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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 보험, 증권, 투자금융, 회계법인 등 다양한 금융업종이 입주한 강남구 역삼동 소재 강남파이내스센터(GFC, 구·스타타워) 빌딩 전경. 지하 8층, 지상 45층, 층고 206미터의 이 빌딩은 한국경제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테헤란로 한 가운데 있고 연면적 기준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오피스빌딩이라는 점에서 강남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금융 및 산업의 상징 같은 건물이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내용과 관계없음. ⓒ스카이데일리
<<1991년 7월 30일 화요일 오후 6시 30분. 서울의 한 생명보험 영업소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아줌마 부대’라고 흔히 불리는 보험외판원(현·보험설계사)들이 한둘씩 영업소로 귀사를 할 즈음의 시간이다. 평소 같으면 내근 총무직원들이 시원한 음료를 내 주면서 아주머니들에게 위로의 말을 할 시간이지만 지금 이들 직원들은 그럴 여가가 전혀 없다. 영업소 총무직 3명의 직원들은 무엇인가를 컴퓨터에 입력하기 바쁘고 쓰기가 바쁘다. 선임 총무는 컴퓨터에 보험가입청약서를 분주하게 입력했고 다른 직원은 빈 청약서의 빈 곳을 메워 쓰느라 정신이 없다. 선임총무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월납입보험료 액수 리스트’뿐 아무것도 없는데 이렇게 가상의 보험가입자들이 마구잡이로 만들어졌다>>
2년여 뒤인 1993년 8월 12일.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은막에 가린 채 상당한 시일을 조직적으로 치밀하게 준비해 왔던 ‘금융실명제 긴급명령’을 발동하고 전격 시행에 들어갔다. 1982년에 일어난 희대의 ‘이철희- 장영자’ 어음사기사건 이후 추진된 금융실제가 두 번이나 번번이 실패한 끝에 이뤄낸 성과였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기 전 보험회사 영업소들은 월말만 되면 ‘가짜 청약서’를 만들고 입력하는 것이 관례였다. 영업소장이 개인별 월납보험료 액수만 정해주면 총무직 직원들은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등을 모두 가짜로 입력하고 청약서를 작성해 마치 진짜 가입이 이뤄진 것처럼 본사에 월말 허위보고를 했다.
가장 입력하기 힘들었던 가짜 주민등록번호도 단 몇 번의 조합만 잘 하면 입력이 되던 시절이었다. 가짜 주민번호 입력이 갖는 의미는 특정 보험회사에 ‘가명의 유령인간’이 탄생하는 것과 같았다.
영업소장들은 월말만 되면 아줌마 직원들의 수당을 맞춰주고 영업소 지원수당을 타내기 위해 이렇게 가짜 계약자를 양산해 냈다. 영업소장은 통상 10~20가지에 달하는 아줌마 영업직원들의 각종 수당을 인위적으로 조합해 챙겨주면서 ‘활성인원’(일정 출근일수가 넘는 출근인원)을 맞춰야 했다.
영업소장들은 이를 기반으로 한 또 다른 10여 가지의 영업소 수당을 복잡한 퍼즐 게임하듯 계산해 낸 뒤 가짜 계약자 수와 개별 보험료 납입액수를 산정했다.
이는 이들 가짜 계약자를 최소 3개월에서 최장 1년 6개월 이상 유지할 경우 투입되는 월납보험료 총액(신계약 및 유지보험료 합산)과 본사에서 떨어지는 수당 총액의 수지차 계산이 끝난 뒤 이뤄지는 작업이었다. 아줌마 직원 및 영업소 수당들이 보험상품 마다 그리고 계약이 유지되는 기간 마다 전부 달랐기 때문에 이 계산은 마치 계리사(計理士) 수준의 복잡한 산식으로 산출됐다.
청약서 입력 마감이 끝나면 다음날(월 마지막날)은 신계약보험료 및 유지보험료 송금마감을 해야 한다. 단 하룻만에 영업소장과 총무는 사채시장을 훑는다. 그 이전의 가짜 계약자 유지보험료까지 감안하면 매달 이처럼 월말에 개인적으로 빌려거나 회전시켜야 할 돈은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억원에 달했다.
한 마디로 ‘돈 놀이’와 하등 다르지 않은 보험영업의 적나라한 현장이었다. 영업소장은 외견상 밑지는 장사를 안했다. 하지만 대개 영업소장들은 4~5년, 길게는 7~8년이 지나면 집 한 채를 고스란히 날리고 회사를 떠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눈앞의 돈은 남아보였지만 그것은 빚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흥청망청 쓴 대가가 한꺼번에 후폭풍으로 닥치는 것이었다. 당시 이렇게 혹독한 시련을 겪은 보험영업소장들은 보험회사 고층빌딩들을 향해 영업소장과 아줌마 직원들의 고혈을 빨고 세운 것이라고 비아냥댔다.
금융실명제는 이런 가짜 금융거래가 판치던 시절에 전광석화처럼 시행됐다. 은행에서도 얼마든지 가명으로 예금거래가 가능했던 시절이었던 만큼 지금의 시각으로는 도무지 상상 자체가 안 되는 시절이었다.
오늘(12일)로 금융실명제 시행 20년을 맞는다. 모든 금융거래에서 가짜이름이 사라진 것이 큰 성과다. 국민 모두는 금융거래를 하려면 반드시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는 이것이 상식으로 통하겠지만 중장년 세대는 아니다. 지금도 방식은 다르지만 ‘유사 사람’이 무수히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 한국경제는 급속히 발달한 제조업에 비해 금융업이 상대적으로 크게 낙후돼 있어 금융선진화 작업이 긴요하다. 산업자본의 성숙은 금융자본의 성숙으로 그 부가가치가 완성된다고 하지만 한국은 금융업이 산업발달을 막고 있을 정도로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사진은 증권업체들이 몰려 있는 여의도 증권가의 서울국제금융센터(IFC서울) 전경. ⓒ스카이데일리
‘차명거래’가 여전히 법의 보호 안에서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탓이다. 중장년 세대 중 차명거래를 쉽게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은 아예 기본이 됐을 정도이고 소규모 자영업자를 운영하는 사업자들도 대부분 차명거래에 익숙하다.
가명거래와 차명거래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 세상에 아예 없는 ‘가짜 사람’을 만들 수 없도록 한 것은 큰 진전이다. 하지만 ‘돈의 가짜 주인’이 만들어지는 것을 기준으로 보면 예나 지금이나 ‘가짜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돈 입장에서 보면 가짜 사람이 맞다는 것이다.
국회에서는 정치인들이 이 같은 차명거래를 원천 차단하거나 보완하기 위한 입법안을 봇물처럼 쏟아내고 있다. 우리 정치가 패션거리에서 한바탕 유행하는 것과 유사한 행태를 보여온 것처럼 차명거래 입법안도 이처럼 거세게 유행바람을 타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차명거래를 보다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는 길이 마련될 듯 보인다. 하지만 어떤 법률도 차명거래를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없을 것이라는 회의적인 시각이 훨씬 많다. 국민 모두가 일반적인 차명거래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불법적인 요소만 솎아내서 법률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기는 하다. 하지만 차명거래가 잉태된 원인과 방법에 대한 무수한 변수를 조합해 따져보면 수백만 종류의 차명거래가 나올 것이라고 금융전문가들은 우려한다. 법으로 불법 차명거래 종류를 명시하는 순간 이를 빠져나갈 구멍들이 훨씬 많이 생겨 오히려 ‘면피효과’가 커질 것이라는 진단이다.
따라서 불법요소를 명시하는 것 보다 사후처벌을 강화하자는 얘기도 많이 나온다. 예방적 효과가 충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비자금 거래에 대해서는 단호한 형사처벌이 이뤄지고 있다.
비자금은 대부분은 차명거래를 통해 이뤄진다. 비자금 처벌은 그동안 수많은 학습효과로 인해 그 효과가 크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처벌수위를 무한히 높이면 오히려 이를 무마하기 위한 고도의 로비와 불법 거래가 더 횡횡할 소지가 높기도 하다.
이처럼 차명거래는 법망을 오밀조밀 만들수록 더 많이 빠질 구멍이 생기고, 처벌을 강화한다고 하면 은밀한 차명거래가 더욱더 음지로 깊이 깊이 파고 들어갈 가능성이 커진다.
불법 차명거래를 근본적으로 막을 방법은 당장 효과를 거두기 어렵지만 분명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두 가지를 감수해야 한다. 하나는 시간이고, 또 하나는 양심이다. 전자는 시간이 무던히 소요될 범사회적인 투명성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차명거래를 근본적으로 막지 못한다는 뜻이고, 후자는 이 과정에서 개인의 양심이 고양되는 공동체 문화가 떠받쳐 줘야 한다는 의미다.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인 부와 명예 중에서도 ‘부자’에 대한 욕구는 더 크다. 돈을 움켜쥐려는 속성은 모든 사람에게 내재된 속성이다. 아무리 강력한 법률이나 처벌도 이 욕망을 절대 잠재우기 어렵다.
우리 사회의 ‘관계십 문화’와 그와 관련된 '행정 시스템‘, ‘세금 체계’ 등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부를 이루기 어렵게 하고 있다. 비자금을 조성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인식이 국민들 뇌리에 박혀 있다는 것이 근본적인 선 척결 대상이다.
범사회적인 투명사회 제고는 그래서 반드시 필요한 차명거래 척결의 선결조건이다. 투명사회는 길게는 수십년간 학교 및 가정교육을 기반으로 이뤄지고 체계화 된다. 오늘의 젊은이들이 과거의 가짜이름 거래에 상상을 못하듯이 긴 시간이 필요하다. 이를 떠받치고 탄탄히 해 줄 요소는 양심(공동선)의 다른 말인 ‘공동체문화’로 일컬어지는 사회적 조류의 변화다.
다행히 우리는 더디기는 해도 많이 투명해 졌다. 아직 중장년 세대는 ‘맑은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 수 없다’고 대개 말하지만 앞으로는 ‘맑은 물에서만 큰 물고기로 성장한다’는 말로 바뀌도록 해야 한다.
공동체와 함께 상생하는 개인과 기업만이 큰 부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생태환경을 만드는 것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겉도는 법률을 만드는 것 보다 훨씬 소중하다. 정치인들도 메뚜기 제철 만난 것처럼 효용성이 없을 법을 마구잡이로 양산하지 말고 개인과 기업들이 건전하게 클 수 있는 ‘인센티브 법률’을 오히려 고민하고 내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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