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한의 중국고전] 횡재했으나 횡사해 버린 기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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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심만을 잣대로 기겁을 대장 세운 연(燕) 혜왕
끝내 드러난 낙하산의 한계 민주당서 재현

오주한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3-18 06:30:30

▲ 공석이 된 더불어민주당의 서울 강북을 후보 자리를 놓고 경선 2위인 비명계 박용진 의원의 후보직 승계 여부에 대해 정치권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연합뉴스

기겁(騎劫)은 오로지 연줄 하나로 대장 자리까지 오른 중국 전국시대 연(燕)나라의 장수다. 계파를 잘 만나 벼락출세했으나 막상 적을 만나자 ‘기겁’하고 달아난 졸장부다.

연나라 소양왕(昭襄王)은 장수 악의(樂毅)를 내세워 제(齊)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다. 악의는 두 개 성지를 제외한 제나라의 모든 영토를 점령했다. 악의를 시기했던 태자는 그를 모함했으나 도리어 소양왕으로부터 두들겨 맞았다.

그런데 소양왕이 승하하고 새 임금에 오른 게 바로 문제의 태자인 혜왕(惠王)이었다. 제나라는 즉각 “악의가 반역을 꾀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건수 잡았다 여긴 혜왕은 악의를 평가 하위 20%에 포함시키는 식으로 사실상 컷오프해 버렸다. 그러고는 철저히 친혜(친 혜왕)파인 기겁을 새 대장으로 삼았다.

당시 제나라 수비군 대장은 명장 전단(田單)이었다. 전단은 짐짓 “기겁은 제나라 사람을 잡기만 하면 코를 벤다고 한다. 또 성 밖의 제나라 사람 조상님 묘를 파묘한다고 한다. 아 무섭다. 우리는 이제 망했다”는 풍문을 흘렸다. 무릎을 탁 친 기겁은 보이는 족족 제나라 사람의 코를 자르고 그들의 조상 묘를 갈아엎었다. 제나라 백성들은 두려워하기는커녕 치를 떨면서 결사항전을 다짐했다.

전단은 나아가 기겁에게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투항을 약속했다. 제나라 평정은 이제 시간문제라 착각한 기겁은 모든 병사에게 갑옷을 벗고 창칼 내려놓은 채 쉬도록 했다.

이 꼴을 본 전단은 결사대 5000명과 소 1000마리를 모아 급습을 준비했다. 진군의 북소리가 울려 퍼지자 성문을 열어젖힌 결사대는 소꼬리에다가 일제히 불을 붙였다. 놀란 소들은 괴물 같이 날뛰면서 퍼질러 자던 연나라군 진채를 덮쳤다.

오늘날에는 동물 학대로 비난받을 일이지만 전단의 결사대로서는 신의 한수였던 셈이다.

연나라 병사들은 소 발굽에 밟히거나 뿔에 들이받혀 줄줄이 목숨 잃었다. 혜왕을 뒷배로 횡재했던 기겁은 기겁하고 달아나다가 전단이 내지른 한 창에 찔려 외마디 비명과 함께 횡사했다. 전단은 잃어버린 제나라 영토를 모두 수복했다. 혜왕은 그제야 후회했으나 악의는 이미 조(趙)나라로 망명한 뒤였다.

더불어민주당에서 친명계인 정봉주 서울 강북을 후보의 공천이 취소됐다. 따라서 강북을 경선에서 2위를 한 비명계 박용진 의원의 공천 승계 전망이 나왔으나 민주당은 전략 경선을 택했다. 이를 두고 또 다른 친명계 인사가 강북을에 공천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16일 제기됐다. ‘연줄’로 출세했던 기겁의 험한 말로를 볼 때 공천 기준이 오로지 ‘계파에 대한 충성심’ 하나라는 논란에 휩싸인 민주당 총선 성적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오주한 정치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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