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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 태수 장통은 몇 명의 군사만을 거느리고 군의 치소가 있는 낙랑성에 다다랐다. 성문 앞에 이른 태수는 큰 소리로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이 순간 고구려의 깃발이 일제히 성벽 위로 솟아올랐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장통은 망연자실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장수 하나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성까지 비워 주다니 고맙기 한량없소이다!”
고구려 장수 소야(所野)였다. 그는 조불의 명령에 따라 태수가 자리를 비운 새에 성을 점령했다.
소야는 군사들에게 명해 태수를 잡아 오게 했다. 성문이 열리고 군사들이 쏟아져 나오자 장통은 혼비백산하여 남쪽으로 도망쳤다.
도주 중에 왕준을 만난 장통은 그의 조언에 따라 함께 가고자 하는 한족 1천여 호를 거느리고 요하를 건넜다. 요서의 극성(棘城)에 다다른 장통은 선비족 추장인 모용외를 만나 몸을 의탁했다.
이 전쟁을 끝으로 낙랑군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듬해 대방군도 고구려에 병합되면서 오랜 시간 요동에서 명맥을 유지해 오던 한족 세력이 깨끗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편, 서방에서는 흉노족 유총이 장안을 점령하고 진나라의 사마업과 문무백관을 포로로 잡았다. 이로써 진이 멸망하고 여러 부족이 나라를 세워 힘을 겨루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 당시 화북의 사족과 일부 관리는 이민족의 지배를 거부하고 양자강을 건넜다. 그들은 강남의 호족들과 손잡고 진(晋) 왕가의 종실인 사마예(司馬睿)를 왕으로 추대했다. 사람들은 이후의 진나라를 동진이라 하고, 이전을 서진이라 불렀다.
군웅할거의 시대가 전개되는 가운데 선비족 모용부가 요서를 무대로 급속히 성장했다. 서진의 몰락으로 독자적 세력을 구축한 평주 자사 최비는 날로 강성해지는 모용부가 두려웠다.
최비는 수하들을 불렀다.
“모용부가 점점 세력을 뻗쳐오니 가만히 있다가는 우리도 온전치 못할 것이오. 어찌하면 좋겠소?”
자사의 책사이자 조카인 최도(崔燾)가 아뢰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오랑캐는 오랑캐로 다스려야 합니다.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고, 모용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선비의 단부(段部)와 우문부(宇文部)에도 협공을 청하십시오.”
자사는 최도의 의견을 들어 각 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최비가 보낸 사신을 맞은 미천왕은 이 틈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왕은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모용부를 누르고 요서 땅을 차지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오.”
모두가 왕의 판단을 지지했다. 다만 국상 창조리는 신중했다.
“우리를 이용하려는 수작입니다. 함부로 나서서는 안 됩니다.”
조불이 반박했다.
“근래 모용부의 성장세로 보아 조만간 우리에게도 큰 위협이 될 겁니다. 이번 기회에 그 싹을 도려내야 합니다. 한낱 최비 따위가 두려워 화를 키우는 어리석은 짓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미천왕은 결단을 내렸다. 조불에게 군사 2만을 주어 요서로 보내기로 한 것이다.
같은 선비족이면서도 모용부와 사사건건 부딪치는 단부와 우문부는 전쟁이 끝난 후 빼앗은 땅을 나누어 주겠다는 말에 넘어갔다. 그들은 부리나케 군사를 이끌고 달려왔다.
이리하여 각국의 군사가 모용부의 근거지인 극성 앞에 다다랐다. 평주부의 든든한 지원까지 등에 업은 연합군은 그 기세만으로도 성을 금세 함락시킬 것 같았다.
모용외는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부하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적의 대군이 코앞에 닥쳤으니 어찌 상대하면 좋겠는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족장의 아들 모용황(慕容皝)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근래 들어 지략이 뛰어난 장수로 널리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처지가 곤궁한 마당에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느냐.”
“저들이 수적으로는 많지만 각기 다른 속셈을 품고 모였기에 서로 믿지 못합니다. 약간의 계책을 쓰면 스스로 물러갈 겁니다.”
모용황은 아버지에게 계책을 자세히 품했다. 족장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모용외는 당장 우문부에 살진 암소와 술을 보냈다.
“이것은 우리 상공께서 드리는 성의입니다. 받아 주십시오.”
우문부 수장 실독관(悉獨官)은 사자의 공손한 태도가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무슨 꿍꿍이요?”
“저희 상공께서는 항복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어차피 항복할 거라면 형제 사이나 다름없는 우문부가 제격이라 여겨 저를 보내신 겁니다.”
복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 것이었다.
실독관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며 다시 물었다.
“원하는 게 무엇인지 조건을 말해 보시오.”
“달리 조건이 있겠습니까. 그저 목숨만 부지할 수 있으면 족합니다.”
의구심이 들기는 했지만 욕심이 앞섰다. 싸우지 않고 모용부의 땅을 전부 차지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실독관은 모용외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사자를 돌려보냈다.
모용외가 보낸 사자가 우문부 수장을 만나고 갔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고구려와 단부 진영에도 퍼졌다.
의심이 생긴 조불은 소우를 불러 말했다.
“양쪽이 모종의 밀약을 맺은 게 분명하다. 예로부터 선비족은 이(利)에 따라 움직이는 승냥이들과 같지 않았더냐.”
소우도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다가는 틀림없이 저들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질 겁니다. 당장 군사를 물려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이리하여 조불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그러자 눈치를 보고 있던 단부 역시 군사를 물렸다.
양국 군대가 돌아가자 실독관은 마음이 불안했다. 우문부의 힘만으로는 모용부를 압박하기 어려웠다. 그는 극성에 사람을 보내 약속대로 성문을 열고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모용외는 호탕하게 웃으며 사자에게 대답했다.
“어리석은지고! 호랑이가 떠난 마당에 여우 혼자 무슨 힘을 쓰겠느냐.”
이 말을 전해 들은 실독관은 모용외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군사를 몰아 무섭게 성을 공격했다.
우문부 군사가 쳐들어오자 모용외는 장군 배의(裵疑)에게 성문을 열고 나가 싸우게 했다.
군사 모용황은 출전하는 장군에게 넌지시 일렀다.
“우문부의 선봉대와 맞서 싸우다가 그들의 중군이 합류하면 밀리는 척하면서 퇴각하시오.”
배의는 기병 3천을 이끌고 나가 우문군과 맞부딪쳤다. 모용부 군사들의 휘몰아치는 공격에 허를 찔린 우문부 군사들은 우왕좌왕했다. 장군 명보(明甫)가 군사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승기를 잡은 배의는 궁수에게 활을 쏘게 했다. 날아간 화살에 수많은 우문부 군사가 쓰러졌다.
배의는 활을 뽑아 적장을 노리고 시위를 당겼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이 정확히 명보의 목에 꽂혔다. 장수를 잃은 군사들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이를 본 실독관이 중군을 이끌고 구원하러 달려갔다.
우문부의 본대를 맞아 싸우던 배의는 작전에 따라 자연스럽게 밀리는 척하면서 군사를 후퇴시켰다. 아끼는 수하의 죽음에 분노한 실독관은 앞뒤 가리지 않고 맹렬히 뒤를 쫓았다. 후위에 있던 장군 연타소(淵他昭)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뒤를 따랐다.
연타소의 군대가 수풀이 우거진 곳에 당도했을 때였다. 별안간 수풀 양편에서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화살이 날아들었다. 연타소는 방패로 화살을 막아내려 했지만, 소나기처럼 퍼붓는 화살을 감당할 수 없었다. 화살을 맞은 말이 쓰러지자 타고 있던 장수도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 위로 화살들이 피 냄새를 맡은 맹수처럼 덮쳐 왔다.
운 좋게 화살을 피해 목숨을 건진 자들도 창칼을 들고 뛰어나온 모용군에 의해서 무참히 도륙당했다.
한편, 배의를 쫓는 데 정신이 팔렸던 실독관은 후위에서 들리는 북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새카맣게 몰려온 모용군이 후방을 공격하고 있었다. 군사를 돌려 도우러 가는데, 달아나던 배의의 군대가 돌아서서 반격에 나섰다. 추격하던 우문군은 졸지에 포위당하는 신세가 됐다.
살이 베이고 뼈가 꺾이는 혼전이 벌어지는 동안 모용군의 포위망은 더욱 좁혀졌다. 실독관은 이를 악물고 탈출로를 찾으려 애썼다.
한나절 넘게 혼전이 거듭되면서 우문부 군사는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그런 살육의 현장에서도 우문의 수장 실독관만은 목숨을 건져 도망칠 수 있었다. 매복을 지휘했던 모용외는 달아난 실독관을 쫓지 않고 승전고를 울리며 성으로 귀환했다.
우문부의 대패 소식을 들은 평주 자사는 덜컥 겁이 났다. 금방이라도 모용부의 대군이 성문 앞에 나타날 것만 같았다. 최비는 최도를 극성으로 보내 승전을 축하하기로 했다. 이는 자신이 뒤에서 사주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극성에 도착한 최도는 성문으로 들어섰다.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수많은 군사가 날카로운 창칼을 든 채 양편에 도열해 있었다. 이 모습을 보니 주눅이 들어 오금을 펴기도 어려웠다.
최도는 간신히 걸음을 옮겨 모용외 앞에 나아가 정중히 예를 갖췄다.
“승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귀부(歸部)의 위엄이 온 천하를 덮고도 남을 겁니다.”
사자의 아첨에 넘어갈 인물이 아니었다. 족장은 이미 이번 일의 배후에 평주 자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녕 단칼에 죽고 싶은 거냐? 너희가 더러운 계략을 꾸민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이 자리에서 당장 이실직고하면 목숨은 살려 주마. 그렇지 않으면 너의 목을 베고 평주부를 쑥대밭으로 만들겠다!”
최도는 겉보기와는 달리 심약한 자였다. 그는 벌벌 떨며 그동안 해 온 수작을 소상히 털어놓았다.
“최비에게 가서 전해라. 곧 빚을 받으러 갈 테니, 각오하고 있으라고.”
사자는 살려 보내 준다는 얘기에 감지덕지하며 머리를 연신 조아렸다.
최도가 돌아간 후 모용외는 군대를 정비해서 평주로 진격했다.
모용외의 선전포고에 자사는 겁에 질려 안절부절못했다.
이에 최도가 의견을 냈다.
“아무래도 모용부와 대적할 수 있는 나라는 고구려밖에 없습니다. 그곳으로 가서 몸을 의탁하는 게 좋겠습니다.”
최비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식솔과 함께 기병 수십 기의 호위를 받으며 고구려로 달아났다. 이 소식을 들은 평주부의 군민은 앞다투어 성문을 열고 뒤늦게 당도한 모용부의 군대를 맞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요서 지역의 패권은 모용부로 넘어가게 되었다. 모용외는 백성이 동요하는 걸 막기 위해 기존 관리를 유임시키고 생업에 열중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 덕분에 평주는 곧 안정을 되찾았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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