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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보건부(Department of Health)는 ‘과학과 혁신 전략(2001)’이라는 백서를 통해 “(보건부는) 보건의료산업을 지원하며, NHS(국민보건서비스)를 통해 의학 연구에 기여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보건부의 역할이 크고 명확하게 드러난다. 우리 보건복지부도 보건산업 육성정책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산업육성에 있어 보건복지부의 역할은 늘 R&D 지원에 국한돼 있는 듯하다. 원인은 정부의 조직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 후생성은 조직 내에 ‘경제과’를 두고 보건산업계의 대정부 단일 창구로 활용하고 있다. 예컨대 제약기업은 보험, 규제, 기업경영 등 민원의 성격에 관계없이 모두 경제과를 통해 문의하고 건의해야 한다. 민원을 접수한 경제과 담당자는 해당 민원을 담당하는 과와 협의를 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민원을 제기한 기업의 입장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시스템은 정부 조직 내부에서 자연스런 협의와 조정과정을 거치도록 함으로서 후생성의 보건산업정책과 의료보험정책, 또는 의료보험정책과 규제정책의 충돌을 막는다. 우리 제약기업은 민원이 발생할 경우, 보험문제는 보건복지부 ‘보험약제과’와, 리베이트 및 의약품 규제 등의 문제는 ‘의약품정책과’와, 산업육성정책과 관련해서는 ‘보건산업기술과’와 협의해야 한다. 산업 전체를 조망하며 문제해결을 도모할 시스템이 구축될 수 없는 구조다.
내키지는 않지만, 우리가 참고할 만한 일본 사례를 더 들어보자. 일본은 허가 당국이 승인한 의약품의 대부분을 의료보험에 적용하고 있다. 일본 제약인들에게 “비아그라 같은 발기부전치료제도 보험적용이 되나요?”라고 질문하면, “그럼요. 정부가 허가한 약인데요”라는 다소 썰렁한 답변이 돌아온다. 우리나라는 식약청에서 시판을 허가한 약이라도 보험적용을 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임상적 유용성’과 ‘비용 효과성’이라는 다소 어려운 용어를 잣대로 삼아 보험적용 여부를 다시 심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정부가 허가했지만 건강보험에 적용되지 않는 의약품이 꽤 있다. 어느 쪽이 더 좋은 방법인지 선뜻 판단할 수 없지만, 우리 방법이 비용 효과적이지 않음은 분명한 것 같다. 물론, 일본은 우리와 같이 보건복지부와 식약청이 분리돼 있지 않고 의약품 허가업무를 후생성 내부 식약국에서 하기 때문일 수 도 있다. 그러나 정부 정책의 일관성 측면에서 꼭 참고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서두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후발주자인 한국 제약업계를 엄습하고 있는 거대할 실체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다. 그 실체가 정부의 주도면밀한 전략 속에 진행되는 ‘개혁’인지, 국민 정서와 여론이 반영된 엄중한 시대의 ‘요구’인지, 아니면 거대한 세력의 ‘음모’인지 알 수 없다. 반대로 제약업계가 처한 냉혹하고 암담한 현실이 있지도 않은 실체를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선, 보건의료정책임과 동시에 제약산업정책의 근간인 보험약가제도의 개편내용을 보자. 10월 31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개편안에 따르면, 최초개발 의약품의 특허가 만료되면 동일제제 의약품 모두가 특허 전 가격의 53.55% 수준으로 떨어진다. 이 룰에 의해 이미 시장에서 발매되고 있는 보험의약품 대부분이 내년 3월 현재 약가에서 최고 33%까지 인하된다. 이 금액이 1조 7000억 원이다. 제도개편에 있어 보건복지부가 얼마나 보험재정논리에 충실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보험약가정책과 산업정책을 함께 아우르기에는 구조적 한계가 있는 조직임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제약업계는 약가제도 개편 단행과 함께 오직 생존을 위해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긴축경영에 나서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충격을 이겨내고 살아남으면 탄탄한 미래가 열릴 것인가. 산업의 경쟁력은 단단해지고 글로벌화에 성큼 다가서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일괄 약가인하 충격을 이겨낼 돌파구마저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개량신약과 복합제, 그리고 원료합성 의약품은 후발주자인 한국 제약산업이 선진국 제약산업을 따라잡는데 꼭 필요한 징검다리 역할을 해 왔다. 정부 역시 그동안 제네릭의약품 개발에서 개량신약 개발에 집중하라는 정책적 신호(Signal)를 꾸준히 보내왔다. 그러나 이번 약가제도 개편안에 포함된 개량신약, 복합제, 원료합성에 대한 가산제도는 그동안의 약가우대책에서 대폭 후퇴해 국내 제약기업이 전혀 활용할 수 없는 것이 돼버렸다. 정부가 내건 제도개편의 기치는 ‘산업경쟁력 강화’와 ‘글로벌화’였지만, 정작 보험약가시스템은 기업들이 후퇴를 거듭하며 저가 제네릭을 양산할 수밖에 없도록 구축해 놓은 것이다. 기업경영의 앞과 뒤가 꽉 막혀버린 형국에서 언감생심 바다 밖은 바라보지도 못하고 과열된 저가 제네릭 시장을 기웃거려야 하는 실정이다.
여기에서 정부의 다음 수순이 못내 궁금해진다. 유수의 제약기업들이 체력을 상실하고 R&D의지와 역량마저 잃어 기업가치가 하락된 상황에서 정부는 어떤 정책을 들고 나올 것인가 하는 의문을 지울 길 없다. 이 같은 형국에서도 여전히 리베이트 이슈와 약가제도 논쟁이 지속된다면, 이번 약가제도 개편안의 파격적 조치는 전략도 없고 방향도 없고 성과도 없는 우발적 행위로 귀결될 것이다. 국민들이 한 순간 참 좋아했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정부가 시기를 놓치지 않고 제약기업간 M&A를 몰아붙인다면, 성공 여부를 떠나 그나마 정부의 개혁의지와 산업구조 재편의 진정성은 확인될 것이다. 최악의 상황은 M&A를 통한 거대 자본의 제약시장 개입이다. 이렇게 되면 진위 여부를 떠나 정부가 제약시장에서 뛰고 있는 선수(제약기업)를 인위적으로 교체하려 했다는 의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보건산업의 환경은 작은 경쟁에서 큰 경쟁으로 변화하고 있다. 거대 다국적기업을 중심으로 세계시장 집중현상이 심화돼 있어 후발주자의 세계시장 진입이 매우 어려운 분야다. 선진국은 보건산업에 대한 허가ㆍ심사ㆍ품질에 대한 공통 규범 확산을 통해 후발 국가와 기업의 세계시장 진입 장벽을 더욱 높여가고 있다. 이 장벽은 후발주자인 우리나라의 정부와 기업이 힘을 합쳐도 넘기 힘들다. 이를 너무도 잘 아는 보건복지부가 후발주자 중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국내 제약산업을 비탈로 내모는 모습이 위태롭고 불안하기 그지없다. 보건복지부의 보험약가정책에 복안과 혜안이 숨어 있기만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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