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시계’의 백학과 러시아 전승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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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 View] 돌아가지 못하는 영혼들

‘모래시계’의 백학과 러시아 전승절

박선옥 논설실장 기자페이지 + 입력 2023-05-10 00:02:40

드라마 ‘모래시계’는 1995년 방영된 작품으로 벌써 28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회자되는 명작이다. 특히 긴박한 극 중 상황에 잘 어울리는 ost ‘백학’도 ‘모래시계’와 함께 인기를 모았다. 비장미가 느껴지는 노래 ‘백학’을 들으면 ‘모래시계’가 자동으로 연상되면서 우리 사회가 거쳐 왔던 격동적인 산업화·민주화 시대의 역사적 굴곡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백학’이 우리나라 사람에게만 격동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상징적 노래가 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 노래의 비장함을 막연히 느낀다면, 이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장엄한 슬픔의 감정을 담아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러시아인들이다.

러시아인에게 ‘백학’은 전승기념일 노래와 다름없다. 해마다 5월9일 러시아의 전승절이 되면 각 도시의 거리에선 전쟁에서 스러져 간 전사자들을 기리는 행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전쟁터에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병사들이 백학이 되었다는 내용을 담은 이 노래가 곳곳에서 울려 퍼진다.

각 가정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사한 조상의 사진을 들고 거리 행진에 참여한다. 지난해 행사에서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군복 차림의 아버지 사진이 담긴 액자을 들고 행진에 나선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이탈리아·일본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과 미국·영국·프랑스·소련·중국 등 연합국과의 전쟁이었고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으니 러시아뿐 아니라 많은 국가가 승전을 기념한다. 현재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러시아가 유독 전승기념일을 챙기는 것은 그만큼 당시 소련의 희생이 컸기 때문이다. 자료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군 전사자는 약 1200만 명이다. 민간인까지 합치면 3000만 명에 육박하는 인구가 희생됐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체 사망자 4700여만 명 중 절반이 훨씬 넘는다.

하지만 올해 러시아 당국은 이달 9일(현지 시간) 치러지는 전승절 행사를 대폭 축소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친(親)우크라이나 세력의 테러가 우려된다는 안보상의 이유를 내세웠다. 최근 몇 주 사이 러시아에서 수차례 폭발과 화재 등 테러 사건이 발생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고 꼬집는다. 이 행사가 자칫 반전 시위로 확산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사자의 사진을 들고 시민들이 대규모로 거리를 행진하는 ‘불멸의 연대’ 행렬은 전승절의 주요 행사로 꼽힌다. 그런데 올해는 예년처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조상의 사진이 아니라 현재 15개월째 접어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전사한 아들의 사진을 품에 안은 어머니들이 행렬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는 소식이다. 이들의 입에서는 ‘반전(反戰)’ 구호가 터져 나올 것이고 이 피맺힌 목소리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반전 시위로 이어질 가능성이 충분하다.

현재 타국에 망명 중인 한 러시아 언론매체 편집인은 “만일 ‘불멸의 연대’ 행사가 진행된다면 가족들이 사진을 들고 나오는 우크라이나 전쟁 전사자 수가 엄청나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당국이 우려하는 것은 테러의 가능성이 아니라 바로 그동안 꼭꼭 감춰 온 우크라이나 전쟁의 실상이 드러나는 거라는 것이다.

러시아 전승절은 1945년 당시 소련이 독일 나치 정권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날을 기념한다. 그해 4월27일 이탈리아의 뭇솔리니가 처형되고 4월30일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자살한 후 각 전선에서 순차적으로 독일의 항복 소식이 전해졌다. 5월8일에는 유럽 서부 지역에서 독일군이 항복하면서 전 유럽이 연합군의 승전으로 축제 무드에 휩싸였다. 그런데 이때가 소련 시간으로 5월9일이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전승절은 5월9일이 됐다.

과거 소비에트연방(소련)에 속해 있던 우크라이나도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5월9일을 전승절로 기념해 왔다. 하지만 8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전승절을 5월8일로 변경한다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우크라이나로서는 침략자 나치 독일의 항복을 기념하는 축제를 현재의 침략자인 러시아와 함께 기리는 것이 불편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날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기념관 앞에 서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패배한 것처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악당’ 러시아도 패배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지금쯤 백학이 된 러시아 병사들은 나치 독일처럼 변해 버린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낯선 타국의 하늘에서 서성거리고 있을지 모르겠다.

박선옥 논설실장 sobahk@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