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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2월 평양은 김정일의 생일을 계기로 사업총화를 한다며 해외 무역부 대표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사업총화는 구실일 뿐 돈 바치라는 소리다. 2000년 7월에 여성 노동자들을 데리고 체코에 나가서 5개의 합작 공장을 관리하던 나도 평양으로 갔다. 20여 일 만에 모든 총화 일정은 끝났다. 그런데 다른 나라 대표들은 모두 내보내며 나에게만 출발 명령이 안 떨어진다. 모두 뭔가를 숨기는 눈치다.
나는 그보다 6년 전에도 주(駐)말레이시아 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 회의에 불려 들어가서 죄 아닌 죄를 쓰고 3년 동안 대성산 수목원 관리 노동자로 강직되었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직감적으로 또다시 그 과정이 반복된다는 것을 느꼈다. 하루는 나도 잘 아는 보안원 중좌가 찾아서 갔더니 “너와 교체할 다음 사장의 문건이 지금 중앙당에 비준을 받기 위해 올라간 상태이니 알고 있으라”고 했다.
분노가 치밀었다. 누군가가 권력을 등에 업고 또 내 자리를 탐한 것이다. 그러나 힘없는 자는 도리가 없다. 6년 전의 공포와 함께 자살해 버리고 싶은 반항심이 꿈틀거려서 매일 집에서 술만 펐다.
그렇게 2개월 정도를 지내는 동안에도 거의 매일 본사로 불려 나가야 했다. 자다가도 불려 나가고 술을 마시다가도 불려 나갔다.
당시 체코엔 공장 5개에 근 200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있으니 크고 작은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 통역원은 이상할 정도로 사소한 일에도 계속 평양으로 긴급전화를 하고 팩스를 보내왔다. 현지 실정을 모르는 평양 본사에서는 어쩔 수 없으니까 한밤중에도 나를 불러댔다.
어느 날 밤 또 나를 데리러 사람이 왔다. 부직포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가 결핵 진단을 받았는데 공장 측에서는 전염병이라며 출근도 안 시키고 조선으로 돌아가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본사에선 내가 와서 당장 그 사건을 처리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안 가겠다 하고 그냥 잠을 잤다. 그러자 다음 날 아침에 또 차가 왔다. 결국 본사에 간 나는 부서장에게 “나를 체코로 보내지 않는 이유가 도대체 뭔가?”를 따졌다. 그러나 부서장은 당에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기는 모른다며 답을 피했다. 나는 “다시는 나를 찾지 말라. 체코 현지에서 어떤 사고가 나도 나는 책임이 없다”고 큰소리를 치고 집으로 왔다.
이틀 후 아침에 전화를 받으니 다음 날 당장 체코로 떠나라고 했다. 아마도 체코 현지에서 사고가 계속 나고 중앙당에서 새로운 사장에 대한 승인이 예상 밖으로 늦어지자 할 수 없이 당분간 나를 다시 내보내자고 합의가 된 것 같았다.
그때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이때부터 하늘은 뒤에서 항상 나를 도와주었던 것 같다. 다음의 이야기들을 들어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나는 그날로 본사에 나가서 체코 대방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결핵 걸린 우리 노동자를 체코 노동자와 똑같이 치료해 주지 않으면 조선 노동자 전원을 당장 철수시킬 것이며 평양에 있는 체코대사관에 그들의 비인간적 행위에 대해 항의하겠다고 압박했다. 대방 사장은 찍소리도 못 하고 그날 중으로 환자를 결핵병원에 입원시키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간부들과 하직 인사를 했다. 다음 날 나는 속으로 ‘다시는 이 땅을 밟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며 베이징행 열차를 타고 평양을 떠났다. 왜 그런지 멀어져 가는 평양 역전을 바라보니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베이징에서 며칠 묵은 뒤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나의 생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프라하행 여정을 떠났다.
체코에 도착하니 보위원과 통역원과 노동자들이 무슨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란 얼굴들이었다. 김태산이 다시는 체코에 못 온다는 비밀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통역원이 내 책상에 앉아서 사장 행세를 했다고 여성 노동자들이 비웃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통역원은 나 대신 자기가 사장이 될 것이라 상상하고 나름대로 충성심을 보이느라고 본사에다가 사소한 문제까지도 끊임없이 보고를 한 것이었다. 자신의 그런 행동이 나를 다시 체코로 나갈 수 있게 하는 촉매제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 가정은 분위기가 싸늘했다. 아내가 나의 망명 제의를 극력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은 항상 나의 편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비자도 없이 북한 여권을 들고 온 가족이 무사히 독일을 경유하여 인천공항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아직도 그때 중앙당에 올려 보냈던 후임 사장의 문건이 왜 승인되지 않고 몇 달 동안 시간을 끌었는지 알 수 없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내가 구원을 받은 것과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가 과연 우연히 주어진 것인가를 항상 생각한다.
한국에 와서 컴퓨터로 계산해 보니 내가 망명을 떠난 2002년 9월8일이 신통하게도 나의 양력 생일 50돌(음력 1952년 7월19일)이 되는 날이다. 결국 나는 만 50살이 되는 생일날에 독재의 땅을 벗어나 자유민주주의의 땅에서 다시 태어난 셈이다. 이것 또한 우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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