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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머물면 지혜로운 ...'))
‘어리석은 사람(遇者)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달라진다’고 해서 지리산(智異山)이라 불이웠다 하던가. 성탁산악회 이희용(80. 연합뉴스) 회원이 천왕봉 등정기를 보내 왔다. 전송된 원문 그대로 실어 보았다. 함께 지리산을 떠나 본다.
... 9월 2일, 금요일 회사 앞에서 밤 9시에 우등 관광버스로 출발했다. 천왕봉 일출을 보기 위해 평소 회사 산악회의 무박 산행 때보다 3시간 정도 일찍 떠난 것이다.
퇴근해서 집에 갔다가 서둘러 저녁 먹고 배낭 챙겨 회사 앞으로 돌아왔다. 출발 인원은 모두 20명. 모두들 기대감에 설레는 표정이면서도 어둠을 뚫고 천왕봉을 오른다는 부담감을 떨치지 못하는 듯하다.
밤 12시께 덕유산 휴게소에 들러 야식으로 육개장이나 황태 해장국을 한 그릇씩 먹었다. 평소에는 새벽 서너 시쯤 이른 아침을 먹는데, 이것 역시 익숙지 않더군. 중산리에서 내려 등산화 끈을 조여 매고 머리에 랜턴을 쓴 뒤 천왕봉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때가 새벽 2시. 일출 시간이 6시께이니 여유가 있는데 차질이 생겼다.
깜깜한 밤에 길을 걷다보니 후미의 5명이 칼바위로 향하는 길을 놓쳐 도로 따라 청소년수련장 방향으로 계속 갔던 것이다. 이들은 로터리 산장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많이 돌아오다 보니 시간이 지체됐다. 또, 일행 중 5명 정도가 힘에 부쳐 쳐졌다.
일출 시간 전에 천왕봉에 도착한 일행은 모두 10명. 올라오는 길에는 별이 총총 떠 있어 모처럼 일출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정상에 오르니 바람이 불고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다.
정상에서 일출을 기다리던 50여명의 등산객이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일전에 후배 유성재(84학번)한테 전화로 얘기한 대로 천왕봉 일출은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데, 기자란 게 3대가 악업을 쌓아야 할 수 있는 직업이다 보니 역시 쉽지 않더군.
나 말고도 일행 중에 ‘악질 기자’가 몇 명 있어 멀쩡하던 날씨가 심술을 부린 듯하다. 다른 등산객 가운데는 누대에 걸쳐 덕을 쌓은 사람도 있을 텐데 우리 일행 때문에 모처럼 일출을 볼 기회를 놓치게 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다.
소주로 몸을 녹이며 그래도 해를 볼 수 있을까 기다렸는데 빨간 빛은 고사하고 뿌연 기운 속에 날이 밝아온다. 말 그대로 날 샌 거다. 구름 사이로 달처럼 하얀 해의 귀퉁이가 모습을 잠시 드러내자 등산객들이 그것만이라도 반가워 환호성을 지른다. 그런데 카메라를 들이댈 틈도 없이 모습을 감추자 이내 탄성이 탄식으로 바뀐다.
천왕봉 정상석에서 인증샷을 찍고 장터목으로 향했다. 내려가는 길에 발아래 깔린 운해와 연봉들이 그나마 아쉬움을 달래준다. 반야봉과 노고단 쪽으로는 여전히 안개 속이다.
장터목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라면을 끓여 먹는 사람, 담배를 피우는 사람, 사진을 찍는 사람 등으로 왁자지껄하다. 우리도 자리를 잡고 아침 식사를 했다.
나는 아내가 추운 새벽에 산에서 찬밥을 먹는 게 안타깝다며 보온 도시락에 밥을 싸줬다. 메뉴는 김치 볶음밥. 반찬이 마땅치 않다며 고심 끝에 고른 것이다. 보온 도시락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김치 볶음밥을 퍼먹으니 차가운 김밥을 먹던 일행들이 모두들 부러워한다. 맛을 보라며 한 숟갈씩 퍼주니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쩝~.
식사를 마치니 후발대는 이제야 천왕봉에 도착한 모양이다. 1시간 남짓 차이가 난 것이다. 어차피 일출을 포기하고 쉬엄쉬엄 오른 모양이다.
선발대 일행 중 한 명이 “여기까지 왔는데 천왕봉만 찍고 그대로 하산하기 아깝다”고 말하자, 내가 “후발대가 도착하려면 더 기다려야 하고 오면 또 밥도 먹어야 하니 희망자에 한해 세석평전까지 능선 길을 걸은 뒤 한신계곡을 거쳐 백무동에서 만나면 된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에 동참한 5명은 후발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짐을 꾸려 서쪽으로 출발했다.
촛대봉을 거쳐 세석으로 향하는 길은 역시 지리산 종주산행의 참맛을 보여주는 구간이었다. 노고단 쪽은 여전히 안개에 휩싸여 있지만 좌우로는 연봉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듯하다.
한신계곡은 대학교 4학년 때 올라와보고는 28년 만에 처음 내려가 보는 길이다. 산길을 오래 걸어 다리도 풀리고 발바닥도 아프지만 한신폭포와 가내소폭포의 절경이 피로를 씻어준다.
후발대보다 늦게 도착하면 민폐를 끼친다는 생각에 제대로 경치 감상도 못하고, 계곡 물에 발 한번 담그지 못한 채 서둘러 내려왔다. 다른 일행보다 3.4km 더 걸은 셈인데 후발대의 맨 후미보다는 우리가 먼저 도착했다. 낮 12시께 백무동에 모두 도착했다. 꼬박 10시간을 걸은 셈. 나를 포함한 5명은 16.4km, 나머지 15명은 12.9km 산길을 걸었다.
지리산을 여러 차례 찾았지만, 이번처럼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오르내린 것은 처음이었다. 등산로가 정비된 덕인지 예전의 기억만큼 힘들지는 않더군.
식당 샤워장에서 몸을 씻고 삼겹살과 함께 소주 폭탄주를 들이켜니 기분이 최고다. 성재 전화를 받은 것도 이때쯤이다. 실컷 먹고 떠들고 노래까지 부른 뒤 버스에 올라 곯아 떨어졌다.
깨보니 어느덧 회사 앞. 오후 7시. 술 약속이 두 건 있었지만 어차피 늦었고 술도 덜 깬 터라 모두 파기한 채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이튿날 골프 약속 때문에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야 하는 것도 부담이 됐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하루가 꿈같이 흘러갔다. 고층빌딩이 즐비한 회사 앞에 내리니 불과 몇 시간 전에 지리산 능선과 계곡 길을 걸었던 기억이 까마득한 일처럼 느껴진다.
벼르고 별렀던 천왕봉 일출은 제대로 못 봤지만, 역시 지리산은 명산이었다. 사진 몇 장으로 감동을 전해 본다... <80. 이희용>
Tip Story
세상의 모든 것이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이라고 금강경에 나오는 구절이 있지. 무릇 형상 있는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이야기인데, 그걸 보았다고 인생이 달라질 것도 없지 않나?
나도 동해안 일출부터 미국 그랜드 캐년 일출 까지 다 본 것 같은데, 지금은 수리산에서 바라보는 깨끗한 일출이 더없이 아름답다. 무릎도 안 좋은데 너무 고생하지 마라. 좌우간 수고 했다. 좋은 사진이 많구만.<74 이종일>
사진들이 생생해서 지금 집에서 보고 있는데도 산속에 있는 듯 합니다. 제 경우는 지리산 종주를 하고 오면 약 한 달쯤은 그 여운이 찐하게 남았습니다.
애쓰셨습니다. 일출의 아쉬움이 있어야 다음을 기약하시죠.
다음 출발 팀은 성탁산악회호 하시죠. 제안합니다. <84 유성재>
▲ 여명이 밝아온다. 일출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 해는 떴는데 모습이 안 보인다. ???
▲ 천황봉에 안개가 감싸고 있다.
▲ 장터목으로 하산하는 길. 지리산 연봉이 보인다.
▲ 모진 바람에 가지들을 잃고 외롭게 서 있는 소나무
▲ 여전히 서쪽의 봉우리들은 안개에 가려 보이질 않는다.
▲ 중턱만 내려 와도 이렇게 맑은데...
▲ 수줍은 표정으로 피어난 야생화
▲ 거미줄에 이슬이 맺혀 있고. 무슨 꽃일까?
▲ 강아지풀인가?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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