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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

연개소문이 죽은 해는 언제일까

삼국사기에는 666년, 태백일사에는 657년으로 나와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9-02-09 09:18:00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백제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한 66012월 자신감에 가득찬 당나라는 고구려까지 차지하려고 군사를 움직였다. “당나라는 좌효위대장군 계필하력을 패강도(浿江道) 행군대총관,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요동도(遼東道) 행군대총관, 좌효위장군 유백영을 평양도(平壤道) 행군대총관, 포주자사 정명진을 누방도(鏤方道) 총관으로 삼아 각자 다른 길로 병사를 이끌고 공격해왔다는 기록은 조서로 그런 명령만 내린 상태였지 실제로 병력이 움직인 것 같지는 않다.
 
이어 “661년 봄 정월, 당나라가 하남·하북·회남 등 67개 주에서 징발한 병사 44천여 명을 평양과 누방 군영으로 가게하고, 또한 홍려경 소사업을 부여도(扶餘道) 행군총관으로 삼아 위구르 등 여러 부의 병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향하게 했다는 기록도 마찬가지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름 4월에는 임아상을 패강도 행군총관으로, 계필하력을 요동도 행군총관으로, 소정방을 평양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소사업과 모든 이민족의 군사를 합해 모두 35개 군단이 수륙으로 길을 나누어 동시에 진군했다는 기록은 뒤 문장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병력을 움직여 공격한 것 같아 보이는데, 정상적인 공격치고는 이상한 점이 많다.
 
이때 고종이 직접 통솔하려고 하자 울주자사 이군구가 나서며 고구려는 소국인데 우리가 모든 국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만약 고구려가 없어진다면 반드시 군사를 보내 지켜야겠지만, 병사를 적게 보내면 위엄이 서지 않고 많이 보내면 백성들이 불편해할 것입니다. 이는 천하를 병역으로 지치게 만들게 해 치는 것이 치지 않는 것만 못하며, 없애는 것이 없애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고, 측천무후 역시 말렸으므로 중지했다고 한다.
 
이어 가을 7월 갑술(11) 소정방이 패강(浿江)에서 고구려 군사를 쳐부숴 여러 번 싸워 모두 승리하고는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했다. 9월에 연개소문이 아들 연남생에게 수만 명의 정예병을 주어 압록수를 방어하게 하니, 당나라 군사들이 건너오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평양성을 포위한 것이 아니라 평양성을 포위하러 갔다로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후방 도성이 포위된 고구려가 한가롭게 전방 압록수를 방어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계필하력이 군사를 이끌고 압록수에 도달했을 때 마침 얼어붙은 강을 건너서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며 공격하니 고구려의 전선이 무너져 수십 리를 추격하며 달아나는 군사 3만 명을 죽였다. 남은 무리는 모두 항복했고 연남생은 간신히 자신의 몸만 피했다. 이때 마침 본국에서 철수하라는 조서가 왔으므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정도로 큰 전과를 올린 상태에서 본국에 급한 일도 없었는데 그냥 돌아오라는 조서의 의미는 무엇일까.
 
“662년 봄 정월, 당나라의 좌효위장군 백주자사 옥저도(沃沮道) 총관 방효태가 연개소문과 사수(蛇水)에서 싸웠다가 그의 부대는 전멸했고, 방효태도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했다. 소정방이 또 다시 평양을 포위했는데, 마침 큰 눈이 내려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매번 당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성과 없이 물러갔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공격했는지 여부는 사실상 의문이고 훗날 가필한 기록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여하튼 여기서의 사수는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의 설명에 “<산해경> 고량지산의 동서 400리에 사산이 있고, 북해지내 사산 아래 사수가 있다라고 하며, 역시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고량(高粱)은 산서성 임분현 동북쪽에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곳은 당시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 있던 곳이다.
 
▲ KBS 역사드라마 대조영에서의 연개소문의 죽음 장면 [사진=필자 제공]
 
<
삼국사기>에 따르면 보장왕 25(666)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맏아들 연남생(男生)이 부친 대신 막리지가 되었다. 처음 정사를 맡아 여러 성을 순시하면서, 두 아우 연남건(男建)과 연남산(男産)에게 조정에 남아 뒷일을 처리하도록 했다. 어떤 자가 두 아우에게 막리지는 두 분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두 분을 죽이려고 합니다. 계책을 세워 먼저 도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해도 처음에는 두 아우가 믿지 않았다.
 
이번에는 어떤 사람이 연남생에게 남건과 남산은 자신들의 권세를 빼앗길까봐 두려워해 형을 조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하니 연남생은 자신의 심복을 남몰래 평양성으로 보내 두 아우의 동정을 살펴보게 했다. 남건과 남산은 이를 알고 연남생의 심복을 체포하고, 곧 왕명을 내려 연남생을 소환하니 연남생은 두려워서 감히 돌아오지 못했다.
 
연남건은 스스로 막리지에 올라 군사를 출동해 국내성에 기거하던 연남생을 체포하려 했다. 남생은 아들 헌성(獻誠)을 당나라로 보내 구원을 애원했다. 6월에 당고종이 계필하력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그를 맞이하게 하니, 연남생은 당나라로 투항했다. 8월에 보장왕이 연남건을 막리지로 삼아 내외의 군사에 대한 직무를 겸직하도록 했고, 9월에 당고종은 연남생을 특진 요동도독 겸 평양도 안무대사로 삼고, 현도군공으로 책봉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 KBS 역사드라마 대조영에서 연남생 부자가 당장 계필하력에게 투항하는 장면 [사진=필자 제공]
 
그런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막리지(연개소문)는 임종하면서 남생과 남산을 둘러보며 너희들 형제는 서로 사랑하기를 물처럼 하렸다. 화살을 합치면 강해지고 이를 나누면 곧 부러진다. 이제 이 죽으려는 아비의 말을 반드시 잊지 말고 이웃나라 사람들에게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때는 곧 개화 16(657) 107일이다. 묘는 운산의 구봉산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개화는 고구려 보장제의 연호이고 개화 16년이면 서기 657년으로 <자치통감> 등의 중국기록을 인용한 <삼국사기>666(보장왕 25)과는 9년 차이가 난다. 과연 어느 기록이 옳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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