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을 공부하며 ‘평화’와 ‘자유’의 가치를 몸소 느꼈다는 장성구 명지춘혜재활병원장은 코로나19가 본격화한 2020년 초부터 4년 동안 전국 16개국 참전비를 자전거로 찾아다녔다. 전공의 시절부터 6·25 참전 용사들의 재활 치료를 하며 불가역적 부상과 장애를 입더라도 국토를 수호한 이들의 자긍심과 애국심으로부터 의사의 삶에 가치를 부여받았다는 장 원장. 그의 버킷리스트는 전국에 세워진 6·25참전비의 역사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코로나19가 터져 외부 활동이 극도로 제한됐던 당시 그의 유일한 삶의 활력소는 자연스럽게 ‘자전거 참전비 투어’가 됐다. 오랜 소망이 코로나19라는 악재가 호재가 된 것. 이후 4년 주말과 휴일에는 자전거를 타고 전국 곳곳에 건립된 참전비의 흔적을 찾았다. 코로나19가 끝난 현재에도 몸에 배어든 습관처럼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전적지와 참전비 투어를 지속하고 있다.
장 원장은 “지난해 가을에는 양평 지평리 프랑스군 참전비와 강원 춘천의 에티오피아 참전비 그리고 평택의 남아프리카공화국 참전비를 다녀왔다”며 “최근에는 파주 적성면 설마리의 영국군 참전비를 자전거로 다녀왔다”고 소개했다.
장 원장 소개대로 전국에는 유엔군 및 국가별 16개국 참전비가 기념비 형태로 건립됐다. △미국군 참전비(1975·경기도 파주시)△영연방 참전기념비(1967·경기도 가평군) △캐나다 전투기념비(1983·경기도 가평군) △프랑스군 참전기념비(1974·경기도 수원시) △호주 전투기념비(1963·경기도 가평군) △뉴질랜드 한국전쟁 참전기념비(1988·경기도 가평군) △터키 참전기념비(1974·경기도 용인시) △그리스군 참전기념비(1974·경기도 여주시) △필리핀 참전기념비(1974·경기도 고양시) △타일랜드 참전기념비(1974·경기도 포천시) △남아공 참전기념비(1975·경기도 평택시) △이디오피아(에티오피아) 참전기념비(1968·강원도 춘천시) △네덜란드 참전기념비(1975·강원도 평창군) △콜롬비아 참전기념비(1975·인천시 서구) △룩셈부르크·벨기에 참전기념비(1975·경기도 동두천)△의료지원단 참전기념비(1976·부산시 영도구) △유엔군 초전기념비(1982·경기도 오산시) 등이다.
장 원장은 정부가 세운 참전비 외에도 민간에서도 참전비를 세운 사례가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노르웨이는 의무부대만 파견한 국가인데 소요산역 근처에 참전비가 있다”며 노르웨이 의무부대에서 일하시던 한국인들이 1970년대 초반에 세웠다”고 했다. 이어 “가평에도 미군 참전비가 따로 있는데 40사단 주둔지였던 곳이라 미군 40사단과 2사단을 기리는 미군 참전비”라고 덧붙였다.
장 원장은 참전비 앞에서 ‘6·25 전쟁’ 당시의 현장을 떠올리며 먹먹하게 올라오는 감정을 억눌러야만 했다고 밝혔다. 국제군의 뜨거운 선혈 위에 지켜진 자유대한민국의 진정한 가치를 거듭 떠올린 것이다. 그는 “한국 전적비가 세워진 곳에서 한강의 기적이 시작된 곳이 많다”며 “일례로 지평리 양조장 건물을 프랑스 참전용사들은 대대본부로 사용했는데 그 건물에서 막걸리 만들던 분의 자손들이 계속 막걸리 만들면서 지금의 지평막걸리가 됐다”고 했다. 이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욥기 8장7절 성경 구절 말씀이 우리나라의 산 역사가 아니겠느냐”고 덕담을 건넸다.
계속해서 장 원장은 “‘6·25 전쟁 당시 군을 진두지휘했던 백선엽 장군은 30세였고 정일권 32세·장도영 27세 등 장성으로 참전할 나이가 안 됐다”면서 “김석원 사단장 아들은 장교 박정희와 일본육사 동기로 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군으로 전사했다”고 국군 장성의 노고를 기렸다. 미군 장성 아들들이 현역 군으로 참전한 6·25 전쟁에서 한국군 장성들의 나이도 그에 못지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은 실종됐고 아이젠하워·워커·패튼 장군의 아들들은 군인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고 부연했다. 한국과 미국의 피 끓는 젊은 군 장교들의 자유주의체제 수호를 위한 전 방위 전투가 전국 곳곳에서 이어진 것으로 풀이 된다.
6·25전쟁은 ‘국제전’이었다. 당시 전쟁 발발 이틀 만인 1950년 6월27일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는 국제평화와 한반도 안전을 위해 한국에 군사원조를 제공하기로 했으며 7월7일 유엔 회원국 군대를 통합지위 할 유엔군이 창설됐다. 유엔 창설 이래 처음으로 유엔기를 앞세워 21개국이 6·25 전쟁에 참전한 세계사적 순간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전투 병력을 파견했으며 5개 국가가 의료지원을 보냈다. 40여 개국은 물자를 지원했다. 전쟁 기간 이들 다국적군으로 참전한 유엔군 참전용사들은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나지도 못한 사람’들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전장이나 후방에 파견됐다. 6·25전쟁 인명피해 총 77만6360명 중 15만4881명에 달한다. 휴전 이후 정부는 이 같은 유엔군 참전용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부산 유엔 기념공원을 비롯한 전국에 69개 유엔 참전 기념 시설물을 건립했다.
유엔군뿐만 아니라 현장비 등의 투어도 마다치 않은 장 원장은 “6·25 남침 당시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이뤄지고 휴전까지 이어지는 그 3년의 전쟁 기간 휴전으로 매듭지어지며 우리나라는 형제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모여 맹목적 목적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위해 이곳에서 희생당했다”고 다시금 역사적 의의를 살폈다. 그는 “수백 명의 양민들이 북한 인민군에 단지 ‘남한’ 국민이라서 ‘학살’당한 현장을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하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다”고 밝혔다.
장 원장의 뇌리에 또렷하게 박힌 기념비는 양평 자전거길에서 발견한 ‘6.25 양민학살현장비’였다. 힘없는 민초들이 북한군의 모진 집단 학살을 견뎌야만 했던 비극의 역사를 기록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담담한 표정으로 장 원장은 “1950년 9월25일 한가위 전야 양평읍 떠드렁산 백사장에서 9월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600여 명을 양평 6·25 참전 백사장에서 무차별 학살한 것으로, 대부분 반동분자로 낙인찍힌 이들이 이유도 모른 채 학살당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장비에 ‘통곡의 그날’이라는 시비가 당시의 경위를 말해주는 데, 극도의 공포 속에서 양민들이 백사장의 큰 구덩이에 빠진 후 죽창과 몽둥이로 맞아 죽는 장면이 떠올랐다”고 했다.
2022년 10월 경기도 파주 적성면 설마리 영국군 참전비도 소개했다. 장 원장은 “기념비를 만든 이가 당시 6·25 참전 병사였던 아널드 슈워츠만(Arnold Schwartzman) 감독”이라며 “1957년에 미술대를 졸업하고 정전감시단 경계병으로 파병됐던 영국인 슈워츠만이 3일 동안 이곳에서 중공군의 훈련을 막아 낸 글로스터셔 연대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설마리 전투 기념비를 건립했다”고 밝혔다. 이곳은 2014년 4월 국가보훈처와 경기도가 지원해 추모 공원으로 꾸며졌다.
장 원장은 “이 분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다큐멘타리 대량학살(genocide·1982)로 오스카상을 받은 영화감독이 됐다”고 소개했다. 장 원장은 참전 당시 21세였으나 현재는 세계 디자인계 거장이자 산업디자이너이자 아카데미상 수상 감독으로 슈워츠만 감독의 2007년 인터뷰 기사를 인용했다.
슈워츠만 감독이 참전한 기간은 1956·1957년에 걸쳐 11개월로 미군 면세점에서 8㎜ 촬영기를 구매해 파주 적성면 일대의 군부대와 마을을 촬영한 ‘조용한 아침의 나라’ 15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 시상식을 위해 방한했을 당시 인터뷰 글이었다.
인터뷰에서 슈워츠만 감독은 “영국은 한국전 발발 후 군부대를 파견해 1957년 7월 철수하기까지 총 8만7000명을 파병했으며 이 가운데 1108명이 전사하고 2674명이 부상했다”며 “50년 전 인천항에 도착했을 때 진흙에 빠져 고생했는데 세계 어디에서도 50년 만에 이렇게 변한 나라는 찾아볼 수 없으며 이 기적은 한국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 경의를 표했다.
‘세계 의학 역사’를 한 층 끌어 올렸던 현장도 외상환자가 너무나도 많아 외과 수술을 무궁무진하게 할 수 있었던 전 세계 임상 수술의 산 공간도 6·25전쟁 당시였다. 장 원장은 “존스홉킨스 일반외과 레지던트 등 세계 명문 의대에서 한국군에 군의관으로 파견됐다”며 “팔과 다리가 절단될 뻔한 사람들을 외국 군의관이 다량의 혈관이식 수술을 거듭 계속하며 살려냈다”고 했다. 이어 “이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논문을 내고 세계 유수 명문대학교 외과 주임교수가 됐으며 세계적 외과 집도 명의가 엄청나게 많이 배출됐다”고 소개했다.
한국 의학도 전쟁으로 발전했음을 강조한 장 원장은“한국의 자랑이자 명의 중 명의인 이용각 교수도 마찬가지로 경성의전(경성 의학전문학교)을 졸업하고 일본군 군의관으로 입대해 의대 위생학 교실에서 조교로 일하다 6·25를 맞아 미군 군의관으로 참전하고 장진호 전투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이어 “휴전 후에 미국에서 외과 수련 받고 귀국하셔서 한국 최초의 신장이식 수술을 집도하셨고 가톨릭대학병원장과 인하대 병원장을 했다”며 “당시 한국에 온 군의관들이 전쟁고아에 다친 군인과 양민까지 총탄에 맞은 이들, 지금으로서는 꿈도 못 꿀 외과수술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했다.
장 원장은 “전후에 이를 기반으로 논문도 쓰고 의술 기법도 발전시켜서 의학이 정말 많이 발전했다”며 “당시 6·25 전쟁에 참전했던 군의관들이 모두 세계적 명의로 성장했다”고 미소를 띠었다.
후원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