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요희의 작가노트] 용감하거나 두렵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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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요희 필진페이지 + 입력 2023-11-14 22:15:41

여행을 같이 다니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여행 계획이 완료된 날 바로 여행 가방을 싸고는 하루 종일 인터넷을 뒤져 숙박부터 교통편, 전시·공연 티켓까지 일사천리로 예약을 마친다.

두세 명이 떠나는 여행임에도 어찌나 준비를 잘하는지 타고난 여행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해외로 나가면 현지에서도 야무지게 길 안내를 잘하니 웬만한 투어 컨덕터보다 낫다.

심지어 이 친구는 영어를 거의 못 한다. 몇 개의 단어만 갖고 바디랭귀지를 이용해 자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얻어 낸다. 영어를 못하는 데도 원어민에 대한 두려움이 1도 없다. 당연히 이 친구는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도 안 한다.

현지 문화를 깊이 알고 현지인과 교감을 나누려면 그래도 영어가 필요하다는 말을 건네려다 말았다. 이건 내 진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친교 목적의 만남을 귀찮아 하는 편이다. 외국인이라고 예외겠는가.

그럼에도 나는 영어 공부에 열심이다. 스마트폰에는 유료 영어 앱이 여러 개 깔려 있고 줌으로 하는 원어민 회화도 몇 달씩 했으며 넷플릭스 드라마도 영어 자막을 선호한다.

나의 문제는 외국인을 만나면 입도 뻥끗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 발음을 못 알아 들을까 봐 너무 겁이 나고, 실제로 그들이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기도 하다. 원어민 교사는 잘 알아듣는 내 발음을 원어민 보통사람은 왜 못 알아듣는 걸까?

결국 여행지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나의 영민하고 용감한 친구가 해결하고, 나는 점점 더 영어로 목소리를 내는 데 소극적이 되어 갔다. 또 하나의 문제는 사태가 이 정도 됐으면 영어 공부를 포기해야 하는데 이게 포기가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영어 말의 느낌이 너무 좋다.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이 ‘미니트’와 ‘트레인’을 발음했는데 어찌나 근사하게 들리던지 계속 미니트와 트레인을 되뇌었던 기억이 있다.

참 이상하게도 나의 애정과 열의에 비해 영어 실력은 그다지 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런 나에게 금방 영어 되겠네, 하며 격려했지만 그 이야기를 30년째 듣고 있다. 원어민만 보면 무서워서 달아나니 나는 내 정확한 실력조차 모른다.

내 친구는 너무나 용감해서 영어가 늘지 않고 나는 두려움이 커서 영어가 늘지 않는다. 친구는 영어를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문제가 없는데, 나는 영어를 너무 짝사랑하니 문제다. 내 입에서 유창하게 영어를 내뱉는 날이 올까? 그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는 애인의 혓바닥 같은 연한 발음들을…. 시인·소설가

임요희 필진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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