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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안토니 디쉴드의 한국영국 두 나라 이야기
여왕과 작별인사 위해 12시간 밤샘 도보 행렬에 서다
침묵 속에 수많은 발걸음 소리만 울리던 순례의 길
“오로지 여왕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에...”
이진 필진페이지 + 입력 2022-09-26 14:40:54
 
▲ 이진·안토니 디쉴드 작가·화가
지하철 역사를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검은 옷의 물결
 
17일 토요일 오후 웨스트민스터 홀에 안치된 여왕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는 일념으로, 그러나 허탕 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우리 부부는 스코틀랜드 집을 떠나 런던으로 향했다. 런던에서 지하철을 타고 명탐정 셜럭 홈즈로 유명한 베이커 스트리트를 지나서 본드 스트리트, 그린 파크, 웨스트민스터, 워털루, 써덕을 지나 벌먼지 역에서 내렸다. 한 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고 오는 동안 오로지 써덕 공원으로 가 줄을 서야 한다는 생각에 몰두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도 같은 목적으로 여행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벌먼지 역에서 사람들이 죄다 내리는 것이 아닌가. 지하철은 거의 텅 빈 채 역을 떠났고 대신 벌먼지 역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썰물처럼 역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거리는 이미 어둠이 내려 가로등에 의존하여 보도를 겨우 분간할 수 있었으나 초행길을 찾아가는 두려움을 느낄 여지가 없었다. 많은 이들이 침묵 속에 꼬리를 물고 걸어가고 있었으니 그들만 따라가면 되는 것이었다. 마치 사람들이 똑같은 내용의 비밀 메시지를 받고 같은 집합장소로 모여들고 있는 것 같았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무거운 발걸음 소리에 동참하여 숲으로 들어서니 이제 집합장소에 가까워지는 듯 느껴졌다. 일정한 간격으로 나타나는 보안대원들의 “계속 가시면 됩니다”하는 안내 소리가 검은 침묵의 행렬을 북돋아줬다.
 
손목 띠를 차고 탬즈의 일곱 개 다리를 지나는 밤샘 행렬
 
공원 집합장소에 들어서자 눈부시게 쏘아대는 스포트라이트 속에 드러나는 광경이 경이감을 자아냈다. 공원 내부는 지그재그 형식으로 5킬로미터 길이의 보도가 겹겹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고 겹겹이 줄을 선 인파가 묵묵히 전진하고 있었다. 어린 자녀들과 함께 온 젊은 부부, 지팡이를 짚은 노인, 청소년, 외국인들 등 모두가 도시락과 겉옷을 꾸려 짊어지고 애도행렬에 나선 모습은 하나같이 경건해 보였다. 한 시간 반가량을 걸어가자 마침내 안내요원이 손목 띠를 나눠줬다. 말하자면 여왕이 안치된 웨스트민스터 홀 입장권이었다. 행렬을 따라 공원을 나서자 싸늘한 밤공기가 맺혔던 땀을 식혀주는 가운데 휠체어를 탄 애도객들도 따로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구세군, 보이스카웃 등 봉사단체들이 마련한 차 한잔과 시민들이 집에서 만든 과자와 컵케익에서 따스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마지막 경의를 표하기 위해 밤을 새워 줄을 서서 마침내 새벽에 웨스트민스터 홀 앞에 다다른 참배객들. [사진제공=필자]
  
런던의 남쪽 거리를 지나오니 자정이 넘었다. 이른 새벽의 템즈 강변에 들어서니 강바람이 제법 쌀쌀해 내복을 입지 않은 것이 후회됐다. 날씨가 흐려 별들은 보이지 않았으나 반달은 나와 건물들을 밝힌 색색의 불빛과 함께 캄캄한 런던 풍경을 장식하고 있었다. 멈춤과 전진을 거듭 반복하기를 거의 5시간 동안 이어가던 중 밀레니엄 브릿지를 지나왔는데 행렬이 멈춰섰다. 새벽 3시가 다 되어서였다. 거의 2시간 동안 멈춰 서있는 동안 어린이들과 많은 이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해 보았지만 차가운 새벽공기에 몸을 떨어야 했다. 한편에서는 앞뒤 행렬에 있던 사람들과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며 얼어붙어 아픈 다리의 고통을 달래고 있었다. 그러나 육체적인 한계를 극복하게 한 힘은 다른 무엇보다도 가슴에 담고 있던 일심이었을 것이다. 알고 보니 여기 참석한 이들이 한가지로 이 행렬에 참석했던 이유는 단순히 “마지막으로 여왕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성공할 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 이 행렬에 참여한 것만으로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람버쓰 다리를 건너 여왕이 안치된 웨스트민스터 홀에 입장
 
참배를 위해 줄을 선 사람들에게 안내원이 손목밴드를 나눠줬다. [사진제공=필자]
  
이윽고 4시30분경 멈춰섰던 애도객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람버쓰 다리로 가는 길에는 안보요원들이 반갑게 “굿모닝, 이제 다 와 갑니다” 하며 피곤한 행렬에 힘을 북돋아 주었고 봉사단들이 음료수와 빵과 과자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여기부터 안치소까지 예상시간은 4, 5시간 걸릴 것이었다. 애도객들은 지칠 대로 지쳐 기회가 닿는 대로 담에 기대어 피곤을 달랬다. 드디어 빅토리아 타워 가든에 들어서니 촘촘한 지그재그 보도가 설치되어있었고 빽빽하게 걸어가는 행렬의 머리 너머로 웨스트민스터 홀이 보였다. 안내문은 홀 입장까지 2시간 걸린다 했다. 가든에 들어선 사람들은 모두 눈이 충혈되어 있었고 어린이들은 여기저기서 자리에 주저앉아 아픈 다리를 쉬기도 했다. 행렬을 꾸준히 뒤따라 갔으나 눈앞에 보이던 안치소 건물은 아직도 저 멀리 있었고 지그재그 행렬은 영원히 줄어들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침내 가든을 빠져 나와 보안검색대를 거쳐 웨스트민스터 홀 앞에 이르렀다. 
 
홀에 입장하니 높은 단 위에 안치된 여왕의 관이 보인다. 줄을 따라 들어가서 잠시 묵념으로 여왕께 마지막 경의를 표했다. 써덕 공원에서 웨스트민스터 홀까지 장장 12시간에 걸친 기다림의 밤샘 행렬 여정이 끝났다. 한 시대를 마무리하는 역사의 현장에 동참했다는 뿌듯함과 여왕을 보내야한다는 아쉬움과 슬픔이 복합적으로 마음에 밀려왔다. 이번 밤샘 도보여행은 엘리자베스 2세의 삶을 기리는 순례의 여행으로 두고두고 우리의 가슴에 되살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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