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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지난 1970~80년대만 해도 은행은 화이트 칼라 직업으로 최고의 직장 중 하나로 꼽혔다. 은행은 컴퓨터와 계산기가 사용되기 이전인 주판을 사용하던 시절부터 취업만 하면 ‘신랑후보 1순위’가 될 정도로 안정적이고 촉망받는 직장이었다.
은행이 이처럼 대우를 받다보니 고객들을 ‘고자세’로 맞는 문화가 일반화 됐다. 이런 시기에 고객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영업점 전 직원이 일어나 동시에 큰 소리로 반갑게 인사하면서 맞이하는 은행이 탄생했다. 그동안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은행만을 접했던 고객들은 적응이 안 될 정도로 대단히 신선했다.
신한은행은 그렇게 ‘친절 그 이상 친절’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지난 1982년 문을 열었다. 시작은 불과 4개의 영업점이었다. 신한은행은 재일교포 출신인 고 이희건 신한금융지주 명예회장이 앞서 설립한 제일투자금융을 모태로 하면서 소박하지만 참신한 모습으로 국민들의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신한은행을 오늘의 규모로 키운 이른바 3인방이 지난 2010년 2월부터 ‘신한사태’라는 골육상쟁을 일으켰다. 막전막후의 권력다툼으로 비춰진 내분이 법정분쟁과 검찰수사로 비화되더니 급기야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 비자금 의혹사건으로까지 커졌다.
선린상고 출신으로 은행업계의 기린아이자 입지전적 인물인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을 정점으로 벌어진 신상훈 전 신한금융지주 사장, 이백순 전 신한은행장 등은 한동안 환상의 콤비라인으로 세간의 부러움과 시샘을 받았다. 30년 이상 평생을 신한의 운명과 함께 해온 ‘동지적 관계’로 일해 온 세 사람이었다. 하지만 신한은행이 신 전 사장을 횡령 및 배임의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국민들은 그야말로 ‘환상적 성장’을 구가해 온 신한은행의 사태를 접하면서 눈과 귀를 의심해야 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너무 실망스러웠다. 검찰이 신 전 사장을 수사하기 시작하고 시민단체들이 라 전 회장을 또 다시 고발하면서 검찰의 추가수사가 이어지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라 전 회장은 사건발생 두 달 만에 끝내 사퇴하고 나서지만 검찰은 ‘3인방’을 동시에 표적으로 올려놓고 압수수색 등 고강도 수사에 들어갔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국민여론은 신한사태가 잘 마무리가 되기를 바랐지만 사태는 그 반대로 역주행 했다. 많은 국민들이 신한사태를 안타까워 한 것은 다른 많은 시중은행들이 이른바 ‘관치’에 휘둘려 수많은 문제를 일으켜 온데 반해 신한은행은 정치바람을 타지 않는 서비스 정신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 중심에 신한은행의 살아 있는 전설과도 같은 라 전 회장이 있었다는 것은 더욱더 안타까운 일이었다. 신망을 받던 라 전 회장과 이 전 행장의 상고출신 두 명이 연합해 신 전 사장(성대 경영학과)을 밀어내는 듯한 막장 권력다툼처럼 비춰졌기 때문에 국민들은 충격이 컸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부장판사 설범식)는 최근 신 전 사장과 이 전 행장에 대해 각각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법원의 이번 1심 판결로 신한사태가 일단락된 모양새를 띠었다. 라 전 회장은 일찌감치 무혐의 처분을 받은 상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태가 온전히 봉합됐다고 보기 어렵다.
애초 고발을 당한 신 전 사장에게는 깊은 앙금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비자금 의혹은 여전히 의혹으로 묻혀 있기 때문이다. 신 전 사장이 상고심에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계속 법정다툼을 할 소지가 다분한 상황이다.
우리는 꼬리를 무는 신한사태를 보면서 승자도 패자도 없는 골육상쟁이라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설사 누가 이기더라도 손에 쥔 것은 피투성이일 뿐 남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본다. 가장 큰 피해는 국민들이 신한은행에 대해 가졌던 신뢰감이 많이 떨어졌다는데 있을 것이다.
오늘의 신한을 만든 3인의 주역들이 스스로 힘겹게 쌓아올린 공든 탑을 힘 모아 무너뜨린 셈이다. 따라서 이제는 세 사람이 화해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미 양보할 수 없는 선을 넘어선지 오래됐지만 그 조차도 극복할 큰 마음을 가져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배경에는 신한은행이 여전히 국민들로부터 친절하고 믿을 만한 은행으로 다시 거듭날 것이라고 믿음을 받고 있는데 있다.
많은 시중은행들이 관치에 몸살을 앓으면서 국민경제에 큰 피해를 입히고 있을 때 신한은행은 정치바람을 타지 않아 신뢰감을 쌓았다. 여론은 신한은행에 당연히 호감을 가졌다. 권력과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는 초심을 봤기 때문이다.
이런 초심을 오랫동안 지켜온 덕에 신한은행은 승승장구를 거듭해 단기간에 국내 대표적인 4대 금융지주 반열에 오르는 신화를 썼다. 신한금융은 지난해 1분기 기준으로 자산규모가 321조원에 달해 우리금융 363조원에 이어 2위에 랭크돼 있는 거대 금융기관이다. 5년 전인 2007년 1분기만 해도 신한은행은 자산 217조원으로 KB금융 284조원에 비해 훨씬 작았으나 이를 제체는 기염을 토했다.
무엇보다 신한금융은 탄탄한 수익기반을 갖추기까지 했다. 지난 2011년 3분기 기준으로 신한금융의 영업이익은 3조4992억원, 순이익은 2조5933억원으로 4대금융지주 중 각각 1위에 랭크됐다.
하지만 신한의 이미지는 일단 실추됐을 뿐만 아니라 다른 관치금융기관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언제부터인지 신한은행의 창구직원들도 친절도가 많이 떨어진 느낌을 받고 있다. 자칫 신한이 쌓아 올린 3인방의 신화가 허상으로 끝날 위기의 기로에 서 있다.
기업의 흥망성쇠로 보면 은행도 추락은 한 순간이다. 과거 한일은행, 상업은행, 조흥은행, 보람은행, 동화은행, 서울은행 등이 오늘의 4대금융지주로 왜 흡수·통합되거나 문을 닫았는지를 헤아려 봐야 한다. 1심 선고가 나온 지금 이후가 중요하다. 더 이상 국민들에게 ‘신한 사태’라는 뉴스가 들려오게 하면 안 된다. 그 중심에 있는 좌장격인 라 전 회장은 특히 초심으로 돌아가 작게는 신한 임직원들을 위해, 크게는 국민경제를 위해 막중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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