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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행 국정감사 전경. ⓒ스카이데일리
화폐 곧 돈은 경제의 혈맥이라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단순히 일반인들이 수첩이나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사용하는 화폐(돈)는 진정한 의미에서 경제혈맥이 아니다. 통화(currency,通貨)라고 하는 화폐가 진정한 경제혈맥의 주체다.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은 통화량을 통해 우리나라 경제 전체의 유동성을 관리한다. 돈이 흐르지 않고 막히면 뚫어서 흐르게 하고 반대로 너무 많이 흘러 유동성 홍수(인플레이션)가 날 듯 하면 줄이고 하는 정책을 통화관리를 통해 하고 있다. 한은이 통화관리를 한다는 것은 곧 ‘경제의 생사여탈권’과 ‘국민의 재산권’을 쥐고 있다는 얘기다.
통화는 주지하다시피 이른바 ‘보이지 않은 화폐’를 훨씬 더 많이 포함한다. 이를테면 한은이 100조원의 본원통화(편의상 주머니 화폐)를 찍어 시중은행에 풀면 은행들은 이 돈을 종자돈으로 돈놀이(예대마진)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신용창조라고 하는 ‘빚 창조’가 이뤄져 실제 통화량은 보통 20배(2000조원) 이상으로 늘어난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합법적인 가짜 돈놀음’이라고 하지만 오늘날 경제행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유동성 흐름 지표인 것 만은 분명하다. 설사 은행이 진짜 화폐(본원통화) 보다 20배를 뻥 튀겨 이자수익을 벌어들이는 것이 못마땅하다고 해도 그 대신 은행은 개인이나 기업들의 돈이나 금융자산을 안전하게 관리해 주는 역할을 한다.
은행들이 누구나 믿을 수 있는 ‘금고지기’를 하면서 그 신뢰를 바탕으로 가짜 돈(신용=빚)을 얼마만큼 창출해 유통시키느냐가 바로 국가경제의 혈맥이 제대로 돌고 있느냐를 판가름 하는 핵심 잣대다. 그래서 가짜화폐라고 해도 우리의 일상 경제생활을 쥐고 흔든다.
최근 한국은행은 이와 관련해 혈맥이 잘 돌지 않는 ‘돈맥경화’ 현상이 지금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해명성 보고서를 하나 냈다. 한은은 ‘주요 통화관련 지표 동향 및 평가’(김철·표상원)란 제하의 보고서에서 본원통화를 이용한 은행들의 신용통화 비율(통화승수)이 줄어든 것은 ‘5만원권’과 ‘저금리 기조’가 주된 이유라고 했다.
쉽게 말해 고액권이 나온데다 은행에 예금할 필요성을 못 느껴 소위 집집마다 ‘개인장롱이 곧 금고화’ 되다보니 신용통화를 늘릴 바탕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개인이나 기업이 대출금이든, 영업이익금이든 일단 현금이 들어오면 은행에 넣어두고 사용하는 경향이 줄어들었다는 의미다.
<본 보고서를 작성한 두 사람은 내용과 관련해 사견이라는 전제를 달았으나 한국은행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공식적으로 보고서가 오픈됐기 때문에 한은이나 한은총재의 입장과 전혀 다르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을 전제한다>
한은의 논리는 일견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놓고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경제의 위험성을 피해나갈 면피용으로 내세운다는 것이 너무 궁색하지 않은가. 과연 한은이 책임 있는 통화관리의 최고 사령탑인지 의심스럽다.
한은이 통화량 관리지표로 사용하는 M2(광의의 통화, Bord Money)의 본원통화 대비 비율인 ‘통화승수’는 2000년 초반만 해도 25배 수준이었다. 하지만 금융위기 이후 떨어지기 시작해 5월 현재 20.9배를 보이고 있다.
M2는 협의의 통화인 M1(Narrow Money)에 만기 2년 미만의 금융상품 등 이자소득을 포기할 경우 언제든 현금화가 가능한 금융상품을 포함한다. M1은 민간보유 현금(주머니 화폐)에 예금통화의 화폐까지 합친 것을 의미한다.
세부적인 계산공식을 보면 M1은 ‘민간보유현금+은행 요구불예금+은행 저축예금+수시입출식예금(MMDA)+투신사 MMF’ 등의 합계이고, M2는 ‘M1+정기예·적금 및 부금+거주자외화예금+시장·투자형 금융상품+실적배당형 금융상품+ 금융채+발행어음+신탁형 증권저축’ 등의 총합이다.
이 같은 M2가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은 국가경제 혈맥이 적시에 돌고 있지 않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은행들의 빚(신용) 창조가 원할이 이뤄지지 않아 민간이나 기업에 돈이 적기에 지원되지 못한다는 의미다. 한은은 신용창조가 이뤄지지 않은 이유를 5만원과 저금리로 들었지만 보다 근본적이고 큰 진짜 이유는 우회적으로 숨기거나 적절히 은폐했다.
은행들은 지금 개인은 물론 기업도 불신한다. 대출을 꺼리는 현상이 확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존 대출도 회수하는 대책을 우선적으로 강구하는 양상이다. 돈놀이를 하는 금융기관이나 사채업자 등이 경제상황이 안 좋을 경우 하게 되는 생존을 위한 기본 생리가 최고조로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차라리 몸부림이라는 표현까지 쓸 정도의 국면이다. 경기가 좋을 때는 돈을 빌려줄 대상을 찾느라 혈안이 되지만 경기가 위축될 때는 그 반대현상이 지금 금융권에 팽배해 있다. 당연히 개인도 기업도 돈줄이 말랐고 있는 돈도 돌지 않는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나마 신용창조가 되는 것 조차 금융기관 간 급전이 필요한데 따른 상품들이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기관 간에 이뤄지는 신용창조는 시중의 유동성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이처럼 금융권이 움츠리기에 나서고 있는 것이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한국경제의 진짜 위기이고 원인임에도 한은은 이를 감추는 모습이다. 한은은 ‘5만원권 면피론’을 제대로 하려면 시중에 얼마만큼 5만원권이 유통되고 장롱에 얼마만큼 있는지를 자신감 있게 내놨어야 했다.
물론 한은은 “성장성이 있으나 신용도 및 담보력이 취약한 유망 중소기업 등에 대한 자금지원을 강화하기 위해 지난 4월 기술형창업지원한도를 신설하고 대출금리를 하향 조정하는 등 신용정책(credit policy) 수단으로 총액한도대출제도를 전면 개편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창구 현장을 과연 지도하고 관리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통화유통속도 역시 마찬가지다.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M2비율이 2000년 1분기만 해도 0.87이었으나 금융위기 이후 지속 하락해 올 1분기는 0.70 수준이다. 한은은 현금성 자산을 중시하는 통화수요 심화(증대)가 그 원인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봤다.
개인이나 기업 등 경제주체들이 돈을 틀어쥐고 쓰지 않는 만큼 통화유통속도를 높힐 대책이 없다는 변명이 아닌가. 통화유통속도가 줄어드는 현상은 인체로 치면 혈액이 도는 속도가 감소하는 현상이다. 혈액 자체가 잘 공급되지 않는 마당에 그 작아진 혈액마저도 공급속도가 떨어지면 인체로 치면 죽음 내지 시한부 인생이다.
한은은 한국경제의 위험요인이 고작 5만원권과 저금리 문제(개인의 현금자산 중시)이니 해결할 대책이 없다는 식의 면피성 홍보를 해야 하는지 심히 한심스럽다. 이런 식으로 가면 ‘경제의 죽음’이라는 ‘디플레이션’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인플레이션 보다 치명적인 디플레이션은 가계도, 기업도, 국가도 동시에 망하는 ‘동반몰락’이기에 공포스럽다. 그것이 공황이고 더 크면 대공황이다. 인플레이션은 미친듯 널뛰기 하는 것이기에 잡을 방안이라도 있지만 디플레시션은 일단 빠지면 누구도 나오기 어려운 죽음으로 가는 사선이다.
한은은 이를 예상하면서도 대책은 커녕 그 책임을 국민 각자의 ‘자기안위’로 몰아넣고 있으니 한은은 과연 한국경제의 사령탑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
국민은 누구든 위험에 닥치면 그 위험을 피하려고 한다. 누구든 개인의 생명과 재산은 스스로 지키려고 하는 본능을 가졌다. 그런 점에서 한은이 국가경제의 명운이 달린 더 큰 이유를 제쳐두고 개인의 자기보호본능을 탓하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처사다.
금융권을 쥐락펴락 쥐고 흔드는 한은이 ‘은행들만 살겠다고 하는 행동’은 별 안중에 없는 식이고 또한 대책도 없이 ‘국민핑계’를 대고 있으니 중앙은행의 자격을 잃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청와대 해바라기’라는 비아냥을 받고 있는 한은 총재의 자격도 더 이상 논할 가치를 못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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