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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프랑스명소산책] 프랑스 삼색기(三色旗)의 구세주 라마르틴과 마콩
알퐁스 드 라마르틴의 영혼이 숨 쉬는 곳
거리와 광장 곳곳 역사의 비밀스러운 장소
최인숙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3-19 18:21:18
▲ 최인숙 문화칼럼니스트·정치학박사
프랑스의 상징 삼색기. ··적색. 이 세 가지색은 자유·평등·박애를 상징한다. 이 깃발은 프랑스 혁명기에 탄생했다. 혁명가들은 이 깃발을 옷깃에 달았다. 혁명 기간 동안 자랑스럽게 달고 휘둘렀던 삼색기는 진보의 이념과  새로운 정치사상을 상징했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색의 기원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일설에 의하면 청색과 적색은 파리의 색깔이고 흰색은 군주제를 상징한다고 한다. 또한 세 가지 색이 세 개의 세로 줄무늬로 결합된 것은 파리 시민, 더 나아가 프랑스 국민과 국왕의 완벽한 조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보면 삼색기는 1793121일 콩코드 광장에서 루이 16세가 참수된 이후에는 시대착오적인 국기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설은 공화국과 자유의 색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1794215, 국민회의는 삼색기를 법으로 채택해 프랑스 국기로 공식 지정했다. 이로써 삼색기는 파리라는 소우주에서 프랑스 전역으로 그 영역이 확대됐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 국기를 모스크바와 식민지 제국을 거쳐 카리브해·아프리카·동남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으로 가져갔다. 폴란드와 이탈리아 등 억압받던 민족에게는 해방의 상징이자 자유·평등에 대한 새로운 사상의 도래를 의미하기도 했다. 아일랜드도 1830년부터 프랑스 혁명을 기념해 영국에 맞서 녹색·흰색·주황색 삼색기를 국기로 사용했다. 안도라는 프랑스 및 카탈루냐와 동일한 구도와 색상을 채택해 국기를 만들었다. 루마니아와 몰다비아는 세로 줄무늬를 채택했다. 노르웨이 국기는 자유의 상징인 프랑스 국기의 청색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 당시 덴마크 국기와 거의 같은 청색을 추가했다. 이렇게 삼색기는 19세기 내내 많은 국가에 영감을 주며 큰 영향을 끼쳤다.
 
▲ 삼색기를 지키기 위해 명연설을 펼치는 라마르틴. 라마르틴 성
 
그러나 삼색기의 일생은 순탄치 않았다. 나폴레옹이 1815년 워털루전투에서 패배한 직후 왕정복고 시대의 백기로 대체됐다. 그리고 18307월 혁명이 일어났던 27·28·29, 영광의 3(Trois Glorieuses)’에 다시 등장했다. 혁명가들은 루이 18세의 후계자인 샤를 10세의 절대주의 통치에 대항하는 공화주의 단결의 표시로 삼색기를 자랑스럽게 게양했다. 의회 군주제를 지지하고 라파예트의 지원을 받은 루이 필리프가 왕위에 오르면서 삼색기는 재부활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1848년 또 다른 혁명이 일어나 위기에 처했다.
 
필리프 왕의 실정으로 프랑스는 심각한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위기에 놓였다. 그러자 비참한 처지의 사람들과 자유주의자들은 청··적색 깃발이 아닌 붉은 깃발을 흔들며 새로운 공화국을 요구했다. 고립되어 평온을 되돌리지 못한 채 무력 사용을 거부한 왕은 18482월 강제 퇴위당했다.
 
당시 인기가 절정에 달했던 야당 대표 라마르틴은 시청 광장에서 공화국을 선포하고 삼색기를 유지해야 하는 당위성을 피력했다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삼색기를 대신해 붉은 깃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를 채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애국심을 다해 반대하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삼색 깃발은 공화국과 제국, 그리고 여러분의 자유와 영광과 함께 전 세계를 여행했습니다.  붉은 깃발은 오직 샹 드 마르스를 돌아다니며 국민의 피에 끌려 다녔습니다. 나는 이 피의 깃발을 죽을 때까지 거부할 것이며, 여러분은 나보다 더 많이 거부해야 합니다!” 
 
이 명연설 앞에서 붉은 깃발을 든 시위대는 숙연해졌다. 이렇게 위기를 탈출한 삼색기는 오늘도 도도히 개선문 광장을 지키며 펄럭이고 있다.
 
▲ 라마르틴의 고향 마콩. 위키피디아
 
삼색기의 구세주 라마르틴. 이 저명한 정치인은 17901021일 마콩에서 태어났다.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한 것은 18307월 혁명 때이다. 프랑스 북부 지방 영주의 아내였던 그의 누나 외제니 때문이었다. 그녀는 동생에게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을 권했다. 라마르틴 자신도 어수선한 세상을 바꾸는 길은 정치 참여에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가 1832년 베르그의 한 호텔 방에서 쓴 네메시스의 노래(l’Ode à Némésis)’라는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로마가 불타는데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네로의 영혼과 눈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말이죠불은 무서운 강물처럼 휘감는데/ 신전에서 궁전으로/ 서커스장에서 판테온으로!
 
라마르틴은 투쟁의 시대에 시인의 역할이 오로지 시 쓰는 것에 한정되는 것에 반대했다. 정치에 개입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자유를 위한 투쟁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반박했다. 결국 라마르틴은 183317일 누나가 살고 있는 베르그(Bergues) 지역 선거에 출마했. 그는 동방을 여행하던 중 여행지에서 자신의 당선 소식을 들었다. 그 후 1839년 재선됐다. 그러나 라마르틴은 고향 마콩에 가서 정치하길 원해 지역구를 옮겨 활동했다. 결국 그는 1848년 혁명에 참여해 제2공화국의 주역이 됐고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루이 나폴레옹과 대결한 대선에서 패배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라마르틴은 정치적 책임을 지고 파리에서 활동했지만 한 발은 항상 고향 마콩에 머물러 있었다. 시간이 날 때면 마콩의 집으로 돌아가 포도밭을 가꾸고 글을 쓰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1869228일 파리에서 사망했지만 장례식은 마콩에서 치러졌다. 마콩 사람들은 라마르틴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155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고향에선 추모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마콩은 기원전 2세기에 켈트족에 의해 건설돼 중세시대에 번영한 도시다. 프랑스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 사이의 국경 도시로, 빛나는 건축 유산은 마콩의 역사를 증명한다. 마콩의 거리와 광장에는 비밀스러운 장소가 많다. 1490년 경에 지어진 상징적인 메종 드 브아와 찡그린 얼굴의 부조로 조각된 외관을 비롯한 많은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 옛 성당의 현관과 함께 유일하게 남아 있는 비외 생 뱅상(Vieux Saint-Vincent) 탑은 2011년 지역 유산상을 받았다. 이 두 개의 로마네스크 양식 탑은 꼭 한번 찾아봐야 할 만큼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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