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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데일리·정교모 공동주최 제1회 열린포럼
[호남문제 어떻게 풀 것인가]② “산업화 소외·차별… ‘분노와 저항’ 호남 DNA 키웠다”
日 관서경제권 연결성, 항만시설 편의성 등으로 영남은 산업기지화
호남 이농민들은 산업노동자로… 하층 도시민의 분노·저항의식 심화
임명신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1-08 15:45:46
▲ 스카이데일리 제1회 열린포럼 '호남문제 어떻게 풀 것인가'는 한국사회 금기를 깬 또 하나의 도전이다. 주동식 지역평등연대 대표, 사회자 조성환 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를 중심으로 발제자와 토론자들이 연단 좌우에 앉아 있다. 스카이데일리  
 
스카이데일리 제1회 열린포럼 호남문제 어떻게 풀 것인가에서 발표된 주동식 지역평등시민연대 대표 발제문 호남과 대한민국을 이어서 소개한다. 호남문제의 최초 공론화인 이번 포럼을 통해 제출된 대단히 묵직한 호남론이다. 내용적 중량감과 종합성 면에서도 최초이자 최고라 할 만하다.
 
호남문제의 기원2: 박정희 시대
▲ 발제문 '호남과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호남문제를 논한 주동식 지역평등연대 대표. 스카이데일리
 
-그럴 수밖에 없었던 측면
박정희 산업화의 씨드머니는 한·일회담의 청구권협약 자금이었다. 원조 자금이란 원칙적으로 제공국 기업의 제품 구입에 쓰인다. 즉 한국의 경제개발은 일본경제 특히 관서 경제권과의 동조화 현상과 함께 진행됐다관서지방과 가까운 영남 해안 중심으로 공업벨트가 들어섰고 경남 일대는 한국 산업화의 전진 기지화했다.
 
박정희 정권이 지연·혈연·학연 등 연고주의 때문에만 영남에 집중투자했다고 보기 어렵다. 대형 선박의 입항이라는 조건에서도 조수 간만차가 크고 뻘이 많은 서해안 즉 호남 일대보다 영남 해안이 유리했다. 산업화에 필요한 자원의 절대적 부족으로 경제개발 효율을 높이기 위해선 선택과 집중 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자원 배분권을 중앙 정부가 장악할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중앙정부 및 수도권 비대화 현상이 본격화됐다. 영남 출신 엘리트 관료들의 자원 배분권 장악엔 일본 관서경제권과의 결합이라는 지정학적 요소 외 전근대적 연고주의도 어느 정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개발연대 주역인 영남패권의 형성이다.
 
박정희와 전두환 등 육사 출신 군부엘리트가 거버넌스의 중심에 선 현상도 자원부족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나눠 줄 자원이 적으니 권력을 유지하는 두 가지 수단인 당근과 채찍 가운데 채찍의 비중이 클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서 채찍 즉 저항을 억누를 물리력을 확보한 군부엘리트의 역할은 필수적이었다.
 
-영남은 산업화 전진기지로, 호남 농민들은 저임금 노동자로
경부(서울~대전~대구~부산)축이 한국 정치·경제를 움직이는 지배계층으로 등장한 반면 호남은 권력 및 이권 배분에서 소외됐다. 또 산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은 농촌사회의 해체를 통해 공급될 수밖에 없었다. 호남 농촌의 해체로 호남 농민들이 노동자나 도시빈민으로 옮겨 갔고 이 과정에서 분노·소외·저항 의식을 키우게 됐다.
 
원래 이방인은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 되기 쉽다. 하층민일 경우 더욱 심각하다. 호남 출향민은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이른바 공돌이·공순이로 불렸으며 오랜 역사적 혐오의 굴레까지 덧씌워졌다1960~80년대 고위 공직을 지낸 사람들조차 전라도 출신이라고 얼마나 설움을 당했는지 아느냐?” 토로하는 일이 많다. 그보다 못한 사회적 신분의 사람들이 어떤 경험을 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하숙집을 구하지 못해 고생한 이야기, 결혼 상대의 집안에서 전라도라고 반대해서 어려움을 겪은 이야기 등은 너무나 흔하다소외·차별의 체험은 호남 출신들끼리 똘똘 뭉치게 만든 요인이 됐으며 호남 출향민이라는 독특한 정체성 형성에 기여했다. 하층 노동자와 도시빈민 중심의 이런 성향은 출향민 3세까지 내려가도 호남 정체성을 유지하는 독특한 유권자 계층을 형성했다. 호남 출신들이 대한민국 최대의 유권자 집단으로 떠오른 배경이다.
 
주사파 성향의 경기동부연합 역시 광주(廣州)대단지사건을 계기로 형성된 도시빈민의 저항의식에 뿌리를 둔다. 호남 출신들의 분노와 소외감이 배경에 자리 잡고 있다. 1971810일 광주(廣州)대단지 사건은 청계천 일대 도시빈민들을 아무 대책 없이 경기도 광주 일대의 허허벌판으로 이주시키면서 비롯됐다. 굶주린 산모가 제 아기를 삶아먹었다는 루머까지 돌았고 분노한 군중이 폭도화했다
 
사실상 19805·18의 예고편이라 할 수 있다이런 상황과 그 1년 전 분신자살한 전태일 사건 등 노동자들의 계급적 각성과 함께 호남 출신들은 사회변혁운동 주력으로 본격 부상한다. 광범위한 분노와 소외의식에 기인한 저항의식이 사회적 계급의식으로 객관화하면서 반체제·반미반일·친북종중·반대한민국 의식으로 연결됐다. 이런 호남문제를 정치 의제화해 성공한 정치인이 김대중이다. 친북 주사파 세력은 호남의 이런 분노와 소외를 가장 잘 활용한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광주대단지 사건은 윤흥길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로 형상화됐다. 그 밖에도 호남의 소외감과 고향을 떠나온 이농 의식이 깊은 사회적·문화적 흔적을 남겼다. 민중음악가 김민기의 모든 작품, 심지어 영남 출신 나훈아의 고향역등 노래에도 호남 이농민의 정서가 담겨 있다.
 
-친북주사파와 호남의 제휴로 5.18 오염
박정희 시스템이 만들어낸 산업화는 드라마틱한 성공 스토리를 써냈으나 내부의 그늘도 짙어졌다. 특히 호남문제는 새로운 계급갈등과 오랜 역사적 배경의 지역갈등이 중첩된 형태로서 악성화의 최적 조건을 갖췄다. 그게 19805·18로 폭발했고 표면상 열흘 만에 진압됐지만 내용적으론 끝나지 않았다. 민주화운동의 상징자산이 됐으며 그 에너지가 87년체제 즉 6공화국을 성립시켰다고 본다.
 
5·18 당시 광주시민들은 태극기를 들었고 애국가를 불렀으며 북괴는 오판 말라현수막을 내걸었다. 계엄군과 대치한 상황에서도 거동 수상자를 붙잡아 계엄군에게 넘기기도 했다. 열흘가량 공권력 부재의 해방구 상태였지만 흉악 범죄가 거의 없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5·181980년 당시엔 분명 대한민국 헌정질서 수호를 위한 투쟁이었다고 평가해야 마땅하다. 다만 87체제 들어 호남과 주사파가 제휴하면서 5·18이 친북좌파의 상징자산으로 오염되는 경로를 밟게 됐다.
 
-5공 재평가 필요… 신군부와 5·18 정신은 헌정질서 내 동일한 지향점 
5공화국 재평가도 필요하다. 5·18의 원죄를 안고 있었지만 단일 정권으론 가장 큰 폭의 유연화·개방화를 단행했다. 야간통행금지 해제, 컬러TV 방송 개시, 프로 스포츠 시대를 열었다. ·고등생 교복 및 두발 자율화·연좌제 철폐도 이뤄졌으며 무역개방 확대와 금융실명제를 위한 준비도 진행됐다.
 
흔히 전두환 정권의 경제를 ‘3저 호황이라고 간단히 정리해 버리는데 가장 중요한 경제 조치인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을 단행한 게 5공화국이었다. 현재 대한민국이 먹고사는 근거가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박정희 시스템의 정부 주도형 경제개발과 산업화, 강압적 사회시스템의 한계 극복이라는 차원에서 80년 당시 신군부와 광주 시민군이 장기적으론 동일한 지향성을 가졌다고 본다. 5·18의 비극은 양자의 속도 및 방법론 차이가 우발적 충돌에 의해 빚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시효 다한 87체제… 박근혜 탄핵과 문재인정부 등장으로 의미 종언
87체제 성립으로 이젠 오로지 선거로 정권을 재창출해야 했다. 선거 필승전략이 필요해지면서 만들어진 것이 호남 고립구도라고 본다. 김영삼의 3당 합당이 그런 구도의 구체화였다. 이후 대한민국 차원의 모든 선거는 본질적으로 호남 대 대한민국구도로 정착됐다. 이것이 우파가 정권을 재창출하는 최강력 무기였다.
 
그러나 87체제가 호남·주사파 연합의 승리로 구축됐다는 게 문제다. 즉 호남·주사파(좌파) 연합이 87체제의 위너이자 오너의 위상을 가진다. 정치적 승리는 사회 전 분야를 아우른 정당성의 원천이었고 그래서 좌파연합을 쓰러뜨릴 수 없었다. 민주화가 우리 사회에서 갖는 의미도 그만큼 컸다.
 
민주화를 흔히 대통령 직선제 등 다수결과 주권재민 원리의 제도적 정착이라고 이해하지만 실제로는 일제시대 이래 꾸준히 확대돼 온 유연화·개방화·다양화·합리화 요구의 집약이라고 봐야 한다. 이런 요구의 구현이 6공화국이기에 대한민국 역대 공화국 가운데 6공화국 수명이 가장 길다. 체제 안정성과 국민의 체제 일체감이 강하다는 뜻이다.
 
애초부터 87체제는 권력독점을 방지하며 특정 세력의 장기집권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체제다. 대통령 5년 단임제 장치가 대표적이다. 결과적으로 87체제는 소유권 등기는 우파, 실제 소유권 행사는 좌파라는 기묘한 구조가 됐다. 대한민국 건국과 산업화라는 상징성의 위력을 무시할 수 없기에 형식적 소유권은 우파에게 주고 실권을 좌파가 장악한 구조다.
 
19903당 합당 이후 행정부에까지 좌파들이 대거 진출했다. 이후 학계·언론계·대중예술계까지 좌파의 영역으로 전환됐고 심지어 경제계에도 좌파 영향력이 확대된 상황이다. 87체제 성립 당시엔 좌파가 제도권 권력 진입을 못했기에 광범위한 풀뿌리 조직(시민단체) 건설에 주력했다. 근거지를 시민단체에 두고 인력과 어젠다를 제도권 정당(민주당·민주노동당 등)에 파견하는 형태로 좌파 빅텐트를 만들어 갔다.
 
한편 우파는 정치적 패배자 입장에 처하게 됐다. 보수 정당 내 개혁파 정치인으로 평가된 정치인들이 대부분 좌파 출신이거나 좌파 성향이다. 비슷한 문제라도 좌파 진영은 별 파장 없이 지나가는 반면 우파는 진영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타격을 입는다. 이 모든 것이 정치적 명분을 좌파에게 뺏겼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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