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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준의 뮤직세이] 전쟁과 음악: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전쟁 중 오른팔 잃은 피아니스트를 위한 협주곡
적국에 대한 분노를 뛰어넘은 상실에 대한 공감
김명준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6-14 06:30:40
▲ 김명준 지휘자·스카이데일리 미국 통신원
 전쟁이 인간 세상에 남기는 상흔은 강렬하다. 인간 삶의 군상을 제재로 삼는 음악은 이 상흔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오스트리아 작곡가 하이든은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전쟁으로 인해 고국에 드리웠던 전운의 긴장을 ‘전쟁의 날들에 미사(Missa in tempore belli)’를 통해 그려냈고,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는 관현악곡 ‘1812 서곡’을 통해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제국 침략 실패를 음악화 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시인 알프레드 오언의 반전(反戰) 시를 가사로 사용한 벤자민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은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반전(反戰) 정신을 노래한다. 더 나아가, 전쟁은 편안함에 안주했던 사상의 변혁을 촉발하며 음악사조에 있어 변화를 야기하기도 했다.
 
‘라 발스’ ‘볼레로’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전쟁의 아픔을 오선 위에 그려내기를 가장 주저하지 않은 작곡가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연합국 소속 운전병으로 참전했다가 전투 중 함께 참전한 친구들을 잃는 비애를 겪는다. 슬픔에 잠긴 그는 여섯 곡으로 이루어진 모음곡 ‘쿠프랭의 무덤’을 통해 친구들을 추모하고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를 표현해냈다. 종전 후 적국이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음악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프랑스 애국주의 작곡가들의 거센 움직임에도 라벨은 동참하지 않았다. 음악은 옳고 그름을 나누고, 적을 구별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 1916년 베르됭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참호 밖으로 이동하고 있다. 영국·프랑스 주축의 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 중심의 동맹국이 벌인 제1차 세계대전은 4년여 기간 동안 약 5000만 명의 사상자를 낳은 비극적인 전쟁이었다. AFP
 
라벨의 이 같은 생각은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에서 더 잘 드러난다. 이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에 동맹국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전투 중 부상으로 오른팔을 절단한 오스트리아 출신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작곡됐다.
  
부상과 함께 시베리아 수용소에 구금된 비트겐슈타인은 절망적인 사건에도 피아니스트로서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왼손만으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되리라 결심한 그는 수용소 한켠에 있던 나무 상자를 피아노 삼아 상상 속으로 연습을 시작했다.
 
 
그렇게 전쟁이 끝나고, 그는 라벨을 포함해 벤자민 브리튼·리하르트 슈트라우스·파울 힌데미트 등 당시 유명했던 여러 작곡가에게 왼손만을 위한 작품을 의뢰했다. 친구들을 잃으며 전쟁의 참혹함을 깊이 공감했던 라벨은 요청에 화답해 피아노 협주곡을 헌정한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적국이었다. 라벨은 어쩌면 친구들을 죽음으로 이르게 했을지도 모르는 이를 위해 펜을 들었다. 전쟁으로 라벨은 친구를 잃었고, 비트겐슈타인은 피아니스트로서 전부였을 오른팔을 잃었다. 전쟁이 가져다 준 상실에 대한 공감은 분노를 넘어섰다. 
 
▲ 클로드 드뷔시와 함께 프랑스 낭만악파를 대표하는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우리에게 ‘볼레로’ ‘라 발스’등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 겪은 아픔을 바탕으로 ‘쿠프랭의 무덤’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등을 작곡했다. BBC
  
오케스트라와 긴밀한 연결을 주고받는 피아노 협주곡은 대체로 고난도의 기교를 요한다. 3개 악장에 길이도 30분을 훌쩍 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장대한 형식의 특성상 한 손만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은 쉽게 시도될 수 없는 것이었다. 라벨은 틀을 깼다. 3악장 구성을 단일 악장의 세 부분 형식으로 바꿨으며, 길이도 20분가량으로 축소했다. 그러나 축소된 형식 속에서도 오른손의 부재를 청중들이 느끼지 못하도록 짜임새 있는 오케스트레이션과 피아노 테크닉을 통해 조밀하고 풍성한 음향을 창조해냈다. 악보를 보며 듣지 않는 이상 이 작품이 한 손만으로 연주된다고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켄슈타인. 비트켄슈타인이 처음부터 라벨의 작품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곡이 “왼손만으로 연주되기에 너무 어렵고 작품성도 좋지 않다”며 라벨에게 수정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작품의 진가를 알아본 것은 꽤나 시간이 흐른 뒤였다. BBC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은 전운을 암시하는 듯한 관현악 저음부(더블베이스와 콘트라바순)의 장엄하고 음산한 주제로 시작된다. 더블베이스의 개방현을 통해 흘러나오는 도입부의 모호한 선율은 전운을 고조시킨다. 오케스트라에 의해 제시된 주제는 곧이어 피아노의 역동적인 아르페지오를 통해 재현된다. 당시 재즈에 깊은 관심을 두었던 라벨은 작품 곳곳에 블루스풍의 화성을 사용해 자신만의 진보적인 특색으로 오선을 채색했다. 전쟁을 상기하는 듯한 행진풍의 빠른 섹션이 휘몰아친 후 다시금 찾아온 느린 섹션에서는 전쟁이 지나간 이후 남겨진 이들의 공허함이 그려진다.
 
피아노의 기교적 카덴차 부분에서는 중세 그레고리안 성가 중 ‘진노의 날’ 선율이 차용돼 전쟁의 통렬한 비극을 청각적으로, 또 오선 위 시각적 요소를 통해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긴 피아노의 독주 끝에 합류하는 오케스트라는 어렴풋 다가오는 무언가를 기다리듯 음향과 감정을 절제하며 긴장감을 축적한다. 이윽고 터지는 금관의 광채와 함께 악곡은 다섯 마디의 짧은 행진풍의 테마를 재현하며 끝을 맺는다.
 
비트겐슈타인의 절망을 넘어선 의지와 라벨의 공감은 연합국과 동맹국이라는 세상의 편가름을 뛰어넘어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전쟁은 없다”는 착각 속에 오늘도 세상은 전쟁으로 신음하고 있다. 국경을 넘어섰던 라벨과 비트겐슈타인이 음악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일까. 아니, 음악 그 본연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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