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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수는 이 서방의 말에 마음을 정했다. 탈옥한 처지여서 어딘가에 은신할 필요도 있었고 파란 많은 몇 년의 세월을 모두 잊고 청정법계 속에 묻혀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서방은 흡족해하며 창수의 뜻을 하은당에게 전했다. 잠시 후 어떤 중이 칼을 가지고 와서 창수를 시냇물이 흐르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는 조용히 삭발진언을 한 후 상투를 단칼에 잘라냈다. 잘린 상투 위로 창수의 눈물이 떨어졌다.
법당에 종이 울리고 향적실에서는 공양주가 불공밥을 지었다. 각 암자에서 가사 입은 스님들이 수백 명 모여들었다. 불가에 스님이 입문하는 의식이 시작되었다. 가장 기본이 되는 다섯 가지 계율인 오계가 내려지고 창수의 팔에 불로 침을 놓는 불침 의식이 행해졌으며 마지막으로 법명을 주고 가사를 입혀주는 의식이 이루어졌다. 하은당이 창수의 승명을 지어 불전에 아뢰었다. 창수는 이제 ‘원종’이라는 승명으로 불렸다. 백발의 노승 하은당은 창수에게 불도를 가르치면서, 제일 먼저 마음을 낮출 것을 말했다.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짐승과 보잘것없는 작은 곤충에게까지 마음을 낮추지 못하면 지옥의 고통을 받게 되느니라. 세상 생각은 허영과 야욕에 불과한 것이니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싹트면 부처님께 여쭈어 물리쳐야 한다, 알겠느냐?”
하루 전에만도 공손하게 상좌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던 하은당은 창수에게 이렇게 가르치고는 바로 하대하기 시작했다.
“원종이, 어디 있느냐?”
창수가 얼른 달려가 조아리자 하은당은 창수에게 막말을 퍼부었다.
“원종이 네 놈은 생긴 것이 미련스러워 큰 중은 되지 못하겠구나. 너같이 못생긴 얼굴은 처음이구나. 뭘 빤히 보고 있는 게냐? 어서 나가서 물 긷고 장작을 패거라.”
창수는 기가 막혔다.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자라났다. 부모님의 둘도 없는 귀한 아들이었고 동학에 입교하여 소년접주로 이름을 날렸다. 나라를 구해보려고 국경을 넘어 청나라에 들어갔고 돌아와서는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왜놈을 처단하여 영웅이 되었다. 비록 탈옥하여 쫒기는 신세가 되었지만 공명심과 기개만큼은 남달랐다. 그런데 이제 노승의 상좌가 되어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면서 갖은 모멸을 참고 있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참고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창수는 열심히 물을 지고 오다가 물통 한 개를 깨뜨렸다. 이것을 본 하은당이 호통을 쳤다.
“이놈, 원종아! 생긴 것도 밉상인 놈이 하는 짓도 그 모양이냐? 귀한 물통을 깨뜨리다니, 네 놈 몸통이 부스러져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창수는 아무 말 못 하고 묵묵히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보경대사가 한마디 했다.
“하은당, 전에도 괜찮은 상좌를 데려다주었더니 못살게 굴어 모두 내쫓더니… 쯧쯧! 원종이도 잘 가르치면 제 앞가림을 할 터인데, 저런 성질머리하고는! 저렇게 들볶으면 얼마나 붙어 있겠나.”
보경대사의 이 말을 들으니 창수는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그렇게 창수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불경을 공부했다. 그렇게 지낸 지 반년이 되어 어느덧 기해년(1899) 정월이 되었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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