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로 보는 상권|빌딩|재건축 뉴스

뒤로 리스트 인쇄
news only email오류보내기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

홍찬식의 청담유감(有感)

BTS와 ‘오징어 게임’의 뿌리를 찾아서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1-10-13 10:33:56

 
▲홍찬식 칼럼니스트(전 동아일보 수석논설위원)
/소득 증가로 문화 관심 폭발한 1990년대 시작
/젊은 세대는 영상산업으로, 기획자들은 해외로
/개방과 국익 위한 결단, 인프라 확충도 힘 보태
/그때와 확 달라진 사회, 한류 미래 불확실하다
 
BTS에 이어 ‘오징어 게임’에 대한 해외의 관심이 뜨겁다. 덩달아 한국의 이미지도 높아지고 있다. 특정 국가의 대중문화에 매료되면 그 나라 전체를 좋아하게 되는 소프트파워의 힘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종식되고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지면 외국 젊은이들 사이에 한국이 여행 1순위가 될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코로나 블루’로 시달리는 와중에 그나마 한류의 위세가 우리를 미소 짓게 한다.
 
한류가 언제 어떻게 시작됐는지에 대해서는 이제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그거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 아니냐”는 정도로 적당히 넘어가서는 곤란하다. 괜히 찬물 뿌리는 것 같지만 한류도 하나의 유행인 이상,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을 것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한류의 생명력을 오래 유지시키기 위해서도 뿌리를 아는 게 중요하다.
 
한류라는 명칭이 만들어진 지역은 대만이다. 1994년 대만에 진출한 가수 김완선이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대만에서 방영된 한국 드라마들이 시청률을 높였다. 대만 언론들은 한파주의보를 ‘한류(寒流)’라고 부르는데 한국 드라마의 경쟁력을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로 한자를 바꿔 ‘한류(韓流)’라고 칭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만을 한류의 진원지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하다. 비슷한 시기인 1997년 중국에서 방영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1999년 베트남에서의 드라마 ‘의가형제’, 2003년 일본 NHK의 ‘겨울연가’ 등 아시아 국가에서 한국 드라마들이 잇따라 인기를 끌면서 연쇄반응처럼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국지적 ‘돌풍’은 세계적 ‘태풍’으로 진화했다. 한류의 장르도 K팝 영화 게임 웹툰 등으로 확대됐다. 요즘 해외에서 한국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쿨’ ‘스마트’ ‘테크놀로지’ 등 호의적인 것 일색이라고 한다. 한류의 공이 크다.
 
이런 전체적인 과정보다는 한류의 출발점인 1990년대라는 시기에 더 주목해야 한다. 1995년은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처음으로 1만 달러(1만823달러)를 돌파했던 해이다. 문화 소비에 대한 욕구는 국민소득 증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소득이 올라가고 의식주 문제가 안정되는 시점에 이르면 어느 나라든 문화생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어 있다. 돌이켜보면 한국에서는 이 시기가 1990년대였다.
 
이때 ‘영화의 거리’ 충무로에 젊은 인재들이 대거 유입된 것도 같은 흐름이었다. 대중문화의 매력에 눈을 뜬 젊은 세대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미개척지에 뛰어들었다. ‘앙팡 테리블’의 진출은 영화를 넘어 영상 전반에 걸쳐 이뤄졌다. 이전과는 차별화되는 뛰어난 영화, 드라마가 탄생됐다.
 
문화 소비자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첫사랑’ ‘모래시계’ ‘허준’ ‘젊은이의 양지’ 같은 드라마가 지금으로선 ‘말도 안 되는’ 시청률 60%대(요즘은 드라마 시청률이 20%만 넘으면 초대박이 된다)를 기록했고, ‘서편제’ ‘투캅스’ ‘접속’ 같은 영화에 장사진이 이어졌다. 가수 서태지가 일약 ‘문화의 아이콘’으로 등극한 시절이기도 했다.
 
1990년대 문화의 또 다른 키워드는 ‘개방’이었다. 미국 영화사의 직접 배급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고(이전까지는 국내 업체를 통해서만 할리우드 영화가 수입됐음), 스크린 쿼터(할리우드 영화의 국내 상영 물량을 제한하는 제도)의 문턱을 낮췄으며,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이 결정됐다.
 
여기서 한국인 특유의 강점이 발휘된다. 투지와 돌파력, 캐치업(catch up) 능력이다. 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말에서 나타나듯이 우리보다 수준이 크게 앞서 있던 미국 일본의 대중문화가 국내로 밀물처럼 들어오면 한국 시장은 ‘문화 식민지’로 전락할 우려가 있었다. 이 점에서 개방은 ‘위기’였다. 국내 영화인들은 개방에 반대해 미국 직배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에 뱀을 풀어놓거나 최루가스를 뿌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의 개방은 문화 종사자들에게 ‘위기’보다는 ‘자극제’로 작용했었음이 훗날 입증됐다.
 
한류의 뿌리를 찾아 나설 때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 국가리더십의 역할이다. 자칫 하면 ‘친일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 때 김대중 대통령은 “국익을 위해서는 국민들을 설득하는 일도 필요하다”며 과감하게 개방 쪽을 선택한다. 그가 남긴 말이 아직 기억에 남는다. “우리 민족은 불교, 유교도 받아들인 뒤 우리 것으로 재창조해 해동 불교, 조선 유교를 만들어낸 사람들인데 일본 대중문화 정도를 받아들인다고 크게 문제 될 게 없다.”
 
그럼에도 일본의 만화, J팝은 우리에게 두려운 상대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큰 부작용은 없었고, 오히려 이후 국내 대중문화의 역량 상승으로 일본 내 한국 대중문화 열풍이 실현됐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우리가 개방을 계속 미루고 보호막 안에 안주하고 있었다면 한류의 운명은 달랐을 것이다.
 
또 하나, 1990년대 말에 설치가 본격화됐던 초고속인터넷망도 훌륭한 조역이 됐다. 국내 인터넷망이 이 때 세계 최고 수준으로 깔리면서 대중문화의 전파와 확산, 피드백 등에서 촉매 역할을 했다. 인터넷 인프라 없이 한류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흘러간 얘기를 틀면 바로 채널이 돌아가는 시대임에도 여기에 강한 유혹을 느끼는 것은 그 시절의 도전정신이 못내 그립기 때문이다. 당시 젊은 문화 창작자들은 용기와 열정이 넘쳤고 문화소비자들은 좋은 작품에 적극 호응했다. 문화기획자들은 “문화 수입국에서 탈피해 수출국이 되어야 한다”며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끈질기게 해외의 문을 두드렸다. 정치지도자들은 국익을 위해 가야 할 길을 주저하지 않았다. 한류는 이 모두의 합작품이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면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다. 젊은이들은 꿈을 잃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사회적 역동성이 크게 떨어져 있다. 내편, 네편을 나누는 살벌하고 경직된 풍토에서는 문화의 필수 요소인 창의력, 상상력이 살아 숨 쉴 수 없다. 1990년대 인터넷 시대에 이어 다시 찾아온 AI 시대라는 격변기 속에서 정치지도자들은 기반 조성에 무기력한 모습이다. 이들에게 한류는 그저 인기 유지의 이용물일 뿐이다. 획기적 변화가 없으면 한류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다.

 [스카이데일리 / skyedaily__ , skyedaily@skyedaily.com]
  • 좋아요
    3

  • 감동이에요
    0

  • 후속기사원해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

<저작권자 ⓒ스카이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전글 : 교육의 실종
내년 방영 예정 MBC 드라마 '지금부터, 쇼타임!'에 출연하는 박해진이 사는 동네의 명사들
기원강
대우조선해양
남기천
멀티에셋자산운용
박해진
마운틴무브먼트
뒤로 리스트 인쇄
email오류보내기 트위터 페이스북 밴드 카카오톡
독자의견 총 1건의 댓글이 있습니다.
등록하기

스카이 사람들

more
“동정의 시선이 아닌 피해자로서 고아의 권리를 찾아주죠”
요보호아동 및 보육원 퇴소자 위한 인권사업 진...

미세먼지 (2021-10-26 20:30 기준)

  • 서울
  •  
(양호 : 38)
  • 부산
  •  
(최고 : 15)
  • 대구
  •  
(좋음 : 21)
  • 인천
  •  
(좋음 : 26)
  • 광주
  •  
(좋음 : 29)
  • 대전
  •  
(보통 :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