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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아빠 엄마 이야기…사위도 자식이잖아요①
코스모스처럼 더불어 사랑을 속삭인 우리 식구
화장실 구렁이 사건, 둘째 형의 수박…동네 ‘손과 발’이었던 큰 형님
대통합 필진페이지 + 입력 2017-05-14 17:36:56
 
 ▲ [사진=국민대통합위원회]
어릴 적 학교 가는 길은 검정 고무신에 책 보따리를 매고 산으로 들로 걷고 뛰어서 학교에 도착하면 어느새 배에서는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났다.
 
“야, 오늘 뗀따 할래.”
 
‘뗀따’라면 당시 우리가 쓰던 은어였는데 학교에 안 가고 놀다가 하교 시간에 맞춰서 집에 가는 것이었다. 학교에 안 가고 온종일 시간을 보내기도 쉽지는 않았다. 집에서 싸왔던 누룽지는 아침나절 다 먹어버리고 점심때쯤 돼서는 허기를 달래려고 동네 어른들의 눈을 피해 큰 바위틈 속에서 생라면을 부숴 먹었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야, 잎담배 한번 피워볼까?”
 
친구는 바위틈의 어느 구석에서 잎담배와 성냥 그리고 종이를 꺼내 가지고 왔다. 잘 피우지도 못했던 담배를 호기심에 ‘콜록콜록’ 소리를 내며 한창 피워대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큰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놈들아, 학교 안 가고 여기서 뭐 하는 겨?”
 
갑자기 호통을 치는 소리가 있어 조바심 속에 바위 틈사이로 내다보니 동네 아저씨였다. 아저씨께 끌려 집에 돌아와서는 학교 빼먹고 담배 피운 죄로 홀딱 벗고 저녁 늦게까지 동네 우물을 돌아야만 했고 어머니께 부지깽이로 실컷 얻어맞고 학교 안간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평소에는 다정다감했던 어머니께서 그때는 정말 무서운 호랑이로 돌변하셨다.
 
등하굣길에도 코스모스가 있어서 심심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함께 놀이하고 소꿉장난을 할 때도 도로 양옆으로 활짝 피어있는 코스모스는 언제나 방긋 웃는 얼굴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신작로 가에 서서 해맑게 웃고 있는 코스모스의 가냘픈 흔들림 속에서 우정의 꽃이 피어났고 신작로 가에 우리가 심어놓은 코스모스가 활짝 피어서 소담스레 피어오르는 모습을 볼 때마다 기쁨도 가득 피어올랐었다.
 
발이 부르트고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도 형형색색의 코스모스를 보고 있노라면 피로가 싹 풀렸다. 그때는 ‘애향단’이라는 활동이 있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마을길도 쓸고 때로는 빈 공터에 콩도 심었고 마을 입구 행 길가에 코스모스를 심기도 했었다. 코스모스에 앉아있는 벌을 잡으려다 벌에 쏘인 적도 있었고 길가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를 꺾어다가 물병에 꽂아 두고 향기를 맡기도 했었다.
 
어릴 적 모습을 회상해보면 코스모스와 같은 들꽃들과 더불어 사랑을 속삭이며 욕심 없이 살면서 친구들끼리 변함없는 따뜻한 우정을 꽃피웠던 것 같다. 새해에는 개처럼 성실하고 충직하며 코스모스와 같이 서로 간에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살아갔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 여름날에 겪었던 화장실의 구렁이 사건은 지금도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일로 기억되고 있다. 낮에 밭에서 따온 참외를 많이 먹었던 탓인지 배탈이 나서 저녁때쯤에는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한 참 일을 보고 있는데 왠지 화장실 밑바닥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큰 구렁이 한 마리가 금방이라도 내 고추를 물어버릴 모양으로 잔뜩 똬리를 틀고 있었다. “으악” 소리를 지르며 바지도 올리지 않은 채 마당으로 뛰어나왔다.
 
집안 식구들은 “무슨 일이냐?”며 한바탕 야단법석이 났고 어머니께서 어디서 그러한 용기가 나셨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작대기를 가지고 구렁이를 끄집어내어 처리하는 것으로 대충 일이 일단락됐다.
 
무더위가 한창인 여름날, 서울로 돈을 벌러 가셨던 둘째 형님께서 사 오신 달콤한 수박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맛이 얼마나 달콤하고 좋았던지 그날 이후로 동네 사람들이 장래 희망이 뭐냐고 물어보면 바로 “수박장사예요”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어린 마음에도 수박 장사를 하면 수박은 실컷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는 누님께서 큰마음 먹고 사 오신 귤 한 상자를 밤새도록 모두 먹어 치운 기억이 있다. 어찌나 맛이 달콤했던지 한 상자를 먹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음 날 일어나보니 손바닥이 노랗게 변해있었고 어머니께 크게 혼이 났었다.
 
가을걷이 때 우리 집 식구들은 온 가족이 일개미들이 정신없이 먹이를 물어서 나르는 것처럼 벼를 베어서 논두렁 한가운데에 볏 집단을 태산만큼 크게 쌓아놓아야 일이 끝났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져서 주변이 캄캄해져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면 “형님, 그만 들어가 유”, “그래, 너희들은 먼저 가거라. 내가 마무리를 할게”라며 마무리까지 완벽히 하시고 나서야 집으로 오셨다.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볏 집단 쌓기가 힘들었을 텐데도 동생들을 사랑하는 큰형님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다. 지금이야 철이 들어서 형님의 그런 소리에도 눈치 빠르게 행동을 했을 텐데 ‘얼싸 좋아라’하고 얼른 형님만 남겨둔 채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싫은 내색 안 하고 마지막까지 마무리하는 것은 늘 형님의 몫이었다.
 
학교에서 배웠던 ‘의좋은 형제’는 교과서의 얘기였다. 형은 힘들어도 내 몸만 편하면 된다는 식으로 집으로 달려온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집에 돌아오면 가을걷이로 수확해 놓은 콩과 팥이며 고추 등을 말리느라 우리 집 앞마당은 발 디딜 틈도 없이 가을걷이로 거두어들인 농작물로 꽉 들어차 있었다. 씨받이로 처마 밑에 매달아 놓은 옥수수를 쳐다보면 마음도 풍성해져서 괜히 기분까지 좋아졌다.
 
마당 한가운데 심어 놓은 감나무에 주렁주렁 빨갛게 익은 감을 큰 형님은 긴 대나무에 감을 쉽게 딸 수 있도록 특별히 갈고리를 만들어서 바구니로 몇 바구니를 따서 큰 항아리에 물을 넣고 우려내면 이튿날 떫은 감도 달고 맛있는 감으로 변신했다. 그래도 겨울에 까치가 먹으라고 몇 개는 안 따고 남겨두기도 했다.
 
호박, 가지, 토란대 등의 나물을 가을볕에 말려야 색과 맛이 오래 보존된다며 어머니께서는 늘 햇볕만 있으면 광주리에 그런 나물들을 담아서 마당 한가운데에 내놓곤 하셨다. 들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면 누가 먼저라고도 할 것 없이 형제들끼리 서로 등목을 해주었다. 흠뻑 땀을 흘린 후에 찬물을 등에 끼얹고 난 후 수건으로 닦을 때의 그 느낌은 정말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독특한 시원함과 개운함이 있었다. 온 가족이 희미한 등불 하나를 켜놓고 마주 앉아서 함께 먹는 저녁 맛은 정말 맛이 있었다. 특히 엄마가 고추를 송송 썰어놓고 어린 호박 몇개를 통째로 넣고 손수 끓여주신 된장찌개는 정말 꿀맛이었다.
 
어쩌다가 동네 어르신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셔서 막걸리 한 잔이라도 거나하게 드시고 흘러간 노래를 부르면 곧바로 마을 노래자랑으로 이어져서 여기저기서 동네 분들이 모여 들여 우리 집은 그야말로 잔칫집을 방불케 했다. 농사를 짓는 동네 어르신들은 그렇게 노래와 술로 농사일의 시름을 달래고 다음 날에는 새벽같이 일어나서 논밭으로 나가셨다. 마을 입구에 우리 집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집은 어른들은 물론 내 또래 친구들의 놀이터였다. 산과 들만 보이는 첩첩산중 산골에서 재배할 수 있는 농작물은 고추와 벼농사가 전부였다.
 
6.25때도 인민군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깡촌에서 논밭 한 마지기 없이 살기 힘들었던 그 당시에 열아홉 살의 나이에 큰형님은 귀도 잘 들리지 않는 청각 장애임에도 불구하고 마흔에 홀로되신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며 집안을 이끌어 가려고 남의 논을 지었다. 온종일 손이 부르트고 허리가 끊어지도록 아픈 고통을 참으면서 오직 농사일에만 전념하셨던 형님의 깊은 속내도 모르고 매일 일만 시킨다며 형님을 원망하고 화장실 다녀온다면서 몰래 도망가서 친구들하고 놀다가 온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지난번 고향에 갔을 때 마을 한 모퉁이를 경운기를 몰고 들로 일하러 가시는 큰 형님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평생 농사일을 하느라고 햇볕에 붉게 그을린 피부와 배가 허리까지 닿을 정도로 깡마른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형님을 좀 편히 쉬게 해드려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가을걷이로 한창 일 고향의 풍경을 그려보면서 올 추석에는 그동안 형님께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아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큰형님은 한참 부모님 밑에서 응석을 부리며 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에 무거운 지게를 지시고 논밭으로 달음박질하셨고 7남매의 장남으로서 어린 동생들의 아버지 역할을 톡톡히 해내셨다. 동네 사람들의 집에 전기가 고장 나면 금방 달려가서 고쳐주고 신발이나 장화가 헤어지면 때워 주고 가끔 술에 취해 땅바닥에 누워 계신 어르신 분들을 등에 업어서 집에까지 모셔다드리는 등, 우리 동네사람들의 ‘손과 발’ 이 돼 주신 형님이셨다. 비록 배우지는 못했고 가진 것은 없으며 귀까지 잘 안 들리는 불편한 몸이었지만 남을 돕고 베푸는 삶을 사셨기에 지금도 최소한 우리 동네 사람들은 형님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믿고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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