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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아빠 엄마 이야기…사위도 자식이잖아요②
왁자지껄 추석 고향 풍경, 그리운 기억 한 조각
형님·누님이 사다 주신 새 옷…할머니가 꺼내주셨던 화로 속 고구마
대통합 필진페이지 + 입력 2017-05-21 19:18:43
 
 ▲ [사진=국민대통합위원회]
고향의 추석 풍경은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한가위 보름달을 바라보며 서울로 돈 벌러 가신 형님 누님들이 “올 추석에는 어떤 선물을 사 오실까?” 하루하루 기다림 속의 흥분과 긴장 속에서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우리 언니는 이번에 새 옷 사 왔다. 우리 형아는 과자를 엄청나게 많이 사 왔어”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온 동네에 자랑하고 돌아다니느라고 바빴고 “여러분, 마을뒷산 공터에서 콩쿨 대회가 있으니 저녁 일찍 드시고 많이 참석해주세유” 이장님의 우렁찬 목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 퍼지면 “이번 콩쿨 대회에는 누가 상을 탈까?”기대하며 저녁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마을 뒷산으로 향했다.
 
콩쿨 대회의 최우수 상품은 시계였고 낫, 곡괭이, 삽 같은 농기구가 대부분이었다. 꾀죄죄한 모습에 햇볕에 검붉게 그을렸던 형님도 충청도 사투리에 시골티가 났던 누님도 서울만 갔다 오시면 뽀얀 얼굴에 서울 말씨를 쓰는 세련된 모습으로 변신했다. ‘나도 어서 커서 형님, 누님들과 같이 돈 많이 벌어 멋진 모습으로 고향에 나타나야지’라는 야무진 꿈도 꾸었다.
 
추석날은 윷놀이와 자치기를 하며 형님 누님이 사다 주신 새 옷을 입고 마치 패션쇼를 하는 모델과 같이 온 동네를 누비고 다녔다.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송편, 떡, 과일과 같은 음식과 동동주를 실컷 나눠 마시며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저녁때는 모두들 얼큰하게 취해서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르셨다. 그날만큼은 음식과 함께 듬뿍 정을 나누었다.
 
서로를 경계하며 마음의 문을 굳게 잠그고 살아가는 요즈음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 올 추석 귀향길은 정말 교통체증 때문에 힘이 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어릴 적 추석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저마다 뭐가 그리 바쁜지 고향을 방문한 사람들도 얼굴이
낯선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대부분 자동차를 타고 번개같이 “획” 지나 가버리니 악수 한 번 하면서 담소를 나눌 기회도 없어 못내 아쉬웠다. 세월이 바뀌어 사람들의 사는 모습도 많이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정이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쉬웠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에 온 가족이 화로 주변에 둘러앉아 고구마를 구워 먹었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느낌이 든다.
 
‘과연 언제 익을까?’
 
턱을 괴고 기다리면서 할머니께서 들려주셨던 호랑이 이야기는 왜 그리 무섭고 재미있었던지 어린 마음에 할머니께서 흉내 내시는 호랑이 음성과 제스처는 정말 놀랍고 신기하기만 했다. 할머니의 이야기에 집중을 하다 보면 어느새 고구마는 노란 살색을 자랑하며 아주 맛좋게 푹 익어 있었다. 껍질을 하나씩 벗기기가 무섭게 어느새 고구마는 입속에 들어가 있었고 그 맛은 정말 꿀맛이었다. 군고구마를 다 먹고 나면 입 주변이 시커멓게 변해있었다. 8남매 형제들이 서로 먹겠다고 화로 주변에서 다툴라치면 “이놈들, 잠깐만 기다려봐라. 할머니가 잘 익은 것부터 꺼내 줄게” 하시면서 뜨겁지도 않으신지 잘 익은 고구마를 하나씩 꺼내서 주셨다.
 
당시 우리 할머니는 동화 구연가 겸 요술쟁이셨다. 8남매의 막둥이란 이유로 잘 익은 맛있는 고구마는 늘 내 몫이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바로 위의 형님께서 “딱지 줄까? 구슬 줄까?” 하시며 내 고구마를 뺏어 먹으려고 딱지나 구슬로 유혹했다. 딱지나 구슬이 고구마보다는 더욱 매력적인 존재였기에 얼른 “그럼, 구슬3개 줘” 하고 형님과 고구마와 구슬을 맞교환했다.
 
그러나 이 모습을 어머니께라도 들키면 “얘들아, 너희들 왜 막둥이 고구마 다 뺏어 먹었니?” 하시며 상황도 모르시고 늘 형님만 나무라셨다. 하여튼 어렸을 때는 막내라는 이유만으로 온 가족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었다. 당시에는 고구마나 감자가 유일한 간식거리였다.
 
특히 고구마의 껍질을 벗겨내고 노란 속살이 보일락 말랑할 때 “호호” 입김을 불면서 총각김치나 배추김치에 턱 걸쳐서 먹었던 군고구마의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고구마를 캐는데도 상당한 기술이 필요했다. 우선 고구마 줄기를 낫으로 걷어낸 후 마치 보물이라도 캐듯이 아주 조심스럽게 고구마 줄기가 있는 주변의 흙을 파내야 한다. 천천히 고구마 줄기 주변의 흙을 파내다 보면 드디어 빨간 고구마의 정체가 드러나게 된다.
 
막 캐낸 햇고구마를 깨끗이 씻은 후 큰 솥에 삶아서 먹으면 유독 더 달면서도 그 맛이 자연의 냄새를 흠뻑 느낄 수 있어 더욱 좋다. 지금같이 설탕이나 잼이 귀했던 시절, 고구마로 조청을 만들어 떡을 먹을 때 찍어 먹으면 떡과 조청의 맛이 함께 어우러져 정말 맛이 있었다.
 
우리 집은 큰 마당과 사립문이 있었다. 오징어 놀이, 사방치기, 자치기, 팽이치기 등 우리 집 마당은 동네 친구들의 놀이터였다.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질 무렵에야 한두 명씩 아이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온종일 시끄럽게 뛰노는 아이들에게 “얘들아, 위험한 장난은 하지 마라”라며 크게 개의치 않으셨다.
 
네 살 때 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시고 홀로 되신 어머니셨지만, 마음만은 늘 부자이셨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들도 우리 집에 ‘마실’(충청도 사투리로 남의 집에 놀러 감을 이르는 말)을 와서 담소를 나누거나 윷놀이를 하셨다. 그런 분 중에는 병수 형 어머니도 계셨다.
 
병수 형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병수 형 어머니는 몸이 아프셔서 병원에 계시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병수 형은 우리 집에서 먹고 자면서 농사일 거들어 주시는 날이 많았다.
 
형님은 어찌나 건강했던지 나보다 나이는 열 살 정도 많았지만 나를 번쩍 들기도 했고 쌀가마를 뒤 광으로 옮기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밥도 나보다 두 세배는 더 먹었고 덩치도 컸다. 7남매 대식구인데도 늘 친형제처럼 지냈다. 어느 추운 겨울, 첫눈이 우리 동네를 하얗게 수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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