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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미국을 제국주의 본산이며 악의 원흉이라고 했어요. 썩고 병든 자본사회의 전형이라고 했죠. 그런 교육에 세뇌된 탓에 미국에 대한 이미지는 항상 나빴어요. 하지만 미국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선전과 현실의 격차가 이렇게 크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탈북인 출신 허영철(60) 촬영 감독은 난생 처음 미국을 방문한 소감을 이같이 전했다.
그는 지난달 24일부터 30일까지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일정 중에 일부 행사 촬영을 맡았다. 그는 윤 대통령의 공식 방미 단원 중 한 명이었다. 머릿속에서만 그리던 ‘아름다운 나라’ 미국에 간다는 생각에 너무 설레어 밤잠도 설쳤다고 했다.
“썩기는 커녕 너무나 시원하게 건설된 워싱턴의 맑은 공기가 인상적이었어요. 북한에서의 반미교육은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죠.”
허 감독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펼쳐진 풍요로움과 여유로움이 부러웠다고 한다. 노천의 넓은 주차장들, 한국보다 많은 대형 승용차와 픽업 트럭들이 눈에 띄었고 세계 최대 문화재단 스미소니언이 운영하는 자연사박물관을 비롯해 시민들에게 편리하게 제공되는 사회 서비스망에 가슴이 뭉클했다고 했다.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은 시민들이 근접해 볼 수 있는 거리에 있었어요. 폐쇄적인 북한에 비해 누구나 볼 수 있게 문을 활짝 연 공공시설들이 많아 감동적이었어요.”
탈북인 인생 바꿔 놓은 소형 캠코더
경기도 김포에서 북한 전문 방송 외주 제작사 ‘원코리아 미디컴’을 운영 중인 허 감독은 1997년 아내와 탈북해서 2002년 두 살배기 딸과 함께 남한에 정착했다.
“1997년 2월 탈북했는데 그 무렵 황장엽 선생도 망명하더라고요. 나라가 어려워지니까 간부들이나 지식인들이 나라 꼴이 이렇게 돼서는 안 된다고 걱정하다 탈북하던 시기였죠.”
1963년생인 그는 압록강 상류에 있는 북·중 접경 도시인 양강도 혜산이 고향이라고 밝혔다. 한국에 왔을 때 도시의 고층 빌딩보다는 땔감으로 나무를 마구 벌목한 탓에 민둥산 천지였던 고향 땅과 달리 곳곳에 푸르른 나무들로 둘러싸인 주변 환경에 더 놀랐다고 말했다.
“도시 주변에 나무들이 살아 있는 게 너무 부러웠죠. 남들은 화려한 빌딩이나 근사한 자동차를 말하던데 전 나무에 마음이 끌렸어요. 자동차는 돈만 있으면 당장 손에 넣을 수 있지만 나무는 돈만 있다고 해서 순간 성장시킬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허 감독은 북한이 선전하는 평양의 모습만을 보고 북한을 판단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북한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인 평양은 북한 정권의 상징이자 대외적으로 보여 주고 싶은 북한의 이상적인 모습이며 선전물이라는 것이다.
평양은 지방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전력 사정이 좋고, 1990년대 100만 명 이상이 굶주린 ‘고난의 행군’ 때에도 배급이 끊기지 않았다. 하지만 평양을 제외한 지역에서 북한 주민의 일반적인 삶은 일제 강점기보다 더 참혹하다고 그는 말했다.
“북한에는 평양이라는 나라가 따로 있고 지방이라는 나라가 따로 있는 셈이에요. 탈북 당시 산에 나무도 없을 뿐더러 도시 곳곳에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죠. 지방에 사는 북한 주민들은 맘대로 이동도 못 해요. 일제 강점기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걸요. 만주를 가든 일본을 가든 자유로웠단 말이죠.”
허 감독은 북한에서 촬영 일을 한 건 아니었다. 남들처럼 학교를 졸업하고 1979년 군에 입대, 만 10년간 복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을 했다. 북한식 청년사업인 백두산청년 들쭉사업소 사로청위원장을 맡아 2년간 일했고 혜산식품연합회사 자재지도원으로도 활동했다. 하지만 1995년부터 시작된 고난의 행군 때 삶이 꼬이기 시작했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니라고 불평한 게 보위부에 걸려 1996년 새해를 하루 앞두고 체포됐다.
주변의 도움으로 간신히 풀려났지만, 북한 경제는 악화일로였고 주변 사람들이 줄줄이 체포되면서 공포가 엄습했다. 특히 그를 아껴 주었던 양강도 인민위원회 상업부위원장이 1997년 2월 처형되자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란 예감이 들어 아내와 함께 탈북을 결심했다. 지옥의 땅을 벗어난 뒤 중국 칭다오 등지에서 폐지와 빈병을 주워 팔며 숨어 지내다 한국으로 들어왔다.
2002년 탈북인의 신분으로 한국에 와 2023년 감독·PD 등의 직함으로 불리기까지 그의 삶은 가시밭길이었다. 이것저것 살피고 뒤돌아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촬영 감독이라는 꿈 하나를 이루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야만 했다.
“2003년 1월 탈북민 정착지원 기관인 하나원에 있을 때 지방 도시에 간 적이 있는데 자원봉사자들이 주먹 만한 캠코더를 들고 와 찍어 줬죠. 촬영기가 거대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영상을 편집해 동영상을 보여주는데, 그때 ‘어떻게 이런 손바닥만 한 캠코더로 영화를 만드는가’ 하며 놀랐죠. 촬영 작업이 매력적으로 다가온 순간이었어요.”
남한 정착을 위해 처음부터 영상 분야에 뛰어든 건 아니었다. 북에서 운전병 양성 교육을 받아 포병차량을 끌었던 경험이 있던 그는 자동차가 친숙해 정비사가 되려고 했지만 좀처럼 길이 열리지 않았다. 6개월 동안 자격증을 2개나 획득해 10여 곳의 취업문을 두드렸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처음엔 정비사 6개월 과정에 등록해 자격증 2개를 취득했죠. 10군데 넘는 카센터를 돌아다니며 일을 하려고 했지만 40살이 되다 보니 채용하겠다는 데가 없더라고요. 한국에서 좌절을 느꼈던 순간이었죠.”
영상 공부하고 촬영하는 게 즐거워
허 감독은 진로를 수정해 2004년 3월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영상교육센터에 들어갔다. 6개월 과정의 유료 영상 미디어 교육 과정이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대전환기에 있었던 영상 분야 기술을 배우는 건 시의적절했지만 이 분야에서 프로로서 자신만의 실력을 갖추기까지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여기서 밀리면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영상 작업에 매달렸어요. 원하는 수준의 영상물을 얻기 위해 계속 공부해야 했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다행히 촬영과 제작이 적성에 너무 잘 맞았죠.”
영상 촬영과 편집이 손에 익자 허 감독은 단편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뿌리’라는 제목의 첫 작품이었다. 그는 이 다큐로 2005년 3월 부산시네마 영화제에서 창작상을 받았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촬영한 이 작품은 실은 저희 집안 역사를 담은 작품이에요. 이 작품으로 저는 우리는 함께 뿌리내리고 살아야 할 한 민족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어요.”
부산 영화제에서 입상하면서 일거리가 제법 들어왔다. 부산 KBS ‘아침마당’ 프로그램에서 PD 겸 리포터로 일하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그는 리포터 겸 편집·촬영까지 도맡았다. 1년 뒤 울산 KBS ‘생생투데이’ PD로 옮겨 2년 더 일했다. 이후 영상에 미쳐 촬영과 편집에 몰두해야겠다는 생각에 무보수로 몇 년을 감독들과 PD들을 따라다니며 일을 배웠다.
“영상 제작만으로 가족을 부양할 수 없어서 갖가지 부업으로 일을 해야만 했어요.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죠.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아침 7시까지는 세탁물을 배달했고 낮에는 촬영장을 다니며 영상을 배웠어요. 밤 늦게까지 한약을 배달하는 일도 하고 주말엔 건설 현장으로 출근해 막일을 했어요. 아내도 마트에서 일하며 저의 꿈을 뒷바라지하고 응원해 줬어요.”
허 감독은 촬영과 편집·컴퓨터 그래픽 등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영상물을 얻기 위해 기술을 하나하나 익혀 나갔다. 모든 것이 자신 있다고 생각된 순간, 시나리오도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부산작가 교육원에 입학해 3년 동안 시나리오 공부도 했다. 그렇게 한국 생활 내내 꿈을 향해 배움을 멈추지 않았다. 최고의 촬영감독이 되고 싶다는 일념뿐이었다. 나이 60이 되었지만 그 꿈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법무부에 따르면 최근 11년(2012년~2022년)간 26만2305명의 한국인이 국적을 상실 또는 이탈했다. ‘헬조선서 사느니 탈조선 하겠다’라는 말이 나돌고 있는 게 요즘의 현실이다. 26년 전 탈북한 그에게 한국 사회는 과연 자신의 꿈을 키울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을지 궁금했다.
“힘들 것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어요. 남한 사람들은 힘들다고 하지만 탈북민이 볼 때 환경이나 시설이 너무 좋은 거예요. 내가 노력만 하면 이뤄지니까.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재미있더라고요. 한국은 정신이 올바르게 박히고 몸만 건강하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좋은 나라예요.”
[허영철 촬영감독 프로필]
△1963년 양강도 혜산시 출생 △1979~89년 인민군 복무 △2002년 10월 대한민국 입국 △2004년 3월 KVS한국비디오영상연구원 수료 △2005년 9월 다큐 ‘뿌리’ 부산 시네마테크 영화제 출품작 당선(각본·감독·촬영) △2005년 10월 부산KBS 아침마당 VJ겸 리포터 △2006년 10월 울산KBS ‘생생투데이‘ 제작 △2007년 12월 부산드라마 시나리오 영상작가교육원 수료 △2009년 8월 한국문화정보센터 문화PD △2010년 4월 F스포츠TV 촬영PD △2012년 2월~ 원코리아미디컴 대표 △2014년 7월 KBS ’남북의 창‘ 광복70주년 특선집 촬영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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