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업계에서 ‘정산 주기’가 새해 핵심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정부가 납품대금 정산 기한을 절반 가까이 단축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플랫폼과 유통업체 전반에 걸쳐 거래·자금 구조 전반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압박이 커지고 있다.
4일 업계에 따르면 공정거래위원회는 ‘대규모유통업에서의 거래공정화에 관한 법률(대규모유통업법)’ 개정안을 올해 초 발의할 계획이며, 법 통과 이후 최대 1년의 유예기간을 두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개정안의 핵심은 납품대금 정산 기한 단축이다. 납품업자로부터 상품을 직접 매입해 판매하는 ‘직매입 거래’의 법정 정산 기한은 기존 60일에서 30일로 줄어든다. 유통사가 상품을 외상으로 매입해 판매한 뒤 대금을 지급하고, 미판매분은 반품하는 ‘특약매입’ 또는 위수탁 거래 역시 정산 기한이 40일에서 20일로 단축된다. 다만 직매입 거래라도 월 1회 정산 방식의 경우 매입 마감일로부터 20일 이내 지급하도록 예외 규정을 뒀다.
이번 제도 개편 논의는 2024년 티몬·위메프(티메프) 대규모 미정산 사태 이후 본격화됐다. 판매는 이뤄졌지만 정산이 지연되며 납품업체와 입점 판매자의 피해가 연쇄적으로 발생했고, 일부 정산금이 운영자금으로 유용됐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현행 제도의 한계가 드러났다는 평가다. 여기에 최근 쿠팡을 둘러싼 책임 논란까지 겹치며, 대형 플랫폼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거래·결제·정산 구조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커졌다.
공정위가 대규모유통업법상 대규모 유통업체 132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업계 평균 대금 지급 기간은 직매입 27.8일, 특약매입 23.2일로 법정 상한보다 상당히 짧은 수준이다. 그러나 일부 대형 유통사는 법이 허용한 최대 기한에 가깝게 정산 주기를 운용해 왔다. 쿠팡의 직매입 정산 주기는 평균 52.3일에 달했고, 다이소 59.1일, 마켓컬리 54.6일, 홈플러스 46.2일, 홈플러스익스프레스 40.9일, 전자랜드 52일, 영풍문고 65.1일 등도 평균을 크게 웃돌았다.
공정위는 이들 업체가 대금을 여러 차례 나눠 지급하는 수시·다회 정산 방식을 활용해 지급 시점을 지연해 왔다고 보고 있다. 법정 상한 규정이 도입된 이후 오히려 정산 주기를 최대치로 맞춘 사례도 확인되면서, 제도 악용 소지가 크다는 판단이다.
개정안이 시행되면 쿠팡, 홈플러스, 다이소 등 대형 유통업체는 정산 시스템과 자금 운용 전반을 재설계해야 한다. 업계는 법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준비 기간과 세부 설계가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한 이커머스 업계 관계자는 “납품업체 보호라는 방향성에는 이견이 없다”면서도 “물류·I정보기술(IT)·정산 시스템이 모두 연결돼 있어 법안 윤곽이 명확해져야 현실적인 대응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플랫폼 업계에서는 자금 여력이 부족한 중소 플랫폼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정산 기한을 일괄적으로 줄이면 일부 사업자는 유동성 부담을 견디기 어려울 수 있다”며 “규모별 차등 적용이나 정책 금융 지원 등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업계 관계자는 “정산 주기 단축 자체는 바람직하지만, 거래 유형과 기업 규모가 다양한 만큼 일률적 적용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며 “유통 구조 변화와 자금 흐름을 면밀히 반영한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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