녀를 받아들이고 오히려 가라국을 쳤다. 가라국왕 기본한기(己本旱岐)와 아들 백구지(百久至), 아수지(阿首至), 국사리(國沙利), 이라마주(伊羅麻酒), 이문지(爾汶至) 등이 그 인민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해 오니 백제는 후대했다. 가라국왕의 누이 기전지(旣殿至)가 대왜로 가서 “천황이 사지비궤를 보내 신라를 토벌하게 했는데 신라 미녀를 받아들이고 (왕명을) 저버리고 토벌치 않고 오히려 우리나라를 멸망시켜 형제와 인민들이 모두 떨어지게 되니 걱정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어 와서 아룁니다”라 했다. 천황이 크게 노해 목라근자(木羅斤資)를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가라에 모여 그 사직을 복구시켰다고 한다).’(원문 생략)
 
시기는 서기 382년(섭정62년)이다. 목라근자는 사지비궤가 무너뜨린 가라(금관가야)에 파견돼 가라(금관가야)의 사직을 복구했다. 가라의 무너진 사직은 이시품(伊尸品·6대)왕이며, 목라근자가 복구한 사직은 좌지(座知·7대)왕이다. 이때 목라근자 군대는 부여백제(충남공주)로 환국하지 않고 아예 복구한 가라에 정착했다. 『일본서기』<응신기>에는 백제 구이신왕 시기 국정을 농단한 목만치(木滿致)가 나오는데, 목만치는 목라근자가 신라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여 낳은 아들로 적고 있다. 이는 목라근자가 가라에 정착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 김해 대성동고분 전경 북표 라마동 고분의 출토유물 비교. [사진=필자 제공]
     
또한 훗날 목라근자 후손 일부는 일본 야마토에 귀화해 소아(蘇我·소가)씨의 성을 하사받으며 이후 6대에 걸쳐 일본 정계를 쥐락펴락한다. 이때 선조 목라근자 이름은 소아석천(蘇我石川)으로 변경해 소급 적용했다. 『일본서기』에 소아석천(목라근자)의 고향이 나온다. 백제 대목악(大木岳)이다. 지금의 충남 천안시 목천으로 한반도 목씨의 발원지이다.
 
목라근자의 출자는 서부여 녹산세력
 
그렇다면 목라근자 집단은 한반도 토착세력일까? 과거 충남 천안의 마한 목지국과 연계해 목씨를 목지국의 수장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목라근자의 철갑 기마병은 결코 한반도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특히 충남 일대에서는 고고학적으로 철갑 기마병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목라근자 집단의 출자는 서부여 녹산(하북성 건창)세력이다. 346년 서부여 여현(餘玄)왕이 전연(모용선비) 모용황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자 목라근자 집단은 여현왕을 따르지 않고 한반도로 망명하여 충남 천안의 대목악(목천)에 안착한다. 그래서 목라근자는 대목악(목천) 출신이 되며 라마동고분에서 출토된 철갑기마병의 무장집단이 된다. 목라근자 집단이 한반도를 선택한 이유는 전적으로 서부여 대방(하북성 노룡)세력 때문이다. 대방세력은 목라근자보다 앞서 4세기 초엽(316년) 한반도로 백가제해하여 거발성(충남공주)을 수도로 삼고 부여백제를 건국한다. 『진서』에 나오는 동진(東晉)으로부터 ‘진동장군’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와 여휘(餘暉)는 부여백제(대방세력)의 왕과 왕세자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서부여 출신인 목라근자 집단은 346년 서부여(녹산세력)이 멸망하자 한반도로 망명하여 부여백제(대방세력)에 안착한 후, 369년 부여백제의 한반도 삼한정벌을 단행하고, 이어 382년 가라(금관가야)의 사직을 복구하며 김해에 최종 정착한다. 특히 대성동고분에서는 왜계 유물인 파형동기, 통형동기 등도 출토한다. 훗날 일본 소아(蘇我-소가)씨 가문을 일군 목라근자 후손과의 친연성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 부여기마족(서부여)의 분화 과정. [표=필자 제공]
 
김해 대성동고분은 부여백제의 삼한정벌을 단행하고 금관가야의 무너진 사직을 복원한 철갑기마군의 상징인 목라근자와 그의 후손의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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