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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의 역사왜곡 어디까지 하고 있나 <188>

지나와 일본은 왜 우리역사 조작하나

우리 민족은 대륙 지배한 위대한 민족이기에서다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1-01-09 12:05:26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우리나라 역사 왜곡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왜곡의 길을 걷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일부분일 뿐이다. 우리 역사를 가장 많이 왜곡한 것은 고대부터 왜곡해 왔다. 그런데 우리는 광복 이후에도 우리 역사가 왜곡되기 시작한 시기와 조작 사실도 제대로 파악 못하는 사가(史家)가 많고 연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현재도 일제가 조작하고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며 바른 역사를 말하면 그 사실을 부정하기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노라면 차마 볼 수 없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이다.
 
환국과 배달국 역사는 아예 논하지도 않고, 고조선을 기준으로 우리 역사가 반만년이라 하며 ‘반도사관’에 입각해 우리민족사를 국가영토(半島)에 맞추어 서술하는 국가사관(國家史觀)에만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음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우리는 ‘민족사관’에 입각해 역사를 펼쳐야 하는데도 반도사관자들은 상고시대와 고대의 우리영역을 숨기고, 국가의 기원도 말이 아니게 숨기고 덮으며 자신이 얼마나 조상과 국가민족에게 역적행위를 자행하고 있는 자아무지(自我無知)임도 모르고 있다.
 
우리가 상고시대부터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고 삼국시대도 대륙을 정벌하고 정복해 지배한 기록이 엄연히 우리 사서와 지나(支那)의 사서(史書) 25사(史) 등에서 볼 수 있다. 또 우리민족의 영역(領域)이 삼국시대에도 서화(西華)에서 반도까지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일제강점기에 왜곡한 것을 우리 역사라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살펴본 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加羅;伽倻)와 왜(倭)도 대륙에서 건국해서 정립(鼎立)했음을 부인 할 수가 없다.
 
삼국시대 김유신(金庾信)의 조상인 헌원능(軒轅陵)이 서화(西華)서쪽 섬서성에 있고, 김유신의 활동무대도 항성(項城)을 중심으로 대륙인데 경주에 김유신 묘를 만든다고 해서 그가 반도사람이 될 수 없다. 김유신의 백제와의 전투지명도 모두 대륙이기에 의자왕(義慈王)과 김유신(金庾信)이 반도에 있었다고 조작을 해봐도 의미가 없다.   
 
우리나라 역사는 95%이상 대륙에서 건국하고 발전하고 대륙에서 멸망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러한 역사왜곡은 어느 시대 어떤 경로로 되었는지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나라 역사왜곡은 어떤 경로로 조작되었나
 
왜곡된 역사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 민족은 세석기문화(細石器文化)이래 1만년 이상의 역사를 가졌으며, 환국시대에는 문자가 없었으나 배달국시대 포희씨(包犧氏)의 팔괘(八卦), 창괄의 문자, 은왕조(殷王朝)의 갑골문자(甲骨文字)등, 많은 문자가 우리민족에 의해서 창조되어 창조자로서 그 서적도 남기고 있다.
 
고조선에는 신기비사(神祇秘詞)가 있었고, 고구려 왕조는 그 국초(國初)에 단조(檀朝)로부터 그 당시에 이르기까지 사실(史實)을 100권에 수록해 그 이름을 ‘유기(留記)’라 했다. 그 후 신라에는 신라본기(新羅本紀), 고구려에는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백제에는 백제본기(百濟本紀)등이 있었음은 우리 고문헌과 일본서기에도 전한다.
 
이러한 사적(史籍)들이 모두 외적의 침략과 자국인이 우거(愚擧) 등으로 인하여 모조리 없어졌다. 제1차의 화앙(禍殃)이 고구려 동천왕(東川王)18년;서기244년) 위장(魏將) 관구검(毌丘儉)의 환도성(丸都城)에 쳐들어와서 모든 전적탈거(典籍奪去)였다.
 
제2차는 백제 의자왕(義慈王) 20년(서기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한 사비성(泗泌城)의 함락과 그 초토화였고, 제3차가 고구려 보장왕(寶藏王) 21년(?서기668년) 당장(唐將) 이적(李勣)의 평양성 공함(攻陷)과 일체(一切)의 전적수거(典籍收去)였다. 
 
제4차는 신라 경순왕(敬順王) 원년(927년) 후백제왕 견훤이 신라 왕도에 들어가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경순왕을 세운 다음, 신라의 전적(典籍)을 전주(全州)에 이관(移管)했다가 935년 고려 국조(國祖) 왕건(王建)에게 토멸(討滅) 당할 때에 소진되었다. 
 
제5차는 고려인종(仁宗)7년;1129년), 금(金)나라에 속해 서표(誓表)를 바친 후 금제(金帝)의 제압하에서 주체성 있는 수많은 고적(古籍)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제6차는 고려 고종(高宗)20년(서기1233년)이 몽골에 패한 고려조에 홀필열(忽必烈)의 위풍(威風)이 떨치자 지금까지 사용해 왔던 황경(皇京), 제궁(帝宮) 등의 이름이 없어지고, 해동천자(海東天子)의 팔관악부(八關樂府)가 금지되고,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삼국사(三國史)등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제7차는 1392년 조선조가 성립되자 태종(太宗)이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송제(宋制)에 의해 설치하는 등, 유교를 크게 장려 할 때에 유학도(儒學徒)가 이단시(異端視)하는 일체의 문헌들을 소각한 것이다. 
 
제8차는 선조(宣祖)25년;1592년) 5월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도성(都城)이 함락되자 이 때 수많은 전적(典籍)이 난민(亂民)들의 방화(放火)로 인해 소실(燒失)된 일이다. 
 
제9차는 이괄(李适)의 난(亂;1624년)과 병자호란(丙子胡亂;1636년) 때에 무수히 소실(燒失)된 일이다. 그리고 제10차는 대한제국을 강점한 군국일본(軍國日本)이 22만수천권을 소각한 것도 모자라 군경을 동원해 사대부들의 서적을 거둬들여 불사르고 빼앗고 삭찬(削簒)하고 혹은 개조해 놓은 것 등의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같이 1000여 년에 걸친 사적(史籍)들이 소탕작업중에서 기적적으로 남은 것은 삼국사와 삼국유사 정도로 우리 역사에 관한 역사기록들을 없애버렸는데 이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일로 용납할 수 없는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사서의 잘못도 그 배경 등 제대로 봐야 
 
먼저 삼국사를 보면 이는 상고사와 고대사를 언급하지 않고 그 첫머리에 신라박혁거세를 원년(元年)으로 해 우리 민족사의 상부를 잘라버린 점이었다. 
 
고려 인종(仁宗)13년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는 환국과 배달국 및 고조선을 빼고 삼국시대 역사만을 기록해 사대주의자로 낙인이 찍히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것은 누가 우리의 상고시대의 역사를 빼고 조작하거나 왜곡하기 위해 덮은 것인지는 연구 과제가 되고 있다. 필자도 이런 점을 보고 삼국사를 무시한 적이 있었다. 외세에 의한 것인지, 도저히 납득이가지 않는 것은 상,고대사가 없는 점이다. 
 
이로 인해 최남선(崔南善) 선생이나 신채호(申采浩) 선생도 삼국사를 무시한 것을 잘 알고 있다. 신채호 선생은 ....“조선조 세조대왕이 전적(典籍)을  널리 세상에 구할 때 ‘고조선비기(古朝鮮秘記)’. ‘지공기(誌公記)’, ‘삼성비기(三聖秘記)’등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깁부식 때에 그러한 전적(典籍)이 없을 리 만무한데 이를 후세에 전하지 아니하고 후세의 사록상(史錄上)영구히 화(禍)를 남겨놓았다”고규탄 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단기고사(檀奇古事) 역자(譯者) 정해박(鄭海珀)은 발해국주(渤海國主) 대조영(大祚榮)이 그 아우 대야발(大野勃)에게 명편(名編)한 고려왕조까지 내려 왔음에도 불구하고 김부식이 이를 삼국사기에 수록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로 인해 지나보다 먼저 시원(始源)한 환국과 배달국은 물론 단군 고조선(古朝鮮)의 실사(實史)까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고 통탄한다며 김재형(金在衡)은 단기고사(檀奇古事)의 중간사(重刊辭)에서 김부식을 원망하며 사적(史敵)이라고 했을 정도이다.
 
이에 대하여는 지나와 일본이 역사조작과 왜곡을 위해 삭제하거나 덮은 것은 아닌지도 금후 연구를 통해 색출할 필요가 있는게 아닌가도 추측해보는 것이다. 
 
삼국사보다 130년 후 나온 보각국사(普覺國師)인 김일연(金一然)이 편찬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단군조선 건립연대와 그 기록이 있는데 그 출처는 위서(魏書)라 밝히고 다음 [고기운(古記云)]하여 고기(古記)에 의한 것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김일연이 인용한 이 위서는 이 나라에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정인보(鄭寅普) 선생은 그것이 조위(曹魏)의 서(書)로서 왕침(王沈)의 것이라 하고 있다. 고대 지나에는 다음의 3위(魏)가 있었다. [(鄭寅普 箸 朝鮮史硏究 上, 34面)] 
 
조위(曹魏;서기220~264년)의 조조(曹操)가 국조(國祖)가 되고 있고, 북위(北魏; 서기385년~534년)의 척발규(拓跋(珪)가 국조가 되고 있으며, 서위(西魏;535~556년)의 우문태(宇文泰)가 국조로 되어 있는 위(魏)이다.
 
글을 맺으며 
 
우리나라 역사는 고기(古記)에 말하되 환국(桓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하고 있다. 이 환국은 53대 3301년의 역사를 가진 상고시대의 나라이고, 그 후에 배달국이 서기전3898년~서기전2333년의 1565년간 신시(神市)에 처음 수도(首都)를 열었다.
 
고조선은 서기전2333년~서기전237년, 아사달(阿斯達)에 처음의 도읍(都邑)을 정해 47대 2096년간 다스린 역사를 세계학자들도 말하고 있는데도 일제강점기 단군조선도 2000년이나 잘라버리며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한 것을 그대로 가르치다가 광복후 고조선은 제대로 가르치고 있다.
 
또한 삼국시대의 역사도 95%가 대륙역사인데도 반도 안의 역사로 조작해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국민이 너무 역사에 무관심하고 역사무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외국인들도 이를 지적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자성어에 ‘토각구모(兎角龜毛)’라는 말이 있다. 즉, ‘토끼에게 뿔이 솟지 않고, 거북에게 털이 날 리가 없다는 말이다. 역사는 거짓이 통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역사는 진실만이 역사로 쓸데없는 다툼인 대토지쟁(大兎之爭)은 시간낭비임을 말한다.
 
김일연의 전한 고조선기(古朝鮮記)는 역사사실을 여실히 전했으나 신라말 불교도들의 단군왕검시대에 소급해 인도(印度)의 범어(梵語)로서 지명(地名)과 인명(人名)을 만들어낸다. 석유환국(昔有(桓國)에 위제석야(謂帝釋也)라는 주(註)가 달린다.
 
이 주(註)는 어느 한 승도(僧徒)가 단군의 탄생을 제석천적(帝釋天的)으로 높이려는 심산(心算)이라 보나, 이는 크게 와전됐고 군국주의 일본학자들의 우리 민족역사 삭탈작업(削奪作業)에 크게 이용되었던 것이다. 
 
이 위제석야(謂帝釋也)를 본문화한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13년 후의 이승휴(李承休)가 그의 저서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단군조선을 다루며 [初誰開國啓風雲 釋帝之孫檀君]이라 했다. 이 제석지손단군(釋帝之孫檀君)이라 한 구절은 단군을 모독한 것이다. 
 
이것은 불교와 유교에 도취된 조선왕조의 유가(儒家)들도 또한 이를 하나의 신기로운 일로 오인(誤認)해 그대로 습용(襲用)하니 세종7년(서기1461년) 시인(詩人) 권람(權擥)은 [(古記云 上帝桓因有 庶子曰雄)]이라 한 대목 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여기서 환인(桓因)과 석제(釋帝)같은 문구는 불교법화경에서 나온 것으로 단군을 승담(僧談)에 넣어서 고조선의 제왕(帝王)을 신라~고려조가 이교(異敎)로 숭존(崇尊)하게 했다. 이로 인한 고조선 역사훼손은 말이 아니게 극심하게 되었다.
 
이는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본이 단군의 연조(年祚)를 2000년 깎고 단군을 신화로 돌리며, 단군조선 47대 2096년 역사를 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대륙 만주 하북성을 중심으로 한 찬란한 조선족의 역사를 완전히 말살했다.  
 
(以上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김세환,[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東夷歷史 쇠集’.[(右犂)의 歷史 ‘校勘十八史]. 文定昌, [古朝鮮史硏究]. 정희철’[중국은 없다.]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유우찬, [한국사의 실체].  檀檀學會編輯, [桓檀古記]. 李丙燾, 譯註, [三國遺事],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貝塚茂樹, [中國の歷史1~3].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鹿島 昇, [韓半島のうがや王朝史)] 讀賣新聞大阪本社編,[騎馬民族の謎]. 三浦一郞, 小倉芳彦, 樺山纊一, [世界を變えた戰爭, 革命, 反亂]外 多數書冊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했음 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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