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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대한민국은 문화전쟁 격전지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는 혁명이론에 진지전 (陣地戰) 개념을 도입한 인물이다. 그의 이론이 풀뿌리 사회·교육 운동을 넘어 ‘총성 없는 이념전쟁=문화전쟁’의 논리적 토대가 됐다. 대한민국의 지난 20여 년은 그람시적 진지전의 가장 성공적 사례에 속할 것이다.
영화‧드라마 등 대중 서사의 메시지가 오피니언 리더 역할을 하게 된 지 오래다. 심지어 역사 교과서 노릇도 한다. 이에 대한 소극적 저항이 정부 지원금 배제 형태로 이뤄졌다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정국에서 관련 책임자들이 고초를 겪었다.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다.
총선을 한 달여 앞둔 요즘 극장가에선 역사‧이념의 대결이 치열하다. 무심히 영화를 즐긴다 해도 영향을 받게 돼 있다. 그 핵심엔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에 관한 세계관‧가치관이 자리한다. ‘대한민국은 어떻게 태어나 여기까지 왔나’를 보는 시각도 그 연장선에 있다.
고고학의 유물들을 살펴보면 인류는 선사시대로부터 자연사보다 피살에 의한 비명횡사의 형태로 죽음을 맞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수렵‧목축‧농경 시대를 거치며 인류의 생존 방식은 ‘무력에 의한 약탈’을 기본값으로 했다. 지구촌 문명사란 전쟁의 역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본질이 현대 들어서도 근본적으로 달라지진 않았다. 다만 대세가 ‘선거’ 등 비폭력적 방법으로 기울며 문화전쟁이 갈수록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대중예술인의 정치적 입장 표명이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다.
‘건국전쟁’ 열풍과 ‘기적의 시작’ 역주행… “아래로부터의 혁명”
지난달 1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27일 만에 관객 수 100만 명을 돌파했다. 4개월 앞서 개봉됐으나 배급‧홍보 열세로 고전한 ‘기적의 시작’(권순도 감독)도 지난달 22일 전국 CGV 등 100여 곳에서 재개봉 후 순항 중이다. 같은 달 28일 신촌 필름포럼 전석 매진, 29일 CGV용산아이파크몰 상영관 매진, CGV피카디리1958 상영관 매진이 이어졌다.
전 국회의원이며 일간지 만평가이기도 한 차명진 정치평론가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건국전쟁’의 성공으로) 그토록 어렵던 이승만 명예 회복의 길이 열렸다. 우리의 건국대통령이 무덤에서 걸어나오셨다”며 놀라워했다. 경기도 지사를 지낸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장은 2014년 광화문에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건립하자고 주장했다가 ‘극우’로 낙인 찍혀 정치생명에 상처를 입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한편 교회들의 ‘건국전쟁’ 단체 관람과 청소년 대상 관람비 보조 등이 ‘시장 교란’이라는 비판엔 트루스포럼 김은구 대표가 반박했다. 그는 2월23일 이데일리TV에서 공정거래위원회 등에 자문을 구한 결과 ‘문제 없음’이라는 답신을 받았다고 전했다. 오히려 2022년 관객 수 33만 명을 넘긴 ‘그대가 조국’이 새벽 시간 전석 매진된 채 객석은 텅빈 상태였던 게 비정상이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15년 이상의 취재을 거쳐 각본·촬영·나레이션 등을 홀로 감당한 김덕영 감독은 작품 흥행 덕분에 각종 매체 인터뷰와 방송 출연·강연 등으로 바쁘다. 그는 “더 이상 거짓 이데올로기로 한평생 대한민국만을 생각한 ‘이승만’이란 한 노인을 죽이는 일은 멈춰야 한다는 바람에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거듭 밝혔다.
김 감독은 작품의 성공과 관련해 “총선을 앞두고 중도층이 크게 각성하는 계기”임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진면모를 처음 접한 관객들의 충격은 (감동의) 눈물·(죄송한 마음의) 탄식·(감사의) 박수로 표출되고 있다. ‘건국전쟁’은 미 의회와 유엔에서도 상영될 전망이다.
중고생과 청년 대상 ‘건국전쟁’ 소감 발표회도 김 감독 사회로 열렸다. 학교 선생님들의 역사관에 반발해 역사 블로그를 운영한다는 한 고교생이 ‘건국전쟁’을 몇 번이나 본 감동을 소개하는가 하면 유튜브 채널 학생의소리TV 이명준 대표는 ‘건국전쟁’의 열풍을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좌편향된 역사교육에 맞서 풀뿌리들이 진실을 찾아나선 결과”라는 것이다. “거짓과 반(反)대한민국 역사를 주입해 온 전교조 선생님들”을 향해 중고생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현 전선(戰線)에서 이승만과 대한민국 정통성을 밝혀 낸 ‘건국전쟁’의 대척점에 ‘서울의 봄’이 버티고 있다. 지난해 11월 개봉돼 누적 관객 수 1300만 명을 넘긴 ‘서울의 봄’은 픽션임을 내세우며 팩트 무시·자의적 해석에 기반한 영화다. 지난달에 나온 다큐 영화 ‘길위에 김대중’의 흥행이 기대에 못미친 가운데 영화 ‘파묘’가 등장했다. 나흘 만에 200만, 10여 일 만에 600만 관객을 돌파해 ‘서울의 봄’ 이상의 빠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이승만을 ‘파묘’하라?… 영화 ‘파묘’의 反日 기조
오컬트 미스터리 ‘파묘’의 흥행몰이로 ‘건국전쟁’의 박스오피스 순위도 하락했다. ‘파묘’는 일제시대 때 벌어진 이야기를 풍수지리와 무속신앙을 결합해 펼쳐 낸다. 김 감독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유해를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는 도올 김용옥의 과거 발언을 인용하며 “영화 ‘파묘’에 좌파들이 열광하는 이유”로 해석해 눈길을 끌었다.
김 감독의 ‘파묘’ 발언에 반발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대한민국을 보는 관점에 기인한다. 그들은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 ‘친일 적폐 세력이 지배해 온 나라’로 본다. 그 반대편에 ‘20세기 중반 유라시아 끝자락에서 기적처럼 수립된 자유민주공화국’이자 ‘우여곡절의 산업화·민주화를 거치고 선진국 반열에 든 인류의 희망’으로 대한민국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김 감독은 SNS를 통해 ‘파묘’ 흥행에 유감을 토로했다. “항일 독립? 또다시 반일주의를 부추기는 ‘파묘’에 좌파들이 몰리고 있다. ‘건국전쟁’에 위협을 느낀 자들이 ‘파묘’로 분풀이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진실의 영화에 눈 감고 미친듯 사악한 악령들이 출몰하는 영화에 올인하도록 이끄는 자들이 누구냐”고 물었으며 상영관 및 스크린 감소를 우려했다. “대안은 오직 하나, (‘건국전쟁’ 지지자들의) ‘단결’”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서울의 봄’이 그렇듯 ‘파묘’에도 실존 인물들을 연상시키는 이름들이 등장한다. ‘원봉’(인민군 원조 김원봉) ‘봉길’(의열단원 윤봉길) ‘화림’(조선의용군 이화림) 등 첫눈에 반일 정서가 읽힌다. 펜앤마이크를 이끌던 정규재 전 한국경제 주필이 이런 기조를 더 구체적으로 논했다.
정 전 주필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파묘’에 출연한 젊은 배우들의 외모와 연기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작품성에 대해선 “반일 종족주의를 부추기는 판타지형 하얀 코디미”로 평가절하했다. 관(棺)에서 중세 일본의 실질적 최고권력자 쇼군(將軍)의 유령이 출몰하는 것을 들며 ‘과도한 반일 컴플렉스’를 개탄하기도 한다. 일제시대의 측량용 쇠말뚝을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서였다”며 분개한 감성·논리와 연결되는 부분을 꼬집기도 했다.
반일주의 역사관은 조선이 19세기 인류문명사의 대격변과 동떨어진 채 쇄국을 고집하다 망국에 이른 세계사적 맥락을 살피지 않고 오로지 일본의 팽창주의가 초래한 희생자임을 강조한다. 이런 시각을 사실상 전근대적 ‘종족주의’로 논증한 이승만학당 연구진의 지적은 여전히 학계 안팎의 주류가 아니다.
‘김일성의 아이들’ 비극을 추적하다 ‘이승만의 나라’를 발견하다
김 감독 역시 한때 586세대 특유의 세계관·역사관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다수가 그러했듯이 그 또한 운동권 논리에 몰입되거나 저항을 보이거나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럴 만한 지식·정보와 논리의 축적이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영화계의 성향은 이른바 민주화시대의 그것으로 충만하다. 통념을 비틀며 진실을 추구하는 게 예술의 기본 정신이긴 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 대중예술계의 현실은 김대중정부 이래의 정치적 변화에 힘입은 바 크다.
이승만을 다룬 다큐 영화의 기획 아이디어가 ‘김일성의 아이들’ 제작 과정에서 얻어졌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김 감독은 서강대 철학과 선배인 박찬욱 감독의 제보로 북한 전쟁고아 1만 명의 운명을 추적하게 됐다. 출발은 1950년대 고아들의 인솔자였던 ‘북한사람 남편’을 기다리는 ‘루마니아 할머니’였다.
공산 진영의 연대를 과시하고자 스탈린의 독려 하에 동유럽에 분산 위탁됐던 북한 전쟁고아들이 스탈린 사후 정치적 격변 속에서 50년대 말 전격 송환당한 뒤 역사에서 소멸됐다. 김 감독은 북한 고아들의 동유럽 생활을 담아낸 생생한 영상들을 통해 김일성 우상화가 해방 직후 6·25전쟁 이전에 이미 진행됐음을 확인했다.
김 감독은 영화 제작을 위해 북한 관련 자료를 접하며 1990년대 후반까지 “이승만 괴뢰도당 타도”를 외쳤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김일성의 나라’와 대척점을 이루는 ‘이승만의 나라’의 탄생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김 감독은 자신의 세계관‧역사관을 바로잡게 된 듯하다. 최근 김 감독의 발언은 역대 그 어느 보수 인사 못지 않게 직설적이며 명쾌하다. ‘건국전쟁’ 이후 여러 인터뷰에서 김 감독은 ‘이승만 죽이기’가 북한 대남공작의 일환이라는 점을 적시했다.
“이승만 90평생… ‘건국전쟁’ 최소한 5편까지 간다”
조우석 평론가가 “우파 시민들의 쌈짓돈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 표현했듯 ‘건국전쟁’은 펀딩에 시간이 걸렸고 개봉도 예정보다 많이 늦어졌다. 그렇게 모아진 제작비 2억 원으로 뛰어난 가성비를 발휘했지만 충분히 다루지 못한 많은 내용을 위해 자연스레 속편을 기대하게 됐다.
지난달 29일 용산아이파크몰 CGV에서 건국전쟁 속편 제작발표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영국인 작가·칼럼니스트 마이클 브린은 속편의 방향성과 관련해 중요한 언급을 했다. 즉 이승만의 자유민주공화국 ‘건국’이 ‘(6·25)전쟁’을 통해 역설적으로 일단락된 점, 남북을 아우르는 통일코리아는 대한민국의 확장이 아닌 한 존재 불가능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점 등이다.
김 감독은 ‘건국전쟁’이 최소한 5편까지 만들어져야 할 만큼 이승만의 90평생은 방대하다며 ‘살인마 이승만’의 논리로 흔히 인용되는 제주4.3의 진상을 제3편쯤에서 다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4.3기념관 전시물 가운데 미 군정에 탄압받는 양민으로 설명된 사진 자료의 원본을 찾아본 결과 ‘살인죄를 자백한 두 사람’이었음을 간략히 소개하기도 했다. ‘6·25전쟁 때 시민 수백 명 희생’의 자료로 통용돼 온 장면이 평양 대동강교였음을 밝혀 낸 것도 ‘건국전쟁’ 팩트의 힘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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