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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수의 新삼국사 산책

복수에 집착한 실성왕

미해와 보해의 볼모사건 내막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2-06-24 10:33:53

▲ 정재수 역사작가
고구려 광개토왕의 후원에 힘입어 신라왕에 즉위한 실성왕(흉노계)은 전임 내물왕(선비계)과의 차별화를 꾀했다. 먼저 유례왕(석씨)의 아들인 미사품(未斯品)을 등용해 서불한(제1관등)에 임명하고 군국(軍國·군사 정치)의 업무를 맡기며 옛 석씨왕조 출신들과 손을 잡았다.
 
이어 실성왕은 흉노계 구도(仇道)의 사당(廟)을 직접 찾아가 배알했다. 그리고 내물왕의 직계아들인 미해(美海)와 보해(宝海)를 각각 왜(야마토)와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신라사초」<내물대성신제기>이다. ‘실성은 고구려에 있으면서 돌아갈 생각으로 여러 번 볼모를 교체해 달라 청했으나 이를 들어주지 않자 내심 불만을 품었다. 즉위하자 비록 보반을 후로 삼았으나 음으로 보복할 뜻을 가지고 보해와 미해를 나눠 볼모로 보냈다(實聖在麗 思歸累請代質 不得內懷不平 及卽位雖以保反爲后 而陰有報復之意 分質宝海美海).’ 기록은 실성왕이 보해와 미해를 볼모로 보낸 사유를 내물왕에 대한 복수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미해의 왜 볼모사건
 
미해(미사흔)는 서기 402년(실성1) 왜와 화친을 맺으며 볼모로 보내진다. 《광개토왕릉비》 ‘영락10년(400년) 신라 구원’ 사건의 대상이 된 경남 남해안에 집결한 궁월군과 120현민(부여백제 삼한백성)의 일본열도 엑소더스를 보장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이다.
 
삼국사기 실성왕 기록이다. ‘원년(402년) 3월, 왜국과 우호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미해)을 볼모로 보냈다(元年 三月 與倭國通好 以奈勿王子未斯欣爲質).’ 삼국사기는 ‘질(質)’이란 단어를 써가며 미해의 자격이 볼모임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 내용은 고구려사략<영락대제기>에도 나온다. ‘12년(402년)… 상이 왜 사신에게 이르길 “보금(실성)은 짐(광개토왕)의 고굉지신이고 그의 처가 나의 딸이거늘, 너희 왕이 아신(백제)과 더불어 서로 혼인하고 보금을 도모함은 결단코 불가하다. 이후로 보금과 화친하며 서로 혼인해도 좋겠다”하니, 왜가 미해를 사위로 삼고 화친했다. 미해는 겨우 열 살이다(上謂倭使 曰 宝金 朕之股肱 其妻吾女也 爾王與莘相婚而欲圖宝金 决不可矣 自此 亦與宝金和親而相婚可也 倭乃以美海爲婿而和親 美海年才十歲也).’
 
고구려사략은 볼모(質)의 표현은 없고, 미해가 왜로 건너 간 사유를 ‘신라-왜’ 화친의 결과물이 아닌 ‘고구려-왜’의 밀약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두 기록 공히 미해가 왜로 건너간 시기를 서기 402년(실성왕 2년)으로 못 박고 있다.
 
그러나 신라사초 <실성기>는 서기 410년(실성왕 9년)으로 적고 있다. 내용도 상당히 차이가 난다. ‘금구 9년(410년) 3월, 제(실성왕)가 눌지의 아우 미해를 아찬으로 삼고 야(野)에 사신으로 보내며 내신 사람(沙覽)에게 보좌토록 명했다. 야왕이 접견하고 아름답다 여겨 대를 쌓아 머물게 하고 그 딸로 하여금 시중들게 했다(金狗 九年 三月 帝以訥祇弟美海爲阿湌使于野 命內臣沙覽輔之 野王見而美之 築臺以留之 使其女侍之).’ 신라사초는 미해가 10세(402년)가 아닌 18세(410년)에 왜로 건너가며 볼모가 아닌 사신 자격(使于野)임을 강조하고 있다.
 
세 가지 기록을 겹쳐보면 다음의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미해는 402년(10세) 왜와 화친을 맺으며 왜로 건너간다. 그리고 어느 시기 신라로 돌아왔다가 410년(18세) 또 다시 사신자격으로 왜에 파견된다. 그리고 야왕의 딸과 혼인한다. 야왕은 왜(야마토) 인덕왕(16대)으로 미해와 혼인한 딸은 보미(寶美)이다. 이후 미해(미사흔)는 418년(눌지왕 2년) 왜에서 도망쳐 돌아왔다(王弟未斯欣 自倭國逃還-삼국사기). 미해는 410년 사신자격으로 왜에 파견됐다가 418년이 돼서야 신라로 돌아왔다. 미해의 왜 체류기간은 9년으로 이는 볼모기간이기도 하다. 특히 미해는 왜에 체류하면서 혼인한 보미를 통해 딸 하나를 얻었다. 나해(羅海)이다.
 
▲ 미해와 보해의 볼모사건 관계도. [사진=필자 제공]
 
보해의 고구려 볼모사건
 
보해(복호)는 서기 412년(실성왕 11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졌다. 삼국사기 실성왕 기록이다. ‘11년(412) 내물왕의 아들 복호(보해)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十一年 以奈勿王子卜好 質於高句麗).’ 이 내용은 신라사초 <실성기>에도 나온다. ‘흑서 11년(412년) 2월, 보해를 고구려에 볼모로 해 내신 무알(武謁)을 보좌로 삼아 떠나보냈다(黑鼠 十一年 二月 以宝海質于句麗 內臣武謁爲其輔而去).’ 두 기록 공히 보해의 고구려 파견이 볼모(質)임을 명시하고 있다. 다만 보해는 미해의 경우(왜 화친)와 달리 고구려에 볼모로 가게 된 사유는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고구려사략 <영락대제기>는 복해의 볼모사건을 약간 다르게 기술한다. 410~412년 상황이다. ‘10년(410년) 정월, 내밀의 아들 보해가 래조했다. 마련을 그의 처로 주었다(二十年 庚戌 正月 奈密子宝海來朝 以馬連妻之).’ ‘11년(411년) 5월, 보금이 보해를 돌려 보내주길 청해 마련을 따라가게 했다. 마련이 보준을 낳았다(二十一年 辛亥 五月 宝金請還宝海 使馬連從去 馬連生子宝俊).’ ‘12년(412년) 7월, 마련이 글을 올려 돌아오고 싶다 청해 보해와 함께 들어오게 하고 천성의 옛 궁에 살게 했다(二十二年 壬子 七月 馬連上書請還 乃召宝海幷入 使居天星舊宮).’
 
서기 410년 보해의 고구려 파견은 ‘래조(來朝)’이다. 래조는 ‘조공(朝貢)’의 반대말로 고구려 입장이다. 신라 입장에서 보면 보해는 고구려에 파견된 조공사신이다. 그런데 광개토왕은 보해에게 자신의 딸 마련(馬連)을 처로 줬다. 이듬해인 411년 실성왕의 요청에 의해 보해는 다시 신라로 돌아왔고, 그 다음해인 412년 보해와 마련은 고구려로 돌아갔다. 이후 보해는 418년(눌지왕 2년) 신라로 돌아오기까지 7년간(412년~418년)을 고구려에 체류했다. 이 기간은 보해의 실제 볼모기간이다. 특히 보해는 마련을 통해 아들 하나를 얻는다. 보준(宝俊)이다.
 
볼모사건 본질은 경쟁자 축출
 
볼모사건 기록을 보면 왜와 고구려가 볼모대상을 구체적으로 지명하지 않고 있다. 왜는 미해를, 고구려는 보해를 요구하지 않았다. 볼모대상의 선정은 오로지 실성왕의 선택에 의해 이뤄졌다. 결국 실성왕은 왜와 고구려와의 역학적 관계 설정을 빌미로 국내 정치상황을 이용했다. 그래서 자신의 왕권강화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내물왕의 직계아들들을 왜와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며 신라에서 내쫓았다. 신라사초가 실성왕이 ‘음으로 보복할 뜻을 가졌다(陰有報復之意)’고 기록한 것은 이를 구체화한 표현일 것이다.
 
실성왕은 미해와 보해를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실성왕에게는 미해와 보해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경쟁자가 따로 있다. 미해, 보해의 형인 내물왕의 적자 눌지(訥祗)이다. 실성왕과 눌지의 대결은 신라사에 있어 또 하나의 분수령을 된 사건을 만들었다. 신라 최초로 발생한 군사쿠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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