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쓰는 역사 [3] ‘화왕계’에 충신으로 등장한 할미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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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계’를 후대에 전하게 한 신라 신문왕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3-19 12:15:04

▲ 할미꽃의 별칭 ‘백두옹’에는 ‘머리 하얀 노인’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윤상구 사진작가

“뒷동산의 할미꽃 꼬부라진 할미꽃/ 젊어서도 할미꽃 늙어서도 할미꽃/ 하하하하 우습다 졸고 있는 할미꽃/ 아지랑이 속에서 무슨 꿈을 꾸실까”

어린 시절 동요를 즐겨 부르던 세대라면 귀에 익숙할 이 ‘할미꽃’ 노래 가사는 박목월 선생의 작품이다. 그런데 가사를 새삼 곱씹어 보니 무심코 노래 부를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구절이 눈에 띈다.

“하하하하 우습다 졸고 있는 할미꽃/ 아지랑이 속에서 무슨 꿈을 꾸실까”

이 구절이 나이 든 사람에 대한 조롱처럼 들린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설총이 신문왕에게 들려준 우화 ‘화왕계’

남북국시대 신라의 설총은 나이 든 사람에 대한 편견을 경계하기 위해 ‘화왕계(花王戒)’라는 이야기에 할미꽃을 등장시켰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설총은 한자음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한 이두 문자를 집대성한 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설총이 신라 신문왕에게 들려주었다는 ‘화왕계’는 삼국사기 ‘열전’ 설총조에 실려 있는 우화이다.

이 우화에서는 꽃나라를 다스리는 화왕(花王·모란)과 미인(장미), 백두옹(할미꽃) 등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미인은 아름다운 외모로 아첨하는 캐릭터지만 백두옹은 베옷에 가죽 띠를 두른 추레한 차림으로 나타나 왕에게 충언을 한다.

‘백두옹’이라는 이름에는 ‘머리 하얀 노인’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처음에 화왕은 많은 꽃 중에서 겉모습이 아름다운 미인을 가까이 두려 했다. 그러나 백두옹의 충직한 태도에 누구를 선택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백두옹의 조언에 따라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신문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설총의 이야기가 매우 뜻이 깊다”면서 이를 글로 옮겨 후세 임금들에게 전달되도록 하였다고 한다. 자신의 부귀공명만을 꾀하면서 말만 번지르르한 무리를 멀리하고 겉으로는 초라해 보일지라도 나이 든 사람의 지혜와 경험을 존중해야 한다는 교훈은 신문왕 이후 1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통일 후 신라 제도를 정비한 신문왕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듣는 사람이 그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소용없다. 그러니 우화 ‘화왕계’가 담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후대에 전하라고까지 한 신문왕의 됨됨이를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신문왕은 삼국통일 대업을 시작한 태종무열왕의 손자이며 20년에 걸친 긴 전쟁을 마무리하고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왕의 아들이다. 그러니 신문왕은 신라에 바야흐로 평화와 풍요가 깃들기 시작한 때의 임금이다.

태종무열왕 때부터 시작된 신라 왕실의 전제 왕권은 신문왕 때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전쟁을 치르려면 귀족들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듯이 전쟁이 끝나면 왕을 도와 승리를 이끌어 냈던 다양한 세력을 정리할 필요가 생긴다. 그들의 ‘청구서’는 왕이 주도적으로 나라를 이끌어가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문왕도 귀족 세력에 대한 과감한 정치적 숙청을 단행했다. 또 삼국을 통일한 뒤 영역이 넓어진 지방 통치를 위한 제도 정비도 이때 이루어졌다.

692년 무열왕의 묘호 태종이 당나라 황제 묘호와 중복되니 바꾸라는 당나라의 압력이 있었다. 그런데 신문왕은 무열왕의 지대한 업적을 고려하여 지은 묘호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완곡하게 그 요구를 거부했다. 당나라에도 담대하고 당당한 외교력을 발휘한 것이다.

인재 등용 지침으로서의 ‘화왕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