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수 
▲ 명리학자 김태규 칼럼니스트
지난 23일은 處暑(처서)였다. 말로는 입추부터 가을이라 하지만 그건 가을이 이제 발치에 당도해 있다는 것이고, 실질적으로는 이날 부로 여름은 끝이 나고 가을이 시작되었다. 그러니 다음날인 24일 아침, 찌푸렸던 하늘은 곧 가을하늘이었다.
며칠 전 밤, 구름 잔뜩 깔린 어두운 하늘을 돌연 번개가 번쩍 내리치며 환히 밝혀주었다. 마치 빛의 용이 밤하늘로 급히 승천하는 것 같았다. 참 거 멋지네! 하며 찬탄하다가 문득 周易(주역)의 屯卦(둔괘)가 떠올랐다.
둔괘는 水雷屯(수뢰둔)이다. 위에는 물이 있고 밑에 번개가 있다. 여기서 물은 비구름, 그러니 비구름 속에 번개가 번쩍이는 모습이 屯卦(둔괘)이다.
周易(주역)을 제법 읽었기에 예전에는 가끔 궁금한 일이 있으면 六爻(육효)를 빼보기도 했다. 이에 둔괘가 나오면 ‘에이, 틀렸구나, 아직은 시기상조야’ 하면서 실망하곤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세상을 좀 겪다보니 이 屯卦(둔괘)야말로 참 멋진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떤 일이 당장 이루어지길 기대하는 자에게 둔괘는 분명 좋은 괘는 아니다.
먹장구름 잔뜩 깔려있는 하늘에 번개가 치고 있으면 비가 내리는 중이거나 곧 비가 내리치기 직전 상황이다. 그리하여 잔뜩 비가 올 만큼 다 오고 나면 하늘이 맑게 갠다.
그러면 풀들이 부쩍부쩍 자라나고 나무들이 가지를 뻗어가며 잎사귀를 새롭게 만들어 달게 된다. 이로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따라서 비구름 속에 번개가 치는 형상의 屯卦(둔괘)는 조짐을 의미한다. 兆朕(조짐)이라는 것은 아직 어떤 일이 즉각 이루어진다는 의미는 당연히 아니다.
屯(둔)이란 글자는 한 一(일)과 싹이 틀 屮(철)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땅거죽을 뜻하는 한 一(일) 밑에 싹을 의미하는 屮(철)이 있다는 것은 새싹이 현재 땅 속에서 바깥으로 나오느라 한창 애를 쓰고 있음을 뜻한다.
아직 이루어지기 전이고 이제 兆朕(조짐)이 보인다는 것인데 어찌 하여 멋지다 하는가?
물론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조짐이 보였으니 조만간 어떤 일이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이를 시기상조가 아니라 開封迫頭(개봉박두)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에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면서 결과를 지켜보는 재미가 여간 쏠쏠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다.
그래서 이제 나는 水雷屯(수뢰둔)의 괘를 썩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여기서 나이가 들면 좋은 점에 대해 잠깐 얘기하면 두 가지 장점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보다 세상 일이 생각보다 더디 된다는 것을 알아서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속내를 밝히거나 털어놓지 않아도 그다지 답답하지 않아서 말로 인한 실수가 적어진다는 점이라 하겠다.
이런 것을 두고 사람들은 老獪(노회)하다는 다소 부정적인 평을 하는 것 같지만 어쨌거나 이제 나 호호당도 제법 노회해진 것이 사실이다.
돌아와서 兆朕(조짐)을 뜻하는 둔괘를 얘기했는데, 處暑(처서) 무렵이면 하얀 벼꽃이 핀다. 꽃이 피면 바로 수정에 들어가 그로서 알곡을 만들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벼꽃이 피었다는 것은 이제 알곡이 생겨날 조짐이다.
모든 일은 그에 앞서 조짐이 있으며, 또 지금 생겨난 일은 나중 일의 조짐이 된다.
외롭다는 것은 연애의 조짐이고, 연애는 결혼의 조짐이고, 결혼은 출산의 조짐인 식이다. 그러니 그 어떤 일도 그 자체로서 끝나거나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나중 일의 조짐이 된다. 이를 불교에선 因果(인과)라고 한다.
최근에는 학자들이 밥값을 하느라 인과 관계가 아닌 상관관계를 연구한 논문을 툭 하면 발표한다.
가령 손톱을 자주 깎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수명이 짧다는 식의 웃기는 상관관계가 수시로 보도되고 또 인터넷에 돌아다닌다.
그런 논문이 발표되고 나면 사람들은 그것이 상관관계일 뿐 손톱을 자주 깎는 것이 수명이 짧아지는 인과관계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 손톱 깎는 주기를 되도록 길게 해야겠다는 별 신통치 않은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는 분명히 구분해서 다룰 필요가 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당신이 뇌가 없는 사람이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이것으로서 결정이 된다.
다시 돌아와서 알곡을 만들어내는 벼꽃이 피고 있다는 말은 올해 가을의 결실은 사실 이맘때로서 모두 결정이 지어진다는 뜻이다.
비단 쌀의 작황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들이 처서로서 금년의 결실이 어떠하리라는 조짐을 보여주는 때가 바로 處暑(처서)인 것이다.
왜 처서가 중요한가? 그것은 처서로부터 모든 기운이 陰(음)으로 돌아서기 때문이다.
빛은 6월 20 일경의 夏至(하지)로부터 줄어들기 시작했고, 熱(열)은 7월 20 일경의 大暑(대서)로서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이제 공기 중의 濕氣(습기)가 처서로서 줄어드니 세상을 만들어가는 모든 기운들이 처서로서 모두 陰(음)의 국면, 즉 줄어드는 국면으로 들어갔다.
陰(음)의 局面(국면)은 6 개월간 이어져 내년 2월 20 일경의 雨水(우수)에 가서 전환된다.
이 기간을 두 개로 나누면 바로 가을과 겨울이다. 가을은 처서부터 양력 11월 20 일경의 小雪(소설)까지 3개월이고, 겨울은 소설로부터 내년 2월의 雨水(우수)까지 이어진다.
가을은 결실을 보는 계절이고, 겨울은 이제 끝이 났으니 해체되는 뒷정리 기간이다.
그렇기에 올 가을의 상황을 예측해보는 시기는 바로 지금 처서인 것이다.
처서를 전후해서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다양한 뉴스들, 정치와 경제, 기타 여러 방면의 소식들이 금년에 있을 수 있는 결실들을 결정짓는다.
정치를 보면 이웃나라들과의 관계, 특히 일본과 중국과의 관계가 우려스러울 정도로 악화되고 있으니 장차 그 나라들과의 모든 것이 어려워질 조짐이다.
또 대선의 경우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결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야당은 여전히 후보가 오리무중이다. 박근혜가 굳히기로 돌입하고 있다.
경제를 보면 더욱 어둡다. 이번 달 우리 수출이 수입보다 적어서 赤字(적자)를 보일 전망이라고 하니 장차 무역수지의 악화가 우려된다. 부동산 하락세가 이어지고 있으니 앞으로도 계속 이런 추세가 유지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 최근에 보도되는 내용들은 올 한해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서로 꼬리를 물면서 길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처서에 나타난 조짐들은 단순한 조짐이 아니라 짧게는 금년 하반기를 결정하고 길게는 그 영향력이 3 년에서 5 년에 걸쳐 미친다.
비구름 속에 번개가 치고 있으니 비가 올 조짐이고, 비가 오면 초목이 무성해져서 풍요로운 세상이 될 것이며, 가을 곡식도 풍성하게 되며 이로서 그 다음해에 이르기까지 기근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적어지던 옛날이다.
이는 시장경제가 글로벌 스케일로 엮어있는 오늘의 세계도 옛날과 비교해서 사실 그다지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이에 屯(둔)의 괘, 수뢰둔의 形象(형상)이 멋진 구석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이글을 읽는 독자들은 또 어떤 생각을 할 것인지?
김태규의 희희락락호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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