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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추진 중인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 사업이 대한민국 전력 산업의 기술 자립을 시험하는 무대가 되고 있다. 이 사업은 전라남도 등 서해안 지역의 대규모 재생에너지 단지에서 생산한 전력을 수도권까지 안정적으로 송전하기 위한 핵심 인프라 구축 프로젝트다.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공약으로 본격 추진되면서 기존 계획보다 1년 앞당긴 2030년까지 1단계 공사를 마무리해야 한다.
문제는 이 초대형 사업에 꼭 필요한 기가와트(GW)급 전압형 초고압직류(HVDC) 변환 설비를 국내에서 제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설비는 고용량의 전력을 장거리로 안정적으로 송전하기 위한 필수 기술이다. 전압을 바꾸거나 교류와 직류를 변환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 이 기술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기업은 제너럴 일렉트릭(GE), 지멘스, 히타치 등 일부 해외 업체에 한정돼 있고 신규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 이유는 이들이 대부분 기존 거래처들과 ‘프레임워크 계약’을 체결해 놓았기 때문이다. 프레임워크 계약이란 특정 고객과 수년간 일정한 물량의 설비를 공급하기로 미리 약속하는 계약 형태로 일종의 ‘장기 예약 구매’다. 이 계약 구조는 제조사 입장에서 안정적인 생산과 매출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한국처럼 새롭게 대규모 수요를 가진 신규 고객에게는 커다란 진입 장벽이 된다.
한국 정부와 한국전력은 이번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 사업을 위해 GW급 전압형 HVDC 설비를 대규모로 도입하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미 전 세계적으로 HVDC 설비 수요가 폭증한 상황에서 해외 업체들은 기존 고객의 물량을 우선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한국처럼 새로운 고객에게 줄 수 있는 여유가 없다. 게다가 한국의 공공 조달 방식이 낮은 가격을 우선시하는 경쟁입찰 구조라 매력적이지도 않다.
정부는 해법으로 국산화 카드를 꺼냈다. 올해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500kV급 전압형 HVDC 변압기 개발 예산을 확보했고 컨버터 등 나머지 핵심 설비에 대한 기술 개발도 추진할 방침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들이 맨땅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기술을 고도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성은 있다”고 했지만 4년 내에 완전한 국산화가 이뤄질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국내 기업들도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LS전선은 동해에 5공장을 새로 짓고 있으며 이를 통해 HVDC 해저케이블 생산 능력을 4배 이상 늘릴 예정이다. 대한전선은 당진 2공장에 640kV급 케이블 생산 설비를 갖출 계획이다. 이미 6200톤(t)급 포설선을 운용 중이고 1만t급 선박도 검토 중이다.
효성중공업은 이미 200MW급 전압형 HVDC 컨버터를 상용화했다. 2027년까지 GW급 제품 개발을 목표로 한다. LS일렉트릭, HD현대일렉트릭도 변압기, 고압 차단기 분야의 기술 고도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는 단순한 전력 인프라가 아니다. 한국 전력 산업의 독립성과 기술 역량을 엿볼 수 있는 시험대다. 해외 의존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에너지 안보와 공급 안정성 모두 위협받을 수 있다.
이번 프로젝트는 한국이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서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전략적 기술 자립의 관문이 될 것이다. 미래는 직접 만들어 가는 자의 몫이라는 걸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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