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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프랑스 명소산책] 마리 앙투아네트 결혼식과 루이 15세 광장
앙트와네트와 루이16세의 결혼축하 불꽃놀이가 벌어진 곳
프랑스 역사 ‘대 질식’의 장소이자 혁명의 장소
최인숙 필진페이지 + 입력 2023-11-22 06:31:00
▲ 최인숙 문화칼럼니스트·정치학박사
1770516일 수요일. 마리 앙투아네트는 미래의 왕 루이 16세와 결혼했다. 열네  살의 소녀와 열다섯 살 소년이 신부·신랑이었다. 이 만남은 프랑스 왕 루이 15세가 총애하는 장관 슈아절(Choiseul)이 주선한 것이었다. 떠오르는 강국 프로이센과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는 300년간 원수였던 오스트리아의 손을 잡았다.
 
결혼 전 앙투아네트는 깜찍하거나 특별한 매력이 있는 소녀는 아니었다. 어느 날 그녀는 비엔나의 작은 궁전에서 미래의 왕 루이 16세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통보받았다. 1770421일 프랑스어를 한 마디도 못 하는 공주는 오스트리아에서의 추억을 뒤로 한 채 프랑스로 향했다. 앙투아네트와 수행원 132명을 태운 57대의 마차 행렬이 시작됐다. 57일 그녀는 프랑스 영토 에피스(Epis)에 도착했다.
 
예비 신부는 프랑스 관습과 문화를 익히기 위해 자신과 사랑하는 조국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녀는 금색 천으로 된 원피스와 치마를 입었다. 513,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는 마침내 콩피에뉴에서 만났다. 남자는 여자의 볼에 수줍게 키스했고 둘은 베르사유 성으로 향했다. 루이는 착하지만 병적으로 소심한 소년이었다. 왕이 되기엔 다분히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두 형이 모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가 왕이 되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 불꽃놀이가 벌어졌던 루이 15세 광장. 오늘날엔 오벨리스크가 세워진 콩코드광장으로 바뀌었다. 위키피디아
 
516일 오후 1시 은색 드레스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 성령의 금과 다이아몬드가 박힌 옷을 입은 왕세자, 이들은 함께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랭스 대주교가 예배하는 제단 앞에 그들은 무릎을 꿇었다. 왕과 왕실 가족은 그들을 에워쌌다. 왕세자는 떨리는 손으로 아내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줬다. 예식이 끝나고 앙투아네트는 루이로부터 많은 보석과 귀중품들이 들어 있는 화려한 바구니를 받았다.
 
그런 다음 젊은 부부는 대사들의 리셉션에 참석했다. 폭풍우 때문에 예정된 불꽃놀이가 연기됐다. 행사는 가브리엘이 운영하는 새로운 왕립 오페라하우스에서 제공되는 호화로운 향연으로 끝났다. 1500명의 궁정인을 위한 연회·콘서트·무도회가 아름다운 모듈식 홀인 베르사유 궁전에서 시작됐다. 이날은 베르사유 궁이 몇 년에 걸친 확장 공사를 마치고 왕립 오페라하우스의 개막을 알리는 날이기도 했다. 그 기념으로 다음 날 페르세(Persée)·퀴노(Quinault)·륄리(Lully)를 공연했다. 한 가지 흠은 악천후로 아폴론 분지 위의 조명이 취소된 것이었다.
 
사흘 째 되는 날 베르사유에서 큰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화려한 불꽃은 대운하 주변의 베르사유 정원을 환하게 밝혔다. 530일 파리시도 샹젤리제 산책로 맞은편 루이 15세 광장(현 콩코드 광장)의 센 강둑에서 거대한 불꽃놀이를 시작했다. 처음엔 모든 게 아주 좋았다. 멋진 조명·시원하게 뿜어 오르는 분수·환영 인파. 하지만 뜻밖의 참사가 곧 벌어지기 시작했다. 쇼가 끝날 무렵 불꽃이 밀짚으로 옮겨붙어 큰 화재로 번졌던 것이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기록에 따르면 20만 명에서 30만 명이 이 행사에 참석했다. 군중은 흥분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모두들 출구를 찾고 이리저리 헤맸지만 왕실 당국의 마차들이 출입구를 막고 있었다. 그 결과 현재 수도 8구에 위치한 루와얄 거리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현장을 목격한 작가 루이 세바스티앙 메르시에는 이런 글을 남겼다. “배수로·구멍·치수석재·장비 등이 좁은 통로를 위험하게 만들었다. 나는 몹시 위급함을 느꼈다. 숨 쉴 틈조차 찾기 어려웠고 조급함을 느낀 인파의 떠들썩한 파도에 떠밀려 거의 4분 동안 공중에 붕 떠 있었다.”
 
▲ 1770년 마리 앙투아네트 결혼식의 치명적인 불꽃놀이, 판화. 갈리카-BnF
 
왕실은 이 사건의 사망자를 132명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이 수치는 의도적으로 조작되었다는 설이 많았다. 1839년에 출판된 갈리냐니의 새로운 파리 안내(Galignani's New Paris Guide)’ 책자에선 이날 사망자를 3000명으로 언급했다. 1917년에 발표된 뉴 인터내셔널 백과사전에도 같은 숫자가 적혀 있고 이 재앙을 프랑스 역사의 대 질식으로 기록했다.
 
이 비극은 루이 16세 통치의 불길한 징조가 됐다. 그럼에도 축제는 714일까지 연장됐다. 200만 파운드가 소요된 이 축제는 프랑스·오스트리아 동맹의 영예를 나타냈다. 세월 속에 이 참사의 트라우마는 차츰 잊혀져 갔고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국민을 만족시키는 아름다운 왕비가 됐다. 하지만 이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20여 년이 지나 불꽃놀이가 벌어진 루이 15세 광장은 혁명 광장으로 탈바꿈했고 이 광장에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재판소는 이들에게 극형을 선고했고 왕권의 상징인 옛 광장은 혁명가들에 의해 개조됐다.
 
한편, 혁명 기간 동안 권력을 쟁취한 사람들은 불꽃놀이 같은 특정한 상징물을 계속 이어 가기로 결정했다. 혁명파들은 1790714일부터 제1회 불꽃놀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엄청난 비용과 왕정의 잔재물이라는 비난 때문에 중단해야 했다. 1세기가 지난 1880714, 프랑스 제3공화국은 라스파이(Raspail) 법으로 이날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했다. 그리고 불꽃놀이가 재개되었다. 이후 해마다 714일이면 이 불꽃놀이는 파리 7구에 있는 에펠탑에서 밤 11시부터 시작돼 찬란한 불꽃으로 밤하늘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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