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칼럼] 미국의 괴짜 하워드 휴즈와 한국의 도깨비 박흥식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연재기획

미 억만장자 휴즈의 삶은 영화 ‘에비에이터’에 담겨
일제 치하 ‘유통의 제왕’ 박흥식은 역사 박제품인가

조우석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4-25 09:20:33

“세상이 꿈꾼 모든 것이 그의 손안에 있었다.” 거장 마틴 스코세지가 연출하고 명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출연한 할리우드 영화 ‘에비에이터’(2005년)의 헤드카피다. 생각해 보라. 현대 미국의 억만장자이자 영화감독 그리고 비행기 조종사까지 두루 다 거친 하워드 휴즈(1905~1976)를 다룬 전기영화이니까 그 정도 광고문안은 과장이 아니다.

더구나 하워드 휴즈는 병적일 정도로 위생 관념에 집착하는 괴짜인 데다가 당대 최고의 미녀였던 에바 가드너·캐서린 햅번 등과 염문을 뿌렸다. 세상의 평가와 달리 정신병력도 있었다. 호·불호를 떠나 그런 문제적 인물을 영화로 만들지 않는다면 할리우드는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 그런 영화를 관람하면서 미국인과 세계인은 미국적 꿈과 역사를 음미한다.

보름 전 이 지면에서 사람 이야기에 인색한 한국 영화의 문제점을 지적한 평론가 조희문 전 영화진흥위원장의 속뜻도 바로 그러했으리라. 자 그럼 대한민국의 하워드 휴즈는 누구일까? 뜻밖에도 수두룩하다. 한국의 20세기가 그만큼 역동적이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 골드 러시의 주인공인 광산왕 최창학을 비롯해 삼성 이병철·현대 정주영 등이 다 후보군이다. 하지만 내가 우선 끌리는 사람은 박흥식(1903~1994)이다.

아시는가. 일제시대 유행어가 ‘유통엔 화신 박흥식, 제조업엔 경방 김연수’였다. 김연수의 경성방직은 1930년대 베이징에 사무실을 두고 만주 대륙을 호령했던 글로벌 기업이다. 하지만 영화 캐릭터로 적합한 인물은 단연 박흥식이다. ‘일제시대 최고의 거부,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화신백화점의 오너, 그러나 반민특위 체포 대상 1호….’

물론 영화판 못난이들은 친일파를 주인공으로 어떻게 영화를 만드느냐고 펄펄 뛸 것이다. 그런 속류(俗流) 마인드를 버려야 대한민국 문화가 산다는 게 오늘 칼럼의 본뜻이다. 어쨌거나 박흥식도 단연 도깨비과(科)에 속한다. 그는 황소 같이 커다란 몸집에 다소 유순해 보이는 얼굴 표정부터 이채롭다. 100kg을 훌쩍 넘기는 덩치에 무농약 과일을 시도 때도 없이 먹어대던 대식가였다.

정교함은 덜했을지 몰라도 배포도 컸다. 1935년 정초 지금 종로타워빌딩 자리의 4층 건물 화신백화점에 큰 불이 났을 때다. 수천 명 구경꾼이 몰려 난리였고, 우에노 조선총독부 총독이 직접 진화 작업을 현장에서 독려했을 정도였다. 한데 그날 밤 박흥식은 총독을 초청해 명월관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화신은 끝났다고 말하지만 나는 일어선다. 조선 사람들은 본래 불난 집은 불처럼 일어난다고 믿지 않더냐?” 그렇게 호언하던 그는 총독에게 깜짝 제안을 했다. “백화점을 새로 지을 때까지 시한부로 화신 건너편 종로경찰서 구관을 빌려 달라. 거기에서 영업해야겠다.” 화신 건물이 불탄 건 변변한 소방시설을 갖추지 못한 총독부 책임도 크지 않느냐는 압박도 곁들였다.

놀랍게도 총독은 선뜻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게 훗날 신신백화점이 들어선 계기다. 그 뒤 화신은 승승장구했다. 2년 뒤 화신은 지상 6층의 새 모습으로 재개관했다. 직전 평양의 한 백화점을 인수해 화신 평양점까지 만들었다. 일제 자본인 미츠코시(현 신세계)·조지아(옛 미도파) 등이 명동을 점령한 상황에서 종로에 떡 버티고 있던 화신은 그 자체로 위안이었다.

당시 경성 사람들은 화신 6층 식당가에서 비빔밥을 먹고 아이쇼핑 하는 게 최고의 호사였다. 시인 주요한과 소설가 조벽암 등을 채용해 화신의 광고 업무를 맡긴 수완가적 전략도 박흥식의 머리에서 나왔다. 정말 대박은 연쇄점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300개 점포를 조선 팔도에 세운 것이다. 일본에서 싸게 확보한 물건을 연쇄점에 공급하는 대형 네트워크였으니 유통왕다운 행보였다.

그런 박흥식의 고공행진은 총독부 비호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좋다. 영화는 그런 측면까지 날것으로 보여 주면 된다. 일제 말 비행기 헌납 사실도 숨기거나 가리고 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박흥식은 반민특위 공판에서는 무죄로 풀려났다. 선고 이유가 이랬다. “그 시기 겨레의 상권을 수호했다. 그를 친일파로 기소한 건 편파적이었다.”

그렇다. 때가 좀 묻고 일그러졌더라도 그게 우리 앞 세대의 모습이다. 어찌된 나라인지 근·현대 1세대 기업인인 그를 다룬 단 한 권의 단행본도 나온 바 없는 게 현실이니 경악할 노릇이다. 영화 상품의 등장은 이런 목마름을 채워줄 것이고, 흥행 대박은 당연하지 않을까. 주사파에 복무하는 걸 영화적 사명으로 생각하는 충무로의 왕 못난이들에게 오늘 다시 묻는다.

조우석 필진페이지 +

후원하기

정기 후원
일반 후원
무통장입금: 하나은행 158-910019-39504 스카이데일리
스카이데일리는 온라인 판 스카이데일리닷컴과 32면 대판으로
매일 발행되는 일간종합신문 스카이데일리(조간)를 통해 독자 여러분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후원자 분들께는 지면광고를 하고자 하실 경우
특별 할인가격이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