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24º
습도 30%
수원 24º
습도 40%
강릉 27º
습도 25%
)
“교열직은 저에게 천직이지요. 지금도 교열을 의뢰받고 메일을 열고 원고를 확인할 때면 가슴이 설렙니다. 언제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교열에 취해 작업을 진행하고, 깔끔하게 다듬어진 문장을 살펴보면 행복합니다. 뿌듯하지요.”
교열과 글쓰기 전문가로 통하는 박재역 한국어문교열연구원 원장은 아무리 인공지능(AI)이 발전하고 온라인 문화가 대세라고 해도 교열 작업만큼은 기계가 대신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 글쓴이의 마음으로 빚어진 아름답고, 세련되고, 바람직한 표현이 담긴 글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다고 말한다.
“로봇 저널리즘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AI의 글쓰기는 혁신이면서 동시에 위협이라는 그늘을 가지고 있죠. 한국고용정보원에서 발표한 보고서 중에서 ‘AI가 쓴 글을 교열하는 직업’이 미래 유망 직업으로 나와요.”
“하지만 전 기계적이고 조직적이며 논리적인 표현이 아니라 아름답고, 세련되고, 바람직한 표현이 담긴 글이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세상이 오기를 기대하죠. 젊은 세대들이 앞장서서 이런 것을 하나의 ‘운동(movement)’으로 일으켰으면 좋겠어요.”
우리말글 지키는 앵커맨
경북 군위가 고향인 박 원장은 1955년생으로 7남매의 대가족 속에서 중학교까지 군위에서 지냈다. 어렸을 때 다소 엄격했던 할아버지를 통해 한문 읽기와 쓰기를 배웠는데 그때의 추억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지금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여섯 살쯤으로 기억하는데, 그때부터 할아버지께 한문 읽기와 쓰기를 배우며 자랐어요.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이성계 어른은 말이다. 손가락 굵기의 3자짜리 쇠막대기를 모래에서 글씨 연습을 하면서 다 닳아 없앴단다’라는 일화를 들려주셨죠.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글쓰기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칠판에 ‘경노당’이라고 쓰시기에 그게 아니고 ‘경로당’이라고 끝까지 우기다가 한 대 맞은 억울한 기억도 남아 있어요(웃음).”
고향을 떠나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 입학 후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어렴풋이 목회자의 꿈을 키웠다. 이를 위해 대학 진학을 앞두고 서울 동작구에 있는 총신대 신학과에 진학하려고 했지만 가족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대신 교사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같은 대학 종교교육학과에 입학했다. 가족의 바람대로 그는 대학에서 중등 국민윤리 교원자격증을 취득한 뒤 경북 지역의 공립중학교 도덕 교사로 10년 가까이 근무했다.
“대학 전공이 종교교육학인데 그 당시 교육학이란 이름만 붙으면 웬만하면 중등 국민윤리 교원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어요.”
“공립중학교에서 도덕 교사로 10년 가까이 근무하다 자의로 퇴직했죠. 당시 교직에 대한 회의감이 마음에 일었거든요. 경상도 말로 ‘늘푼수(앞으로 좋게 발전할 가능성)’라는 말이 있는데 여러 일을 경험하면서 교사만큼은 늘푼수가 없다고 생각한 거였죠.”
그러나 교문 밖 세상도 뚜렷한 비전으로 그를 기다려 주고 있는 건 아니었다. 교직을 그만두고 1992년 지방 신생 신문사에 교열기자로 처음 발을 들였다가 회사가 부도나면서 경북 대구 지역의 한 제조업 회사에 다녔던 그는 당시의 어려움을 이렇게 털어놨다.
“옷에 기름도 묻히고 그랬어요. 제조업에 있었으니까. 납품 가면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자 들고 와서 검사해 보고 바닥에 막 패대기치고, 회사 직원들은 술 먹고 달려들고, 야만적인 일들이 참 많았죠. 그 회사를 나와선 대구 지역으로 아예 가지 않았어요. 그때의 생각이 불현듯 살아나니까.”
삶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던 그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이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어느 후배로부터 동아일보에서 교열기자를 공모한다는 정보를 받은 것이다. 이후 상경해 동아일보 어문교열팀에 들어간 그는 1996년부터 2010년까지 15년간 교열기자로 일하며 취재기자의 기사에 힘을 실어 주는 역할을 했다.
“원래 동아일보는 보수정권의 박해를 받으며 오로지 ‘야당지’로서 명성을 이어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김대중정부가 들어서며 동아일보는 정체성에 혼란기를 맞게 됐어요. 그렇게 힘을 보태 왔던 ‘야당’이 갑자기 ‘여당’이 되어 버린 정치적 현실 앞에 ‘이제 여당지로 가느냐’ ‘그래도 영원한 야당지로 남느냐’의 기로에 선 셈이었지요. 공식적으로는 영원한 ‘야당지’로 간다는 취지의 발표를 들은 기억이 나요. 저도 그즈음 동아일보에서 선걸음을 떼기 시작했죠.”
그는 교열기자 초기 시절, 문장에서 오류를 찾아 수정하는 데 자신감이 없어 고민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동아일보 입사 후 가끔 ‘멘붕’을 경험했어요. 문장에서 오류를 찾아 수정하는 데 자신이 없었죠. 앞서 입사한 선배에게 물어봐도 정확한 답은 찾을 수 없었으니까요. 대신에 ‘우리는 그렇게 써 왔다’는 대답만 들어야 했어요. 그때부터 ‘왜’라는 의문에 스스로 정답을 찾아 가기 위한 노력이 시작됐죠.”
“문법 공부를 다시 시작했어요. 4대 어문규범을 거의 외우듯 익히고 기본 문법 서적을 탐독해 나갔죠. 국어사전이 두껍게 부풀어 오를 때까지 찾고 뒤졌어요.”
후진 양성 위해 한국어문교열연구원 설립
훗날 이런 노력이 동아일보 퇴직 후에 설립한 한국어문교열연구원의 밑천이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동아일보에서 정년퇴직하기 직전인 2010년에 상명대 대학원 한국학과에 들어가 한국언어문화를 전공하며 한국어 문법과 문장론을 재정립할 수 있었죠. 2011년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중국해양대학교에 초빙교수로 가 한국어 관련 강의도 했어요. 날마다 강의 자료 준비로 분주한 시간을 보냈죠.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평범한 원리에 따라 스스로도 느낄 정도로 실력이 점점 쌓여 갔어요.”
“석사과정 2년간 국어문법이 거의 완벽하게 정착되면서 개설한 과정이 민간자격 ‘어문교열사’예요. 현재 교열 작업과 어문교열사 자격증, 이 두 가지가 한국어문교열연구원의 주 업무죠.”
박 원장은 이곳에서 공공기관 문서교열 작업과 자격증 어문교열사 민간자격증을 발급하는 사업을 하며 후진 양성을 위해 열정을 쏟고 있다.
그에게 언론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무엇인지 묻자 자신의 소신을 강하게 붙들고 사명을 다하는 ‘앵커맨(Anchorman)’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교열기자 역시 우리말글을 지키는 앵커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교열기자의 삶도 만만치는 않다고 강조했다.
“미국 CBS 월터 크롱카이트 같은 ‘붙박이 진행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배를 강하게 잡아 두는 앵커처럼 자신의 소신을 강하게 붙들고 사명을 다하는 언론인이 떠올라요.”
“교열기자 시절, 교열사(Proofreader)는 문지기(Gate Keeper)라는 사명을 띠기도 하지만 ‘신문닦이(닦아도 그만, 안 닦아도 그만)’라는 천박한 표현으로 비하하는 말을 들은 적도 있어요. 그래도 저의 강의를 들은 많은 사람, 저의 글을 본 많은 사람이 올바른 우리말글을 지향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당연히 자부심이 생기죠.”
끝으로 우리 국어 맞춤법이 외국인은 물론 한국인에게도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와 우리가 놓치고 있는 국어교육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물었다.
“우리 문법이 어렵고 복잡하고 애매해요. 그런 부분이 많아요. 그냥 어려운 게 아니고 복잡하고 애매하죠. 애매하다는 거는 뭐냐 하면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 돼요.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된다는 거죠. 원칙과 허용이 너무 많다는 게 우리 문법의 특징이에요.”
“제도권 교육에 쓰기 교육이 없다는 점이 아쉬워요. 글쓰기 교육이 없다 보니 아이들이 학교에서 글쓰기를 배우지를 못해요. 그러니까 겨우 글쓰기를 한다는 게 초등학교 때 글짓기 정도죠.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들어가도 자기소개서 하나 못 쓰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에요. 제가 국어교육 중에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은 문법이 아니라 바로 글쓰기 교육이에요. 문법은 글쓰기를 위한 약속일 뿐이죠.”
박 원장은 요즘 사는 낙으로 글과 가족을 꼽았다. 교열과 글쓰기는 기본적인 활력소이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행복하다고 말한다.
“근처에 모여 사는 그랜드슬램 가족(아내·아들과 며느리·친손주·딸과 사위·외손주)이라 더욱 그래요. 아들과 딸도 저와 교열을 같이 하고 있죠.”
“어쩌다 보니 노후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가운데 노후가 다가오고 있어요. 연봉 1억 원이 그렇게 부러웠지만 이젠 부럽지 않아요. 교열은 누구나 배우기만 하면 어떤 문서든 어디서든 정년 없이 할 수 있거든요. 저에게 노후 준비의 정답은 ‘교열’이에요!”
◆프로필=△1955년 경상북도 군위 △총신대 종교교육학과 졸업 △1983년 동로중학교 교사 △1987년 영천여자중학교 교사 △1990년 영천중학교 교사 △1996년 동아일보 편집국 어문연구팀 교열기자 △2011년 상명대 대학원 한국학 석사 △중국해양대학교 한국학과 초빙교수 △2016년 한국어문교열연구원 원장
저서: ‘교열기자의 오답노트’(2017, 글로벌콘텐츠) ‘다 쓴 글도 다시 보자’(2022, 글로벌콘텐츠)
후원하기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좋아요
감동이에요
화나요
슬퍼요
추천해요7
좋아요7
감동이에요2
화나요0
슬퍼요0
연재기획 ‘반대세의 비밀’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기사제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